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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16장 사랑은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

그랑블루08 2016. 4. 7. 19:59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16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989418

 

 

* 이번엔 일찍 옴. 2~3회 안에 마무리 지으려 한 회에 계속 내용이 많을 듯함. 생업을 위해 빨리 끝을 봐야 할 듯.


* 원작 대사, 표정, 분위기 딴다고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정작 활용은 거의 못함. 도대체 뭘 한 건지. ㅜㅠ
원작 장면이 그대로 들어오면 지루할 것 같아서 최대한 쳐냄. 도저히 내용 연결상 어쩔 수 없는 부분만 가져옴.


* 스아압 주의!, <9.어.면> 연대기표? 주의, 최택 9단 주의!

 

[텍본 재수정]



16장 사랑은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내게 사랑은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를 놓고, ‘를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넘친다고,

사랑에게 무례하도록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랑이 크다고,

그 사람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덤벼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한 유익, 그 사람이 행복한 것,

그것이 내게는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내게 사랑은

그토록 오래 참고,

그토록 고요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고, 움직이는,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입니다.

 

그리하여 내게 사랑은

그렇게 십칠 년을 켜켜이 쌓아온

라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1

 

덕선은 그렇게 비행을 떠났다. 택은 그 남은 날들이 그토록 길 수가 없었다. 나날이 대국은 있었지만, 자신의 생일까지 왜 이리도 먼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목요일이었다. 덕선을 본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음은 이미 몇 년은 된 듯이 자꾸만 그리움이 스며나왔다. 이제 정말 다 되었구나, 어쩌면 내 마음은 이제 더 이상 눌러놓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골목길에 한참 공을 들여 주차를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최택 9단님."

 

택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골목 끝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한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택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한 번은 더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안녕하세요."

 

아주 잠깐, 택의 마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참으로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덕선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오늘이 금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초췌해진 이 남자의 얼굴을 보며, 조금은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택도 최택 9단이기 전에 남자였다.

 

"덕선이....비행 가서....."

 

그 말에 우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덕선 씨....만나러 온 거 아닙니다."

 

"그럼....."

 

"최택 9단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나를 기다렸느냐는 말을 하지 못했다. 택은 침을 삼켰다. 그가 무슨 질문을 할 것인지, 저번에 뱉지 못했던 무언가를 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택도 준비를 해야 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선 씨 생일이 혹시....9월 중순입니까? 아니 정확하게 915일 이후입니까?"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

 

"정확하게는 며칠입니까?"

 

"17일입니다."

 

"하아.....그렇군요. 정말 그랬었군요."

 

대답하고는 있었지만, 택은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의 석 달 가까이 만났던 남자친구가 덕선의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미 헤어진 상황에 이제 와서 택에게 묻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택은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분명 다른 무언가가 더 있었다. 이 남자는 아마 이 물음을 발판으로 정말 묻고 싶은, 진정한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최택 9단님은 본인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시죠?"

 

그 말에 대해 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고요했다. 마치 택은 대국을 하고 있는 듯이, 너무 깊어 작은 돌 하나에는 물결 한 번 내지 않는 그 심연의 바다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5년간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915일이면 최택 9단님이 들르시는 곳이 있답니다."

 

그러나 택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그 어떤 수도 읽을 수 없었다. 우진은 순간 생각했다. 자신이 정말 이 남자의 대국 상대였다면, 정말로 무서웠겠다고, 이 고요함 앞에서 두려울 수밖에 없겠다고,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덕선 씨 생일....때문이었습니까?"

 

이제 택이 수를 놓아야 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말에 우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맞구나 라는 허탈감과 절대 이 게임은 이길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우누리에 루머처럼 올라와 있더군요.

89년에 개업한 이래 자신의 가게에 매년 최택 9단이 들른다고. 매년 같은 날짜에.

모두들 루머로 알던데, 전 왠지 그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택은 지금도 자신의 왼쪽 가슴 주머니에 들어있는 그것을, 여전히 자신의 심장을 지긋이 눌러주고 있는 그것을 떠올렸다. 그래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진짜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택은 그저 그런 우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나....되셨습니까?"

 

택은 침묵했다. 우진은 주어가 없는 질문을 던졌다. 무엇에 대해서인지, 주체가 누구인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택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우진이 지금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십칠 년.....입니다."

 

......

