응팔 선택 상플/(선택) 94년 어느 날, 어쩌면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14장 나의 사랑 앞에 나는 서 있다.

그랑블루08 2016. 4. 7. 17:52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14

 

 


* 맴찢 주의, 팜므파탈형 인기녀 덕선 주의, 썸않썸 주의, 스압 주의(개럴들은 못 믿겠지만, 분량은 날마다 갱신ㅠㅠ)


* 처음부터 <9.어.면>의 배경음악은 "사/랑/...그/ 놈..."(김/연/우)이야. 배경음악으로 들으면서 봐주길.....(아래는 음악 영상)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71164588&q=

 

 

[텍본 재업로드]



 

14장 나의 사랑 앞에 나는 서 있다.

 

 

 

놓을 수가 없는 너를,

부르다가 내가 죽을 것 같은 너를,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너를,

나는 욕심을 낸다.

 

그리하여 침묵하며 켜켜이 쌓인 사랑이

어느 새 휘몰아쳐

이토록 모든 감각으로 덤벼드는,

세월의 깊이만큼 깊어지고만 있는

나의 사랑 앞에 나는 서 있다.

 

그리하여 나는 고백한다.

 

사랑아, 선택해.... 제발...나를.....

 

 

 

1

 

 

우진의 키스를 거절했던 그 다음 날, 덕선은 중국 노선을 탔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이었지만, 잡아놓길 잘했다 싶기도 했다. 그 날 그렇게 울면서 들어간 이후, 우진을 어떻게 봐야 할지 덕선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덕선의 사과는 진심이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처음 우진을 만난 것도, 택을 그토록 가슴 안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도, 그러면서 우진을 잡고 있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우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덕선이 그를 만나오는 동안, 우진이 그렇게 조급하게 다가올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날 우진은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 무언가 확답을 요구하는 사람처럼, 덕선의 마음을 알고 싶어했다. 그는 키스를 통해 덕선의 마음을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조급하게 만든 것인지. 어쩌면 그 또한 덕선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무언가 선뜻 다가가지 않는, 결계라도 치는 듯한 자신의 태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을 할 때는 아무 생각이 안 나지만, 비행을 끝내고 호텔에 묵을 때면 상념에 시달린다. 분명 어지러운 것은 우진 때문인데, 덕선은 호텔 전화로 자신의 삐삐를 눌렀다. 녹음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그러면 이 무거운 마음도 놓아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나 정작 녹음되어 있는 첫 번째 음성은 우진의 것이었다.

 

"미안해요. 덕선 씨."

 

그는 미안한 듯 주저하는 목소리였다.

 

", 너무 빨랐죠. 마음이 바빴나 봐요.

우리 곧 100일도 되는데 싶어서....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성급했어요.

근데 덕선 씨 언제 와요? 계속 스케줄 바쁘죠? 추석 때는 볼 수 있어요? 혹시 모르니까....."

 

100? 벌써? 사실 덕선은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했다. 대충 7월 초쯤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이런 면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이 이토록 집중하지 못하고 떠다니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첫 번째 음성이 끝나고 다음 음성으로 넘어갔다.

 

"끊어졌네요. 스케줄 잡힐까봐 미리 얘기할게요. 108일 토요일은 꼭 비워두세요. 그 날 우리 100일이에요.

런던행 비행기는 630일인데, 실제로 덕선 씨가 절 기억하는 건 71일일 거예요. 아기 침대 때문에.

71일부터 계산하면 108일이 저희 100일입니다. 도착하면 연락주세요. 보고 싶어요, 덕선 씨."

 

그렇게 또 음성 메시지는 끝이 나고 다음 메시지로 넘어갔다.

 

[....?] [무슨 말....?] [...아파. 덕선아.....]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많이 들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어서 숨소리까지 외울 지경이지만, 그 낯익은 음성에 또다시 목이 메었다.

 

108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생각했다.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 같았다. 절대 그 무엇과도 공유될 수 없는 그 시간을 두고, 너와 그 사람 사이를 이제 선택하라는 건가 보다.

