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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18장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그랑블루08 2016. 4. 7. 20:06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18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1008141

 

 

* 북경호텔에 대한 해석이 조금은 다를 수 있음. 자의적 해석 주의! 혹시 불편하다면 되돌아가기로.....


* 이 상황을 무의식과 의식으로 나누어서 봄.(또 사범님의 바둑스타일과 연관하여 해석함)


*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작감이 창조한 인물이라고 나는 여전히 믿음.
  작감이 태초에 캐릭을 만들 때의 그 느낌으로 봐주기 바람. 태.초.의.캐.릭.으.로!
  그래도 불편하다면 되돌아가기로.....


* 글로 보는 원작 복습 주의!
  이 글이 사실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거라, 두고 두고 복습하기 위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모두 넣어두려 함.
  대사, 표정, 미묘한 감정선 모두 글로 보고 싶어서....이건 <9.어.면>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함.
  그러니 복습을 원치 않는다면 역시 되돌아가기로....

 

* 이번 회 완결 아님 주의. 다음 회가 될 듯. 생각보다 길어져서... 자꾸 이렇게 길어져서 미안. ㅠㅠ

 


[텍본으로 재업로드]

 

18장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의식이 말한다.

열아홉 살의 어느 날 밤, 그녀는 거절한 것이라고.

가슴 저 안으로 밀어 넣느라 숨도 쉴 수 없었던 6년이

알고 보면 거절을 위한 유예의 시간이었다고.

친구, 라는 말로 이미 그녀와 나의 관계는

단숨에 정의 내려진 거라고.

 

그러나 무의식이 말한다.

열아홉 살의 어느 날 밤, 그녀의 입술은 왜 그리 달콤했었는지,

왜 그녀는 그 날 거절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어색해지는 것이 두려웠는지.

어쩌면, 이라는 말로 자꾸만 눌러두었던 기대를

수면 위로 드려내려 한다.

 

그리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나는 너에게 묻는다.

 

지금은?”

이 말은 나의 고백이자, 선전포고다.

 

이 말의 함의는

"내가 지금 키스하면 어떨 것 같아?“

이므로...

나는 너에게로 달려간다.

그 날처럼 나는 또다시 너의 입술로 달려간다.

 

 

1

 

 

이미 돌은 던져졌다. 완전히 판을 깨고 나올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상대를 하고 집을 지킬 것인지는 이제 나 자신에게 달렸다. 그리고 이 판의 규칙은 언제나처럼 '정직'이다. 덕선에게 5년 간 매일 전해주고 싶었던 그 귀걸이를 전한 후, 택은 생각했다. 이제 제대로 수를 놓아야 할 때라고. 바둑은 정면 돌파다. 뒤에서 꿍꿍이를 낼 수도, 사기를 칠 수도 없다. 보이는 그대로, 또 상대가 보여주는 그대로 내가 나아가야 하듯이, 나 역시 그러해야 한다.

 

새벽 같이 일어난 택의 앞에 아버지와 아주머니가 싱글벙글하며 앉아계셨다. 오늘 밤 일본 출국하기 전 기원에 가는 것으로 알고 계셨지만, 정환이를 만나러 사천에 내려간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오늘 밤 일본으로 출국한 후, 일본에서 하루 더 머물다가 바로 중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친구를 만나러 그것도 사천까지 내려간다고 하면, 분명 걱정을 넘어 이상하게 생각하실 게 틀림없었다. 아직까지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그 어떤 말도 제대로 해드릴 수가 없었다.

 

이틀 전 모임에 나가지 못했고, 어제 아침에는 정환이 일찍 내려가고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얼굴을 못 보는 친구의 얼굴도 보고, 그리고 그 친구 앞에서 제대로 수를 던지기 위해 그곳에 가려 한다. 3비행단 정문에서 택을 발견한 정환은 그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택도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바로 친구의 마음일 테니.... 이렇게 오랜 세월 만나온 친구를 먼 곳에서 다시 보는 그 즐거움은 말로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정환과 택은 연적이 아니냐고. 그러나 택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가슴 아팠던 것도 사실이고, 터져 나올 것 같은 마음을 침묵해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정환이 미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선우가, 동룡이가 미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정환의 마음이 아팠다. 그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으므로, 정환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했다.

 

우리는 어쩌면 둘 다 최고의 수를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정환은 피앙세 반지로, 나는 수련을 닮은 귀걸이로, 우리는 둘 다 최선의 수를 두었다.

 

"정환아."

 

웃고 있는 그 아이를 향해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밀려오는 긴장감을 죽이려, 택은 물을 들이켰다.

 

"너한테 할 말 있어서...."

 

이윽고 택은 결심한 듯 정환의 눈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나한테 지갑 열어 봤냐고 물어봤잖아.

나 사실 그 때....."

 

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환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유, 이 븅신아, 언제적 얘기를 하고 있냐? ?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얼른 덕선이 잡아.

어유 븅신, 답답해가지고..."

 

정환은 지금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냐며 퉁치듯이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덕선이를 잡으라고. 그 말을 하는 너의 마음이 어떨지 알 것만 같아서, 그러면서도 택에게 덕선이를 잡으라고 말해주는 정환이 고마워서 택은 자꾸만 울컥대고 있었다.

 

", 그 얘기 하러 온 거 아닌데, 누가 그거 때문에 왔대?"

 

"그래? 아님 말구. 밥이나 먹자."

 

정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밥을 권했다. 택은 그러나 목울대가 자꾸만 칼칼해졌다. 정환이 지금 무슨 대답을 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택이 덕선과 잘 된다고 해도, 정환 자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겠다는, 우리는 여전히 친구이며, 평생 그러한 친구로 함께 할 관계라는 것을 말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정환도 왜 택이 사천까지 내려왔는지, 왜 자신을 보러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사랑하는 여자가 걸려 있다고 해도, 그 앞서 있는 우리이므로, 우리의 세월이므로, 그것은 바로 시간이 쌓아올린 '친구' 두 글자이므로.