 

우진의 입에서 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숨을 쉬는 것도 아닌 탄식 하나가 터져 나왔다. 우진은 택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택은 여전히 진지했고, 고요했고, 단단했다. 우진의 턱이 점점 단단해졌다. 이 남자는 정말 진심이다. 그 무게가 우진의 숨을 꽉 막히도록 틀어막았다.

 

"어떻게....어떻게....그렇게......"

 

몇 번이나 뭐라고 말을 해보려던 우진이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최택 9단이다. 바둑에서도 삶에서도 그는 최택 9단이었다. 그리고 우진은 생각보다 최택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수를 다 보고 있으면서도 수를 내지 않는다."

 

"............"

 

"전문가들은 최택 9단님의 바둑 스타일을 그렇게 정의하더군요."

 

택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아버지께서....그러시더군요.

최택의 바둑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요.

바둑을 두다 좋은 수가 보이면 누구라도 그 수를 둬서 상대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최택은, 그저 참고 또 참으면서 묵묵히 바둑판을 조망할 뿐이라구요.

상대는 그의 무심함에 질려서 치명상을 입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쓰러지고야 만다더군요."

 

그리고 그 수에 우진이 바로 그 치명상을 입고 있었다.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묵묵함에 눌려서 자신도 모르게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태산 앞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도 태산은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나약함을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금, 이곳에서 또다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어마어마한 적수를 만난 것이다. 아니 적수조차 되지 않는, 싸워볼 전의조차 상실하게 만드는 그 거대함 앞에서 그저 허탈감과 경외감을 아이러니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이해가 됩니다. 이 모든 상황이...이제서야.....

그런데."

 

우진의 눈이 단호하게 택의 눈을 향했다.

 

"왜 아무 수도 두지 않으시는 거죠? 왜 침묵하는 겁니까?"

 

그래, 조금은 최택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은 덕선의 편이므로. 적어도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침묵했던 이유를 알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덕선을 힘들게 했는지, 왜 덕선 스스로 짝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 심지어 그가 다른 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그것만큼은 최택의 명백한 잘못이었다. 우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나온 최택의 대답에 우진은 진심으로 이 사람은 태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


"무례히 행하는 게 아니니까요. 자기의 유익만을 구해서도 안 되니까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로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랑은.....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니까요."

 

그랬다.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나 하나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 마음이 넘친다고, 사랑에게 무례하도록 다가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 사랑이 크다고, 그 사람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덤벼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을 위한 유익, 그 사람이 행복한 것, 그것이 택에게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어쩌면 그 사람과 얽혀 있는 관계까지도 확장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택에게 사랑은 그토록 오래 참고, 그토록 고요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고, 움직이는,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었다.

 

우진은 생각했다. 최택 9단은 삶에서도 최택 9단이라고, 바둑에서도, 삶에서도, 사랑에서도 그는 한결 같다고. 그래서 자신은 졌다고.

 

불계패. 우진은 돌을 던졌다. 이제 진심으로 이 남자를 지켜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십칠 년을 묵혔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우진은 택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천천히 돌아섰다. 어쩌면 덕선은 자신도 모르게 이 남자의 사랑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도 모르게 이 남자를 품게 되었을 거라고. 그의 17년의 마음이 그녀를 움직였을 거라고.... 그러니 자신은 깨끗하게 물러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예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택 9단에게 졌던 수많은 사람들, 불계패로 돌을 던져야만 했던 그 사람들, 그것도 스승까지 포함해서 어마어마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그 패배의 수치심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었었다. 그러나 우진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남은 감정은 단 하나였다. 경외심. 그는 태산이었다.

 

2

 

 

그토록 더디 가던 시간이 드디어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 선우가 대신 주차를 해주는 바람에 차를 맡기고 골목길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택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왼손에 만져지는 작은 함 하나가 자꾸 두근거리게 했다.

 

"일평생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섬기겠습니다."

 

가게 주인이 5년 전 말했던 그 의미가, 오늘처럼 크게 다가온 적도 없었다. 어쩌면 오늘 5년 동안 주지 못했던 선물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택은 그저 웃음이 새어나오기만 했다. 그러나 그 웃음이 굳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일축하 케잌을 불고, 일찍 좀 다니라는 덕선의 타박을 받고, 사용할 줄도 모르는 삐삐를 선물 받을 때까지 그저 얼떨떨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그러다 동룡이 야, 너 또 차였지? 라는 말에 덕선이 불이 붙으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 나도 인기 많거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덕선이 한 마디를 던지더니, 택의 눈을 똑바로 보며 충격적인 한 마디를 뱉었다.