이렇게 그 사람과 가까워지다 보면, 세월이 쌓이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이런 오랜 마음도 묻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선택하라고, 이기적으로 살지 말라고, 내게 운명이 강요하는 건가 보다.

 

덕선의 눈에서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 덕선아? 너 울어?"

 

침대에서 잘 준비를 하던 덕선의 동기가 그걸 봤는지 어깨를 잡았다.

 

"아니. 눈에 가시가 들어갔나 봐."

 

"? 내가 봐줘?"

 

"아니, 방금 나왔어. 아 좀 아프네. 계속 눈물이 나."

 

덕선의 눈에서 눈물이 자꾸 나오자, 동기는 상처 난 거 아니냐며 확인해 봐야 한다고 난리였다. 그러나 덕선은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있지, 너 남미 노선 바로 타야 되지?"

 

". 미치겠다. 하필이면 추석인데. 그 때 내가 걸릴 게 뭐니. 재수에 뭐가 붙었....."

 

"그거, 내가 바꿔줄까?"

 

"? 진짜? 진짜루?"

 

"."

 

"!! 나야 너무 좋지만, 너 괜찮아. 추석인데.... 우진 씨도 보고 해야지."

 

"괜찮아."

 

"근데 이번에 스케줄 완전 캡빡쳐. 우리 내일 돌아가잖아. 일요일 하루 쉬고, 월요일 밤 비행기야. 거의 스트레이튼데 괜찮겠어?

나야 저번에 연가 쓴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케줄이 개판이 됐지만, 너 너무 힘들텐데...."

 

"아니, 진짜 괜찮아. 그리고 월요일 밤이면, 일요일, 월요일 다 쉴 수 있네. 됐어. 그 정도면."

 

빨간 눈을 하고 덕선은 동기의 스케줄을 자신이 받았다. 그렇게 덕선의 2주간의 스트레이트 비행이 시작되었다.

 

 

2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918일 일요일. 덕선은 우진에게 만나자고 했다. 커피숍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는 덕선의 앞으로 우진이 다가왔다.

 

", 일찍 오셨네요. 덕선 씨."

 

"아니에요. 금방 왔어요."

 

"안 피곤해요?"

 

". 괜찮아요."

 

"내일부터 추석연휸데, 내일이나 그 다음에 봐도 되는데, 내가 너무 보고 싶다고 징징댔나 봐요."

 

우진은 멀리 있는 덕선에게 자신이 너무 보고 싶다고 힘들게 한 건 아닌지 녹음하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괜히 일하는 사람, 부담스럽게 한 것 같았다. 그러니 어제 비행에서 돌아와 바로 오늘 보자고 한 것이 아니겠나 싶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피곤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보자고 하는 덕선이 좋았다. 혹시 조금은 덕선이 자신을 가깝게 느끼는 것은 아닌지, 아주 조금은 자신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닌지......

 

그러나 정작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덕선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어두웠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이상하게 서늘한 기운이 심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시선이 너무나 텅 비어 보여서, 자신은 그 텅 빈 마음 안으로 단 한 걸음도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추석 때 봐도 된다고, 짐짓 더 밝게 말을 건넸다.

 

덕선이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어려운 말이라도 꺼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

 

이미 그의 이름 속에 울음이 배여 있었다.

 

"미안....해요."

 

그래 너무 성급했던 것이다.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그 마음을 달라 요구했던 것이다.

 

"우진 씨, ......할 말...이 있어요."

 

우진은 자신의 앞에 놓인 물을 바닥까지 한 번에 비워내었다.

 

"......그 말.....다음에....들을게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미안....해요. 정말....미안해요."

 

아직 아무 말도 제대로 전달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덕선의 목소리에서, 그 울음이 배인, 아니 이제 큰 눈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통해 지금 덕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아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너무 빨랐어요. 덕선 씨가 너무 좋아서....덕선 씨 마음은 기다려주지도 못하고, 나 혼자 달렸어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그런 말....하지 말아요."

 

그는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덕선은 이미 그도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다른...사람을....사랑할 수 있을.......알았어요..."

 

이젠 우진의 울대도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아니...사랑하고 싶었어요...진심으로.....

그 사람이 우진 씨이기를...바라고 또 바랐어요. ...."

 

과거형, 그리고 가정법. 현재의 반대. 그녀는 지금 정공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 정공법은 그대로 우진의 심장으로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울지 말자, 뭘 잘 했다고 우나 싶은 마음으로 덕선은 자신의 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을 꺼냈다. 이 남자도 아프고 자신도 아파야 하는 말, 그 말을 꺼내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있어요...."

 

하아......

 

우진의 깊은 한숨소리가 그녀의 눈물 사이로 터져나왔다. 미안하다는 말로 사죄를 다 할 수 없는데, 그래도 미안하고, 그리고 고마웠다. 덕선에게는 그랬다. 그러나 그를 더 잡고 있는 것은 덕선의 이기심일 뿐이다.

 

".........그 사람에게...갈 겁니까?"

 

우진은 묻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가기 위해서 자신에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냐고, 이렇게 잔인한 고백으로 자신을 상처 주는 것이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덕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가요. 그럴 거면, 우진 씨에게 이런 말도 하면 안 되죠."

 

"...왜 못 가는 겁니까?"

 

"다른 사람...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아주 오래된 사람.....있어요. 그 사람한테....."

 

우진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덕선 씨 아닙니까?"

 

마치 무언가를 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마치 답답하다는 듯 우진은 덕선을 바라본다.

 

"아니에요. 5년을....지켜봤어요. , 아니에요, 절대.

다른 사람 좋아하는 거, 직접 들었어요."

 

"하아.....나랑 같네요."

 

그 말에 덕선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이대로 계속, 우진 씨를 만나는 건, 정말 그에게 더 나쁜 짓이었다. 여기서 끝내는 것이 맞다고, 나 하나 좋자고, 이 착한 남자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니다 싶었다. 아프더라도 혼자서 아파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올곧게 혼자서 그 아픔을 견뎌내어야 한다.

 

"우진 씨는요. 나한테 선물 같았어요. 그래서 너무너무 고맙고 미안해요."

 

"............."

 

"하지만, 이까지가 맞아요. 지금까지도 내 욕심이었어요.

고마웠어요. 우진 씨, 우진 씨 덕분에 아주 많이 위로 받았어요.

우진 씨에게 난, 진짜 나쁜 여자지만, 제게 우진 씨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진짜 위로였어요."

 

그랬다. 우진은 그 사이 조금이라도 숨 쉴 수 있는 위로였다. 그래서 고맙고 미안했다. 그 다음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러면 나는 기다리면...되는 겁니까....."

 

한참을 듣고만 있던 우진이 메어오는 목을 짜내어 뱉은 말이었다.

 

덕선은 그게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설마 나를 기다리겠다고...?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어요."

 

덕선의 단호한 말에도 우진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아파 보이는지도 몰랐다.

 

"덕선 씨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그 사람에게 가지도 못하고....

그러면 덕선 씨도 그 사람을 기다리는 거 아닙니까.

덕선 씨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난 그런 덕선 씨를 기다리는 거고....."

 

"안 돼요...... 그러지 마요. 우진 씨. 진짜 그러지 마세요."

 

"덕선 씨, 사람의 마음은 끊는다고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 남자가 그 여자와 잘 된다면....."

 

"..........."

 

"내게...와요."

 

덕선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절대 안 된다고, 눈물이 흐르는 와중에도 고개를 저었다.

 

"마음 그대로 나한테 오면 돼요. 그 남자, 하아....억지로 지우지 않아도 돼요.

그 때, 내가 위로가 되었으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너무 잔인해요. 그건 아니에요.

아프더라도 내 몫이에요. 그걸 우진 씨가 감당해서는 안 돼요.

지금까지도 내 이기심이었어요. 그래도 더는 안 돼요. 내 몫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에요.

당신까지 아프게 하면 안 돼요."

 

"그거 아세요? 덕선 씨.

난 아직 준비가 안 돼서.... 덕선 씨를 아직 놓아줄 준비가 안 돼서....

덕선 씨가 내게 온다고 해야, 그 남자가 안 되면, 내게 돌아와 줄 거라고, 그렇게 믿어야 내가 지금 보내줄 수가 있어요."