 

"내일도 만나서 영화보기로 했어. 내가 싫어서 안 만나는 거야."

 

택은 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여전히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잘 생겼던데? , 이번에 차이지 마라."

 

"웬열, 누가 차여! 내가 늘 찼다니까."

 

선우가 툭 던진 말에 덕선은 죽어라고 달려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알았다며, 이번만은 그렇게 하자며 더욱더 덕선의 부아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에이씨, 야 근데 너 그 사람 언제 봤어?"

 

"전에, 요 앞 골목 데려다 줄 때, 얼굴 봤어. 우리 다 같이 봤어."

 

", 멀쩡하던데?"

 

"그럼, 멀쩡하지, 안 멀쩡하냐?"

 

아이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를 들으면서 그제야 겨우 택은 이 상황이 인지가 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얼마 전 유 과장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탑 언니가 고마워한다고, 소개팅이라도 시켜줘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그 때는 그저 웃어 넘겼다. 그냥 하는 말이려니 했었다. 그 남자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조금은 방심했을지도 모른다. 택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한 척, 물어보기로 한다.

 

"탑 언니, 그 선배 언니가 소개시켜 준 사람 말하는 거지?

아직도 잘 만나네. 안 차였네."

 

"아이씨, 진짜 이씨. 안 차인다니까. 내가, 내가 늘 찼다니까."

 

확인 사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 다음부터 택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찼다느니, 차였다느니, 아이들은 장난스럽게 떠들어대었다. 어쩌면 택이도 그 안에서 웃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연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택의 눈은 그 시끄러운 가운데 자신의 벗어놓은 재킷에 머물렀다. 조금은 불룩 올라와 있는 그 주머니를 처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모두가 거나하게 취한 밤. 너는 아주 밝게 웃고 있다. 이런 스캔들이 말이 되는 거냐며, 심소영이 미친 거냐며, 그렇게 재미난 사건이라도 생긴 듯이 그저 편하게 웃고 있다. 신발끈 하나도 제대로 묶지 못하는 걸 알기는 아느냐는 너의 말은 그대로 비수처럼 꽂힌다. 니들이 얘를 잘 모른다는 선우의 말에 단호히 입막음을 하며 나는 그저 너의 시선을 비낀다. 어쩌면 너의 웃음처럼, 선우의 말처럼 나는 답답해 미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사천을 핑계 대며 자신은 절대로 소개팅을 하지 않겠다는 그 아이의 말은 자꾸만 귓가를 맴돈다.

 

 

미련 없이 그대를 떠나보낸 내 마음속엔

오늘은 왜 이리 허전할까요 알 수 없어요

 

아침에 문뜩 눈뜨고 바라보니 눈부신 햇살

내 곁에 잠든 건 지나간 추억 너무 허탈해

 

그대 그 미소 그때 그 마음 되살아나서 날 부르네

두근거리는 내 작은 맘으론 붙잡을 수는 없지만

그대 그 미소 그때 그 마음 되살아나서 날 부르네

난 너를 느끼네 내 텅빈 마음 속.


니가 떠나고 나서야 너의 자리를 본다. 혹시나 흔들리는 내 눈을 들킬까, 가슴 아파하는 내 마음을 들켜버릴까, 나는 너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떠난 자리는 너의 온기만큼이나 너의 웃음만큼이나 시리다. 아주 잠시 행복한 꿈을 꿨는지도 모르겠다. 너에게 선물을 건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너에게 한 걸음 다가가도 될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내 마음의 한 켠을 조금 내어보여도 될지 모른다는 그런 조금은 성급한 마음을 품었나 보다. 아직은 아닐지도 모르는데, 너의 시간은 아직 더 기다려할지도 모르는데, 십칠 년의 무게가 이제 마음을 밀어내려 한다. 이미 새어나간 마음이란 것이, 이제는 제어가 되지 않을까봐 두렵다.

 

 

3

 

그저 대국에만 매달린 채, 또 일주일이 흘렀다. 정환이 서울에서 교육받는 동안만이라도 주말에는 모이자며 오늘 또 술자리를 가지기로 했다. 보고 싶으면서도 또 만나면 가슴이 무너질까봐 두렵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툭하고 기습적인 수를 받을 때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이 여전히 택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안녕하세요? 최택 9단님. 또 뵙네요?"

 

그리고 그 기습적인 공격은 기원에서도 불현듯 들어온다. 덕선의 선배, 이 사람을 통해서 들리는 이야기들은 차라리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안녕하세요?"