 

준비.... 그랬다. 또한 나는 이토록 이기적이었다. 선택의 앞에서 한 사람의 준비를 놓쳤다. 내 마음만 아프다 하고 정작 이 남자의 아픔을 보면서도 외면하려 했다.

 

"기다린다는 보장이 있어야 나도 살 수 있어요.

그래야 나도....적어도 보내주는 흉내라도....낼 수 있어요. 덕선.. ....."

 

울었다. 덕선은 그렇게 고개를 숙였고, 우진은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없이 마음이 젖어갔다. 슬픔이 심장을 잡아먹고, 준비도 되지 못한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겁내고 있었다.

 

"두려워서.... 그래서 조급했어요.

덕선 씨의 마음이 흐르는 걸 보고 두려웠어요."

 

우진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터져 나왔다. 놀라는 덕선을 바라보며, 우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슬펐다.

 

"재채기와 사랑은 감출 수가 없죠.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니까....그 사람의 작은 것도, 작은 눈짓도 자신의 눈에는 다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랬나. 이 남자의 눈에 그게 다 보였나 보다. 내가 그를 보고 있었듯이 이 남자는 나를 보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이 남자가 마음 아프고, 또 그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되어 울었다.

 

어느 책에서 말했던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대의 눈과 손과 마음은 한 사람에게로 그 사람이 없어도 그 사람에 대한 걱정으로 언제나 그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알지 못하는데, 그 사람의 옷 뒷자락을 만져주는 손처럼, 그 마음은 그토록 한결 같았다.

 

우진에게는 그것이 보였다.

 

그렇게 우진과 헤어졌다. 그리고 오롯이 견디기로 했다. 잊어보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그를 잊으려 또 다른 우진과 같은 사람을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그 고통과 마주하며 그렇게 아프면 아픈 대로, 죽을 것 같으면 죽을 것 같은 대로, 그러다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으면, 그 보고픈 심장을 움켜쥐며 그렇게 살리라, 덕선은 그렇게 다짐했다.

 

 

3

 

 

겨우 진정한 덕선은 탑 언니와 함께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화장실 바로 앞에는 뭔가 단호한 표정의 택이가 서 있었다. 그것도 덕선의 핸드백까지 챙겨들고는 마치 빨리 나가자는 듯한 포즈였다.

 

"다른 캐리어는 없어?"

 

"? ."

"오늘 회식가려고 공항 사무실에 놔두고 왔어요."

 

택의 물음에 덕선의 대답이 뭔가 부실해 보였는지, 탑 언니가 뒤에서 덧붙였다. 택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덕선의 팔을 잡았다.

 

"그럼, 가자."

 

", 괜찮아. 나 혼자 걸을 수 있....."

 

마음은 분명 똑바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몸은 전혀 반대로 비틀대더니 앞으로 고꾸라질 듯 위태했다. 그 순간 택의 손이 덕선을 잡아 당겨, 자신의 단단한 가슴 안으로 끌어안았다.

 

난감하네, 두근대네 뭐,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마치 생존의 문제였다. 이렇게 취해서 비틀대며 나간다는 것이, 그것도 기원 전체 회식에서 이런 꼴을 보인다는 것이 쪽팔리다 못해 죽고 싶었다. 앞으로 전진하려면 어쩔 수 없이 택이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남의 회식에 와서 난리를 치느니 택의 말대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맞았다. 그의 손을 의지하며 밖으로 나오면서 덕선은 말했다.

 

"택시만 태워주면 돼. 택시 타는 데까지만......"

 

덕선의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아니면 술주정으로 생각하는 건지 택은 별말이 없었다. 어차피 말이 많은 애도 아니니.....

 

그렇게 식당 밖을 나오는데 하필이면 윤정아 2단이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와중에도 왜 윤정아는 눈에 들어오는지, 왜 이 와중에도 택이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지, 술을 더 마셔야 했다. 아예 코가 비틀어지도록,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마셔야 했다.

 

", 오빠, 벌써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렇게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와중에도 윤정아의 목소리에 담긴 아쉬움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오빠'라는 말은 자꾸만 가슴 속에서 걸리적거렸다.

 

미친....이 미친 성덕선.....

 

덕선은 눈을 찔끔 감았다.

 

"우리....."

 

통성명도 하지 않은 덕선이 그들의 대화에, 아니 윤정아의 물음에 답했다.

 

"친구예요."

 

"?"

 

이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아니고,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체였다. 덕선은 자신이 대답하고 있으면서도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싶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윤정아의 표정으로 봐서는 이 여자 많이 취했나, 뭐 그런 내색이었다.

 

"우리 친구라구요. 소꿉 친구. 그러니 오해하지 마세요."

 

"네에?"

 

그녀의 말에 이번엔 진짜로 윤정아가 놀란 듯했다. 그저 술주정인가 했는데 오해하지 말라니, 이건 분명 뼈가 있는, 의도된 말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곁에서 눈에 띄게 택의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오늘 택이 보러 온 게 아니라, 유 과장님 축하드리러.....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구요."

 

뭔지 모르겠지만,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덕선은 필사적이었다. 택이도, 또 앞에 선 윤정아도 모두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덕선은 자신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 ! 택시다. 택시. 아저씨~~!!!"

 

마침 골목 위에서 빈 택시가 내려왔다. 누군가 내리고 나가는 모양이었다. 덕선의 손짓에 택시가 바로 앞에 정차했다.

 

", 타고 갈게. 너 들어가."

 

택이는 그 말에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차문을 열어주고 덕선을 탈 수 있게 부측해 주었다. 그 모양새가 불안했는지 덕선은 자꾸만 채근을 해댔다.

 

"택아, 너 들어가. 나 혼자 들어갈 수 있어. 다들 너 기다리시잖아. 들어가. 어어~~!!"

 

택은 덕선이 뒷자리에 제대로 앉은 것을 확인하더니 자신의 몸도 밀어 넣어 앉았다.

 

"..택아!!!!"

 

"쌍문동으로 가주세요."

 

덕선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택은 뒷문을 닫으며 기사아저씨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너 들어가라니까!! , 혼자 가도 돼. ~~ 저렇게 기다리는데..."

 

덕선은 이렇게 오지랖 넓게 이러는 자신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기껏 저렇게 기다리는데, 그것도 자신이 짝사랑해 온 사람이 저렇게 서 있는데 덕선 자신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게 될까봐 그게 더 신경이 쓰였다.

 

분명 차문을 닫기 전, 윤정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래서 부럽다구요. "

 

어쩌면 둘의 기회를 덕선 때문에 놓쳐버린 건 아닐지, 자신이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지, 그 때문에 결국 택이만 더 아파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고 만다.

 

"니가 이러면 내가 미안하잖아."

 

"그럼....."

 

"........"

 

"나한테 미안해 해."

 

"?"

 

택은 굳은 표정으로 앞만 보며 앉아 있었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마치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아까 뒤로 들리던 윤정아의 말이 자꾸만 머리를 울려댔다.

 

어쩌면, 택아, 너 짝사랑이 아닐지도 몰라.....

 

4

 

분명 정신은 멀쩡한 것 같은데, 몸은 말을 듣질 않았다.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택이가 눈치 보여서, 혼자서 제대로 좀 걸어보려고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빙빙 돌고, 발은 자꾸만 휘청이기만 했다.

 

자신에게 기대면 좋으련만, 덕선은 혼자 갈 수 있다며, 그렇게 택을 밀어냈다. 술 취했을 때만이라도 기대면 안 되느냐고, 나한테는 이제 기대기도 싫은 거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택은 말하는 대신 덕선의 앞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업혀."

 

벽을 짚고 가려는 덕선의 앞에서 택의 등은 업히라고 제 주인의 성정처럼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말하는 듯했다.

 

"혼자 갈 수 있어. 이렇게 짚고 가면 돼."

 

"..........."

 

"나 혼자 걸을 수 있다니까....어어!!!! !! 너 뭐해!!!!"

 

택은 자꾸 거절하는 덕선의 앞으로 갑자기 다가오더니, 마치 안을 것처럼 제스츄어를 취했다. 마치 유공연수원에서처럼.....