 

", 오늘 덕선이 만난다면서요?"

 

". 애들끼리 다 같이 보기로 했어요."

 

택은 그저 묵묵히 대답을 한다.

 

"덕선 양한테 진짜 내가 밥 한 번 사야 되는데..."

 

"괜찮아요. 제가 제 대학 후배 소개팅 시켜줬잖아요."

 

"..."

 

", 둘이 데이트 좀 하는 거 같던데..."

 

유 과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덕선 선배의 얘기는 하나 하나 택의 가슴으로 들어와 박혔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작은 것들이 덧붙여지면서 이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만 같다.

 

"안 그래도 지난 주에 같이 영화 봤다고 그러더라구요."

 

택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슬며시 이야기에 동참한다. 그렇지 않으면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제가 쭉쭉 밀어주고 있어요. 오늘 이승환 콘서트 표도 줬어요.

이번 주 일요일에 콘서튼데 최사범님도 가실래요?

제 친한 분이 콘서트 주관하시는 분이라 표 구할 수 있는데.

제가 콘서트 표 쏠게요."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들국화 좋아하셔요."

 

"..."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어쩌면 호의로 던진 말에, 택은 그래도 담담하게 대답하려 한다. 그러나 굳어진 표정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나마 유 과장님이 들국화 얘기를 꺼내시는 바람에 그럭저럭 넘어간 듯도 했다. 그저 택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인사를 건넸다. 더 이상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도록, 아니 상처받을 말들을 듣지 못하도록.

 

"그럼, 두 분 데이트 잘 하세요."

 

"덕선 양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

 

쉽게 하는 말들에 상처를 받고, 그 사람의 잘못도 아닌데 자꾸만 미워지려고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여전히 택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아니, 여전히가 아니라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동룡의 가게에 모여 있는데, 덕선은 모자까지 쓰고 밝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 날 그렇게 울고 있던 덕선의 모습을 또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동룡의 말처럼 덕선은 진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저번 사건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나 싶기도 해서 택은 용기를 내어 물어보기로 했다.

 

"너 왜 콜라냐? 너 진짜 술 끊은 거냐?"

 

"나 요새 보약 먹어."

 

덕선의 말에 물 만난 고기처럼 동룡이 끼어들었다.

 

"더 건강해질려고? 지금도 충분히 건강한데, 더 건강해지겠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흐흐흐"

 

"요새 만나는 그 사람이랑은 잘 되가나 보다?"

 

그러다 훅 하고 선우의 질문이 날카롭게 던져졌다. 아이들이 장난을 쳐도, 덕선이 씩씩대도, 귀에는 한 가지만 들렸다. 아니 날아와 박혔다. "나 이번 주 일요일도, 그 사람이랑 콘서트 보러가기로 했어."라는 말. 결국 택이 스스로 방금 유 과장님께 들은 말이라 확인사살해 주면서, 아까 들은 말의 강도와 덕선의 입으로 직접 듣는 말의 차이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술을 들이켰다. 아무리 취하고 싶어도 정신은 멀쩡했다. 동룡이 저렇게 취해서 가는데, 자신도 저렇게 정신을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택은 술에 취하지도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우진은 말했었다. 택이 수를 다 보고 있으면서도 수를 내지 않는다고. 좋은 수를 둬서 상대를 끊어버려도 될 텐데, 참고 참으면서 그렇게 바둑판을 조망할 뿐이라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택 스스로는 자신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바둑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참으라면, 참아야 한다면, 끝까지 참을 수 있다.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삶은, 그럴 수가 없다. 사랑은.....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제.

 

덕선아, 바둑처럼은 이제 할 수가 없는데, 어쩌지, .....

 

이미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린 너의 그림자를 대고 나는 그렇게 소리 없는 고백을 던진다.

 

 

4

 

1016, 한국기원 특별대국실 안에서 택은 임지현 9단에게 허리를 굽혔다. 모두가 놀라고 있는 것을 안다. 부장님도 과장님도 그리고 상대인 임지현 9단과 수많은 연구생들 앞에서 택은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택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그렇게 돌아나가는 택의 어깨를 이 부장은 툭툭 쳐주었다. 그런 이 부장을 향해서 택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 뭐야? 니가 여기 어떻게 왔어?"