 

"...잠깐만. 알았어. 알았다고. 업힐게. 업힌다니까."

 

그래 안기는 것보다는 업히는 게 나았다. 안겨 가다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술을 핑계 대고 택이에게 어떤 실수를 해댈지, 덕선 스스로도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택이의 등은 택이의 성격 그대로였다. 따뜻했고, 넓고, 단단했다. 희동이였던 니가 언제 이렇게 남자가 되어버린 걸까. 그래서 물음 하나가 빗장 사이를 열고 튀어나와 버렸다.

 

"택아....."

 

"."

 

"824일날 무슨 일, 있었어?"

 

"....?......"

 

갑작스런 물음에 택이 당황하는 듯, 목소리가 흔들렸다.

 

"우리 급하게 만났던 날. 왜 있잖아. 사천에서 정...."

 

"알아, 언젠지."

 

날짜만 얘기해서는 기억이 안 날까봐 덕선이 설명을 덧붙이는데, 택은 덕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알고 있었던 듯 대답했다.

 

"그날, 무슨 일 있었어?"

 

"..........."

 

택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덕선은 알 수 있었다. 택의 아픈 부분을 건드렸다는 것을.

 

"택아..... 묻지 말까? 너 속상한 일인데...내가 괜히 물었어. 미안...."

 

"마음이....무너졌어."

 

"?"

 

그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니 마음을 흔든 건 내가 아닌데, 당연히 아니다 싶으면서도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너무 오래....아닌 척 했나 봐."

 

"..........."

 

"내 마음을....."

 

덕선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5년을 한결 같았을 그 마음을, 그렇게 자꾸 침묵시켜야 했을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아서 자꾸만 목이 얼얼했다. 덕선은 택의 목을 끌어안았다.

 

".....택아..."

 

"."

 

"아프지 마....."

 

"..........."

 

"그럼......나도....아파....."

 

그 순간 택의 걸음이 멈추었다. 등으로 그의 심장 소리가 터질 듯이 퍼져왔다.

 

"무슨....뜻이야?"

 

그제야 덕선은 정신을 차렸다.. 내가...드디어 미쳤구나.

 

"...당연하잖아. 우리가 보통 친구 사이냐?

, 선우나 동룡이 힘들면 안 힘들어?"

 

변명 같이 나온 대답에는 떨리는 덕선의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

 

그러나 그 대답을 들으며 나온 택의 목소리는 그저 짧은 탄식 같은 것이었다.

 

택의 목소리는 왜 실망스럽게 들릴까.

왜 니 어깨에서 힘이 내려가는 것 같을까.

아마 술에 취한 탓이겠지. 그렇게 보고 싶은 내 기대 때문이겠지.

 

가슴에 돌을 묶어두어야 한다. 기대하지 않도록, 착각하지 않도록....

이 따뜻하고 넓은 등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5

 

택은 덕선의 집 앞에 다다라서야 덕선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덕선은 집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평상에 앉으며 말했다.

 

"고마워. 너 들어가서 쉬어."

 

", 안 들어가?"

 

"못 들어가, 들어가면 죽어.

, 한 번만 더 술 째려서 오면, 울 아버지가 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는대."

 

저번에 덕선이 인사불성이 돼서 실려 온 이후, 동일이 온 동네를 뒤집어놨던 것을 택이도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떡하려고....."

 

"술 좀 깨고, 정신 차리고 가지 뭐.

가을이라 선선하니 좋다."

 

덕선은 평상에 앉아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잠 들어."

 

덕선은 여전히 괜찮은 듯 들어가라며 손짓만 했다. 그러다 이내 그 손짓에 무언가 부딪치는 바람에 눈을 떴다.

 

", 너 뭐해?"

 

택이가 덕선의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 있다.

 

"거기 딱딱해. 나한테 기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택의 손이 덕선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로 끌어당겼다. 나를 위한 어깨도 아닌데, 그 어깨를 빌렸다. 마치 나를 위한 어깨인 것처럼, 그렇게 따뜻하고 두근댔다. 그리고 그만큼 슬펐다.

 

쿵쿵쿵쿵.....