 

그렇게 숨이 차도록 뛰어온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아침에 본 모습 그대로, 쌀쌀한 날씨에 떨면서 서 있었다. 그저 확인만 하자였는데, 그 확인에 대한 대가가 기권이라고 해도, 그것이 바둑 기사라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라 해도, 그래도 택은 확인해야만 했다. 그렇게 무딘 택에게도 보였던, 아니 그녀였기에 보였던 슬리퍼에 얇게 입은 모습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택은 확인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서 택이 앞으로 무엇을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해도, 그는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룡의 차에 타서 밝게 출발을 외치던 너의 목소리와, 사이드 미러에 비친 너의 표정은 너무나 달랐다. 당혹스러워 하던 그 표정을 보고 나서 바바리맨을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렸다. 내색하고 싶어하지 않는 너를, 아이들 앞에서는 늘 과도하게 밝게만 있고 싶어하는 너를, 기억한다.

 

놀란 너의 표정 앞에서, 웃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웃었다. 적어도 나는 기권할 이유가 있었고, 기권의 대가로 충분했다. 너를 혼자 두지 않은 것만으로, 그것으로 충분했다.

 

곧 문이 닫힌다는 소리에 둘은 함께 콘서트 장으로 들어갔다. 공연 관계자는 덕선과 함께 들어서는 택을 보며 자꾸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덕선도 택도 그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 함께 있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덕선이 택을 향해 돌아섰다.

 

", 나 근데 정말 바람맞은 거 아니거든?"

 

"그래, 알어."

 

"원래 오기로 했는데 오다가 사고가 났대. 큰 사고."

 

택은 그 말에는 대꾸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양복 재킷을 덕선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나 안 추워."

 

"내가 더워서 그래. 입고 있어."

 

"나 진짜 바람맞은 거 아니다?"

 

덕선의 얼굴이 아침과 달리 활짝 웃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택은 충분했다. 자신이 오늘 포기한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었다.

 

콘서트 안에서 방방 뛰는 덕선을 택은 그저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덕선의 말대로 콘서트에서 가수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덕선의 복장이 마치 제대로 준비된 복장이었나 싶기까지 했다. 택에게는 이승환 콘서트가 아니라 성덕선 콘서트인 셈이었다. 마치 18살의, 88년의 그 날로 돌아간 것 같은 덕선이를 보는 것만으로, 택은 오늘 대국을 기권할 이유가 충분했다. 이 아이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리고 이 아이가 웃고 있는 것만으로, 이 아이가 적어도 지금은 외롭지 않은 것만으로, 택은 오늘 이곳에 와야만 했던 당위였다.

 

앵콜의 향연 끝에 어느 덧 콘서트가 끝이 났다. 가수는 펄펄 날았고, 관객은 흥분했다. 5시에 시작한 공연이 거의 8시 반이 되어서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비상구마다 사람들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공연장 안은 어두워서 상관이 없었지만, 로비에서는 택이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우리, 조금만 있다가 나가자."

 

"? ?"

 

"사람이 너무 많잖아. 복잡해."

 

조금 더 있자는 말에 택이가 생각해도 사람이 많아 보였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에야, 둘은 약간 어색해 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여전히 로비에는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이러다 사람들이 알겠다 싶은 순간, 입구 옆에 가수 관련 앨범이나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덕선은 쏜살같이 가서 이승환 이름이 찍혀 있는 검정 야구 모자를 하나 사왔다. 그러고는 의아해 하는 택이 앞에 내밀었다.

 

"빨리 써."

 

"?"

 

"빨리 쓰라고. 너 알아 봐."

 

"....."

 

그제서야 택이가 모자를 받아서 썼다. 모자 하나 쓴다고 괜찮을까마는 의외로 사람들은 나가는 게 급해서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그냥 닮았나 보다 하거나,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정도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문으로 빠져나가는 줄이 너무 길어서 옆에 있는 다른 문으로 갈까 고민하는데, 문 근처 쪽에서 양복을 입은 몇 명, 그것도 카메라까지 들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순간 느낌이 왔다.

 

"오늘 제대로 땄어?"

 

", 대충 찍었어요."

 

연예부 기자들인가 싶은 즈음, 문제는 그 곁에서 발생했다. 문으로 나가던 몇 명이 수다를 떨면서 문제적인 발언을 해버린 것이다.

 

", 나 오늘 최택 9단 닮은 사람 봤다?"

 

"웬열? 진짜?"

 

"솔직히 진짜 같던데, 완전 잘 생겼어."

 

"누구랑 왔던데? 애인? 최택 맨날 여자 탈렌트들이랑 스캔들 나잖아.

얼마 전에도 왜, 그 여자, 누구지? 맞다, 심소영, 걔랑 열애설 났잖아.