 

온 세상이 심장소리로 가득 찼다. 고즈넉한 밤이었다. 어느 새 어깨에 기대있던 덕선의 머리가 살짝 미끄러졌다. 그보다 택의 손이 더 빨리 그녀의 얼굴을 미끄러지지 않도록 잡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 사이로 손끝에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너는 어느 새 잠이 들었나 보다. 그리고 그 잠결에서도 너는 슬픈가 보다.

 

하아......

 

자신도 모르게 올라오는 한숨을 택은 나직하게 뱉어내었다.

 

"덕선아...?"

 

조용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택의 소매 끝을 잡고 있던 손도 어느 새 미끄러져 내리고, 그저 고른 숨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오늘 너는 많이 슬펐을까. 그렇게 술을 마시고, 그 모든 걸 게워낼 만큼, 그러다 눈이 빨개지도록 울어야 될 만큼 너는 많이 슬펐겠지.

 

"미안해. 덕선아."

 

택은 잠든 덕선을 향해 듣지도 못할 사과를 전했다.

 

"나 때문이야."

 

그녀가 지금 아픈 것, 그녀가 지금 슬픈 것,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너무 오래, 너무 간절히, 너무 절실하게 바랐던 자신의 소원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길 바랐던 소녀를 아프게 만들었다.

 

그랬다. 늘 한결 같았던 기도처럼 빌었던 소원. 그의 바람은 한 가지였다. 한 사람은 애인이 생기길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애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던 그 이기적인 소원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은 다시 그에게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헤어지길 바랐는데..... 근데 니가 헤어지니까.....더 아파, ...."

 

다가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리할 수도 잊을 수도 없었던 그의 소녀는 지금 자신에게 기대어서도, 잠이 들어서도, 눈가가 젖어 있었다. 그것이 또 택을 아프게 했다. 내색하지 않는 습관, 아파도 그것을 감추어 왔던 세월, 무던하다 못해 감정이 없는 존재로 치부되어 왔던 시간들 속에서 그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감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울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니 도리어 누르면 누를수록, 침묵하면 할수록, 내면에서는 바다처럼, 소용돌이처럼 그렇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친구....... 오래된 친구.......

그녀와 자신의 습관 같은 관계.......

 

친구로라도 곁에 있을 수 있는 걸, 이렇게라도 볼 수 있는 걸, 감사해야 한다고 머리는 그렇게 수천 번도 더 세뇌시키려 하지만, 그 친구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폭력에 택은 심장이 무너지고 만다.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택에게 있어 친구라는 관계의 정의였다.

 

덕선의 눈에 아까 맺혀 있던 눈물이 어느 새 볼을 타고 흐른다. 밤이다. 고요하다. 그러나 또다시 택의 가슴은 회오리처럼 감정이 휘몰아쳤다.

 

택은 천천히 얼굴을 기울였다. 자신의 어깨에 조용히 잠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욕심내서도 안 되고, 욕심낼 수도 없는 그녀에게로, 그녀의 하얀 볼로 다가간다. 그녀의 볼에 맺혀 있는 눈물만 닦아주겠다고 저 파란 대문 안 사천에 사는 그의 친구에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면서, 아니 그 친구를 애써 잠시만 지우면서, 그렇게 그녀의 눈물을 입술로 닦았다. 입술로 번져오는 부드러운 감촉에 택은 눈을 감았다.

 

욕심....이겠지.......

 

눈을 뜨는 그 순간, 고개를 드는 택을 덕선이 언제 눈을 떴는지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택의 심장이 저 아래로 쿵 하고 떨어져 내린다.

 

!!!

 

택이 당황하면서 덕선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던 건지, 덕선의 몸이 뒤로 기우뚱하며 넘어갔다. 택의 팔이 황급히 덕선의 머리를 감싸 안아서 그나마 머리는 닿지 않았지만, 넘어지는 덕선을 따라 택도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누운 그녀의 위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며 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얽혀들었다. 택의 눈앞으로, 정말 너무나 가까이 그녀의 입술이 보였다. 아니 그녀의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다. 5년 전 그 어렸던 날, 꿈속에서 만나 지금까지도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서 밤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바로 그 입술이 택의 입술 바로 앞에 있었다.