, 여기서 진짜 보는 거 아니야?"

 

친구인 듯한 두 명이 연신 주위를 돌아보는 사이, 덕선은 택이를 끌고 뒤돌아서 다른 문으로 향했다.

 

"최택? 최택 9?"

 

아까 그 기자들이 갑자기 최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분명 그 여자들의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근데 최택 9단 오늘 오후에 대국 있었던 걸로 아는데?

아까 문화부에서 취재나간다고 했거든.

일단 문화부에 전화해 봐."

 

대국이라는 말에 덕선은 놀란 듯 택을 돌아보았다. 덕선의 시선에 택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택의 귀는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 대박이다. 대박."

 

"왜요? 선배, 최택 오늘 이겼대요?"

 

", 최택 기권했대. ~~!!

진짜 최택 여기 왔을 수도 있어.

내 인생에 이런 일이 다 있네. 특종이다, 특종!"

 

"예에? 최택이 콘서트 온 게 어떻게 특종이 돼요?"

 

"야이, , 머리 안 돌아가냐? 생각을 해 봐라.

최택이 11살에 등단한 이후, 그 어린 나이부터 단 한 번도 기권한 적이 없다고.

바둑을 두다 쓰러질지언정, 나왔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기권하고 콘서트를 왔다, 감이 안 오냐?"

 

"...그럼....혹시 여자?"

 

"이제야 정신 차렸네. 당연하지. 인마. 최택 요즘 누구랑 이름나는지 알지?

, 빨리 찾아봐. 오늘 으마으마한 스캔들이 터질 수도 있겠다. ?"

 

", 근데 무슨 옷 입고 있는지는 아세요?"

 

", 딱 보면 모르겠냐? 오늘 대국 가서 기권패 얘기하고 왔다니까,

딱 한국기원 유니폼 아니겠냐?"

 

"유니폼도 있어요?"

 

"어우, 답답한 놈. 양복 말이다. 양복.

최택 9단이 늘 입는, 거 왜, 검푸른 양복 있잖아."

 

"~ 그거요?"

 

"일단 너랑 나랑은 이쪽 돌자. 그리고 카메라하고 몇몇은 문 밖에 대기타라고 해."

 

"네엡!"

 

도대체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은 순간, 택의 손이 덕선의 손을 잡고 거의 달리듯이 문 반대쪽으로 급히 움직였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 두 개밖에 없는 데다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리니 문 앞은 거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택과 덕선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으나, 기자들은 막힌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 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 같기도 했다.

 

출입구를 돌아 오른쪽으로 뛰듯이 걸어 가보니, 이건 숨을 곳이 없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만 휑하니 펼쳐져 있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택은 덕선의 손을 잡은 채, 2층으로 향했다. 정신없이 2층 복도로 올라가는데, 연인 두 명이 그곳에 서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도 안 되겠다 싶은지 택은 덕선을 이끌고 반대편 복도로 뛰어갔다.

 

그쪽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화장실 옆 약간 들어가는 공간이 있는 정도 외에는 있을 만한 곳도 없었다. 숨을 곳도 없고 큰일 났다 싶었다.

 

"택아, 어떡하지?"

 

긴장하고 있는 덕선을 잠시 바라보던 택은 뒤쪽을 돌아보았다. 계단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택은 결심한 듯, 덕선을 벽 쪽으로 기대게 했다. 그러고는 덕선의 어깨에 걸친 택의 자켓을 벗겨, 다시 덕선의 허리에 묶어주었다.

 

"...택아...."

 

"양복 자켓 티가 너무 날까봐...."

 

그 말에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덕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택의 눈이 뭔가 단호해 보였다.

 

"덕선아."

"?"

 

"왼손으로...입술...좀 막아봐."

 

"?"

 

덕선은 그 말을 듣고도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을 막으라니, 뭘 하라는 건가 싶을 즈음, 택의 울대가 울렁거렸다. 그러더니 덕선의 왼쪽 손목을 잡고 들어 올려서는 그녀의 입술 위에 얹었다. 덕선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택이가 잡아서 올리다 보니, 손등은 덕선의 입술에, 손바닥은 밖으로 향한 채로 그렇게 올려져 있었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서 택이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한숨소리에서 택이의 긴장감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덕선의 심장도 조금씩 빠르게 뛰고 있었다.

 

"미안해."

 

그 순간 택이 덕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덕선의 눈으로 택이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 그 사람들처럼......"

 

택의 입술이 덕선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덕선의 심장이 그대로 쿵하고 떨어져 내렸다.

 

택의 눈은 감겨 있었다. 도대체 이 상황이 뭔지, 지금 뭐하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천천히 감이 오기 시작했다. 지금 택이는 아까 애정행각을 벌이던 그 사람들처럼 그러고 있자는 거였다. 마치 키스하는 것처럼, 오른쪽 복도 쪽에서 보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게 왼손을 올리게 한 거였다. 그리고 그조차 가리려 택은 지금 자신의 양손으로 덕선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 덕선의 얼굴을 가리려는 것 같았다. 자신은 모자를 쓰고 있으니, 손으로 덕선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머리는 분명 그렇다고, 이 방법밖에 없다고, 아까 그 사람들을 봤을 때, 자신들도 그저 피해 주자라는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기자들도 그런 마음이 들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다, 싶었다.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마당에 지금 이러는 방법밖에는 없다 싶었다. 숨을 곳도, 다른 출구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의 이성적인 생각일 뿐, 감각은 전혀 달랐다. 아무리 손바닥 위라고 해도, 그 손바닥 위로 택의 입술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부드럽고 촉촉한 그의 입술이 정말로 입을 맞추듯이 그렇게 다가왔다. 입술에 올려둔 왼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간지럽고 오묘한 느낌들이 온 몸의 세포를 타고 흘러 다녔다. 그 느낌이 너무나 낯설어서, 너무나 저릿해서, 덕선의 입술 사이로 낯선 소리들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 필사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때였다. 두두두 뛰어오던 발걸음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뭐야, 여긴 다 뭐 이래? 그 소리와 함께 또다시 발걸음은 다른 곳으로 뛰어가는 듯했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 너머로 냅둬라, 청춘이잖냐. 라는 소리도 얼핏 들려왔다. 이대로 넘어간 건가 싶어 긴장하며 서 있는데, 택이도 방심할 수 없었던지 여전히 입술을 부딪쳐 오고 있었다.

 

!

 

그 순간, 덕선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작게 새어나왔다. 뭐지, 지금 뭐지? 손바닥 사이로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다가왔다. 온 몸의 세포라는 세포가 모두 일어나서 반응을 해댔다. 모든 신경이 손바닥으로 몰려들었다가, 또다시 온 몸으로 흩어졌다. 이상했다. 심장이 저릿하다 못해 아플 만큼 뛰어댔다. 택의 입술과 덕선의 입술 사이는 분명 손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분명 키스를 나누는 듯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부딪치는 듯이, 그렇게 서로의 안까지 탐하는 듯이 그렇게 깊고 깊은 키스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글거렸고, 그래서 부끄러웠고, 그래서 가슴이 떨렸다. 이제 주변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택의 입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인 것처럼, 그렇게 서로의 입술을 나누는 것만 같았다.

 

덕선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들이 가고 나서도 계속되는 택의 입맞춤 아닌 입맞춤에 덕선은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서 떨리는 손을 약간 밀어내고서야 겨우 택의 입술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택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마치 입맞춤의 여운을 느끼는 듯한 그 표정에 덕선의 심장은 자꾸만 떨려왔다.

 

택의 눈이 천천히 떠지자, 이번에는 덕선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눈을 비껴서는 사이로 택의 한숨이 스며 나왔다. 택이 주먹으로 벽을 짚었다. 마치 무언가를 참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택의 이마가 덕선의 이마로 부딪혀왔다. 잠시 그녀의 이마에 기대어 쉬는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참는 것처럼 택은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덕선은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맞닿아 있는 이마 사이로, 자꾸만 그의 숨결이 느껴져서, 이러다 정말로 입술이 부딪칠 것만 같아서, 너무나 그가 가까이 있어서 숨도 쉬지 못한 채,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서 있었다.

 

"하아....큰일이다. 정말."

 

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택의 팔이 덕선의 허리를 감아 왔다. 어깨를 감싸는 팔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택은 자신의 팔 안으로 덕선을 가득 안아왔다. 그렇게 덕선은 택의 가슴에 기대었다. 덕선의 머리 위로 택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기댄 덕선의 얼굴로 힘차게 뛰는 남자의 심장소리가 울려왔다. 덕선을 안은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택의 입술로 터져 나오는 한숨이 자꾸만 덕선의 심장을 저릿하게 했다. 마치 연인의 품에 안긴 것처럼, 연인을 놓지 못하는 남자의 품에 안긴 것처럼, 덕선은 그의 단단한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온 세상이 심장 소리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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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과 우진의 대화 중 "수를 다 보고 있으면서도 수를 내지 않는다" 등의 내용은 실제 ㅇㅊㅎ 9단에 대한 평임
관련 자료 https://brunch.co.kr/@wehtaekkoh/75


*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한다는 말은 택 본체의 인터뷰 중에서 따옴.