 

꿈인데, 너무나 생생했던 그날의 감촉은, 몇 번이나 꿈 속을 헤매도, 단 한 번도 그 때의 실감을, 그 때의 감각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택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하고 택은 단발의 소리를 냈다.

 

미쳤구나....내가.....

 

택은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머리를 두르고 있던 자신의 팔을 조심스럽게 빼내며,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멀어지려는 택을 잡은 것은 덕선이었다. 택이 당황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덕선의 손이 그의 재킷의 양깃을 움켜잡았다. 꼼짝할 수 없도록 덕선은 그의 깃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멀어지지도, 그렇다고 가까워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택은 어정쩡하게 덕선을 바라보았다.

 

"...나쁜 놈......"

 

덕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인지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 앞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덕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곤 그대로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렇게 그녀의 입술은 어느 틈에 택의 입술과 맞닿아 있었다.

 

정신을 잃을 만큼 부드럽고 촉촉했다. 예전 그 어렸던 날의 감각은 저만치 달아나버리고, 아니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그녀의 입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입술에서 전해지는 부드러움은 심장 저 안까지 퍼져 가서 온 몸의 감각을 일깨우며 돌아다녔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일어서는 것만 같았다. 너를...느꼈다. 너라는 존재를, 너라는 부드러움을, 너라는 유일한 사랑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

 

택의 재킷을 잡고 있던 덕선의 손이 툭하고 평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택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심장까지 전해지는 그 부드러움을 알아버려서 이제 돌아갈 길도, 물러설 길도 찾을 수 없었다. 택의 손이 덕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렇게 또다시 다가갔다. 그녀의 입술을 빼앗고, 그녀의 숨결까지 삼키며, 그렇게 깊이 깊이 다가갔다.

 

놓을 수가 없는 너를, 부르다가 내가 죽을 것 같은 너를,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너를, 나는 욕심을 낸다. 그리하여 침묵하며 켜켜이 쌓인 사랑이 어느 새 휘몰아쳐 이토록 모든 감각으로 덤벼드는, 세월의 깊이만큼 깊어지고만 있는 나의 사랑 앞에 나는 서 있다.

 

그리하여 나는 고백한다.

 

사랑아, 선택해.... 제발...나를.....

 


 

 

 

사/랑/ 그/놈 / 김/연/우/ 버전

 

늘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하고
늘 혼자 추억하고 혼자 무너지고
사랑이란 놈 그 놈 앞에서
언제나 난 늘 빈털털일뿐
늘 혼자 외면하고 혼자 후회하고
늘 휘청거리면서 아닌 척을 하고
사랑이란 놈 그 놈 앞에서
언제나 난 늘 웃음거릴뿐
사랑해 널 사랑해
불러도 대답 없는 멜로디
가슴이 멍들고 맘에 눈은 멀어도
다시 또 발길은 그 자리로
사랑해 또 사랑해
제 멋대로 왔다가
자기 맘대로 떠나간다
왔을때 처럼 아무말도 없이 떠나간다

 

늘 기억땜에 살고 추억에 울어도
늘 너를 잊었다고 거짓말을 해도
숨을 삼키듯 맘을 삼키고
그저 웃으며 손을 흔든다
사랑해 널 사랑해
목이 메여 불러도
너는 듣지 못할 그 한마디
고개 떨구며 사랑 앞에 난 또 서있다
사랑해 널 사랑해
제 멋대로 왔다가
자기 마음대로 떠나가고
왔을때 처럼 아무말도 없이 떠나가도
모른척 해도 날 잊는대도
사랑은 다시 또 온다
그래 아직 내 가슴은 믿는다
사랑 사랑은 다시 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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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어.면> 오늘 회는 내가 이 글을 적게 된 이유이자 목적이었음. 소원을 이룸.

   그러나 이렇게 길게 갈 줄 몰랐다. 14회가 되어서야 이 부분을 쓰게 될 줄은ㅠㅠ
  그러나 글빨이 안 된다는 것이 함정. 내 상상이 글로 표현되지 못함이 안타깝....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