 

* 오늘 갠적으로 이 글을 쓰게 된 2번째 소원을 이룸.


* <9.어.면> 1회~11회까지는 작성자 '그랑' / 12회부터는 '그랑블루'


* <9.어.면>의 시간+%8의 시간들 (추후 회차가 진행되면 아래 항목은 계속 추가될 수 있음)


6월 2일(목) : <9.어.면> 4회, 5회 : 택과 만난 싱가폴 라인(우진 만나기 1달 전으로 기억)
                   택과 비행기 썸. 한의원 썸. 전자회사 사장 딸 만난다는 얘기. 완전 마음을 접는 덕선/ 그 이후 선을 접는 택


6월 30일(목) : 덕선 런던 비행


7월 1일(금) : <9.어.면> 3회 : 덕선과 우진의 만남.
             (런던으로 가는 중. 우진은 봤지만, 덕선이 기억 못하므로, 덕선이 자신을 기억하는 순간부터.) -> 100일 10월 8일


7월 4일(월) : 한국 도착


7월 6일(수) : <9.어.면> 8회 : 우진에게 처음으로 삐삐 옴


7월 8일(금) : <9.어.면> 8회 : 우진과 첫 만남


8월 24일(수) : <9.어.면> 1,2회 : 친구들 모임. 덕선, 우진과 2달 아직 안 됐다고 함. 택에게 남친과 같이 보자고 시전.


8월 25일(목) : <9.어.면> 13회 : 택의 유일한 패배(유현욱 9단에게 왕위전 패)


9월 1일(목) : <9.어.면> 6,7,8회 : 우진과의 만남 두 달 째. 자현 만남, 삐삐 배경음악 바꿈. 택과 선우 술. / 골목으로 온 우진 / 택과 덕선 : 행복해 시전


9월 7일(수) : <9.어.면> 9,10,11,12회 : 덕선에게 전화 온 동룡 / 동룡 가게 고기 / 우진과 삼자대면 / 택이의 손잡기 시전


9월 14일(수) : <9.어.면> 12회 : 덕선 우진의 키스 피함, 울면서 들어가는 덕선/ 이를 보는 택 / 택과 우진의 대화


9월 15일(목) ~ 17일(토) : <9.어.면> 13회 : 덕선, 2주간 비행 중 중국 비행


9월 17일(토) : <9.어.면> 14회 : 덕선 중국 비행 후 집에 옴. 덕선 생일 / 집에서 생일함.


9월 18일(일) : <9.어.면> 14회 : 우진 만남 / 우진과 이별


9월 19일(월)~23일(수) : 추석 연휴


9월 19일(월) 밤 12시~25일(일) 오전 : <9.어.면> 14회 :  덕선, 2주간 비행 중 남미 상파울루 비행


9월 27일(화)~ 28일(수) : <9.어.면> 14회 :  덕선, 2주간 비행 중 동경 비행


9월 28일(수) : <9.어.면> 14회 : 탑언니와 함께 기원 회식 / 택과 윤정아 2단 /  덕선 폭음 / 취중키스


9월 29일(목) : 본원 이전


10월 1일(토) : <9.어.면> 15회 : 덕선 소개팅(탑언니 소개) / 데려다 줄 때, 선우, 동룡, 정환(토요일에 당일로 올라왔다 내려감) 봄.

 
10월 4일(화) : <9.어.면> 15회 : 덕선 비행 나가다가 새벽에 택과 마주침 / 정류장 / 택이 할 말 있다, 생일 때 보자 시전


10월 6일(목) : <9.어.면> 16회 : 택과 우진 만남/ 택, 사랑은 시전/


10월 8일(토) : <9.어.면> 16회 : 택이 생일
 

10월 9일(일) : <9.어.면> 16회 :  영화관(남자와 덕선 영화 봄, 포레스트검프)


10월 14일(금) : <9.어.면> 16회 : 택, 탑 언니와 대화(이ㅅㅎ 콘서트 표 들음)


10월 16일(일) : <9.어.면> 16회 : 이승환 콘서트 / 기자 피해 / 키않키 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