 

점심을 먹은 후,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정환이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택은 전하지 못했던 말을, 겨우 끄집어내었다.

 

"정환아. 우리 벌써 오 년, 아니 이제 만 6년이 다 되어가."

 

"?"

 

툭 던진 택의 말에 정환은 당황하고 있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자. 너도, 나도.

그냥 한 수 한 수 최선을 다해 놓다 보면,

너도, 나도, 그리고....덕선이도, 우리 모두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


정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떤 상황이 된다고 해도, 우린 친..잖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이 말을 하러 온 거야. 너 내려가는 것도 못 봤고......"

 

그 말에 긴장하고 있던 정환이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 최택!"

 

택이의 진심 앞에서 정환이 툭하고 던졌다.

 

"?"

 

", 그 날 알고 있었지? 너 본 거지?"

 

택은 놀란 듯 눈빛이 흔들렸다.

 

", 그 날 자리 비켜 준 거 알아, 인마."

 

"어떻게...알았어?"

 

"됐어. 인마.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그리고 난 내 열여덟 살을 위해서 말한 거야. 그래야 후회 없으니까.

지금은, 끝이다. 이미.

이제 좀 달려, 최택."

 

"?"

 

", 븅신같이 다른 놈한테 뺏기면 나한테 죽는다. 알겠냐?"

 

그 말에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최택. 니가 나쁜 놈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

 

"인마. 니가.... ...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맨날 대국한다고 찌들지 말고, ? 새끼야."


많은 크기의, 많은 색깔의 사랑이 있다. 택이에게 덕선이 사랑이었듯이, 정환이도 사랑이었다. 빛깔이 다른.... 그러나 꼭 지키고 싶은.... 그것은 정환도 마찬가지였다.

 

삶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문제다. 그러니 택에게는 덕선이를 지켜야 하듯이, 정환을 지켜야 했다. 삶은 함께 걸어가는 길이므로.... 또한 삶은 함께 살아가는 일이므로....

 

 

2

 

 

택이가 일본으로 대국을 떠난 다음 날 덕선은 자현과 함께 6년만에 미옥을 만났다. 브라질 떡볶이에 모여서 울며, 웃으며, 그렇게 수다를 떨어댔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미옥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럽기도 했다. 저렇게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도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싶어서 부럽기도 하고, 또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다 그 연애의 화살은 덕선에게 다시 던져졌다.

 

"덕선이, 넌 연애 안 해?

자현이 말로는 남자들이 주변에 들들 끓는다며?"

 

미옥의 말에 덕선이 손사래를 쳤지만, 자현이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 말도 마라. 풍요 속에 빈곤이야.

남자들이 난리도 아닌데, 지는 사랑이 안 온다고 운다, .

정말 복에 겨워 발광이야. 솔로 염장 지르는 년!"

 

"뭔 소리야? 남자들이 많은데 넌 좋아하는 사람 없다는 거야?"

 

의아하게 바라보는 미옥을 바라보며 덕선이 빙긋이 웃었다.

 

"아니....."

 

"?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거야? 지금?"

 

고개를 끄덕이는 덕선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렇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덕선처럼.

 

"웬열, 성덕선. 너 이제 진짜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그럼 그 때 징징 울던 게 그 사람 때문인 거냐? ?"

 

자현은 뭔가 배신감을 느끼는 듯 덕선을 다그쳤다.

 

"미안. 근데 이제 진짜 안 감추려고.

나 이제 선택하려고. 내가."

 

"? 뭔 말이야, 그게?"

 

"이제 선택해달라고 하지 않고 내가 내 사랑을 선택할 거야.

내가 직접, 내 스스로."

 

"오올...뭔진 모르겠지만, 뭔가 멋지다. 덕선아. 6년만에 만났는데, 너 좀, 괜찮은데?"

 

어쩌면 5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그저 감추기만 했었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해 본 적도, 내 스스로 납득할 만큼 드러내 본 적도 없는 듯했다. 어쩌면 얼마 전 택이 준 선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조금은 한 걸음 내딛어야겠다는, 그런 용기를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 저거 봤냐?"

 

자현의 말에 모두들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모델이 나와서 쥬얼리 광고를 하고 있었다. 덕선은 어, 싶었다. 자신이 받은 바로 그 라인인 듯했다. 모델은 바로 덕선이 받았던 귀걸이와 그것과 같은 라인에서 나온 듯한 목걸이 세트를 하고 있었다. 보석에는 관심도 없었고, 시간도 없어서 그쪽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적어도 택이가 선물해 준 브랜드는 간간히 광고를 통해 보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보석이려니 했었다.

 

", 저거 이번에 나온 건데 정말 비싸."

 

미옥은 뭔가 아는 눈치였다.

 

"니가 어떻게 알아? 너 한국 온 지도 얼마 안 됐잖아."

 

"그게 우리 사촌 언니 이번에 결혼한다고 예물하는 데 따라갔다가 기절할 뻔 했어."

 

"...렇게 비싸?"

 

덕선은 혹시 들킬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게 저렇게 보여도, 다 다이아몬드야."

 

"!! ....?"

 

덕선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아몬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저 한 알에 천 원이면 붙일 수 있는 큐빅이려니 했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라니, 다이아몬드라니, 정말 심장이 벌렁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보석함 안에 무슨 보증서라며 뭐라고 뭐라고 적혀있었던 생각이 났다. 무슨 말인지 몰라 그냥 그대로 접어서 넣어두었지만, 설마 그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깜짝이야! 너 왜 그렇게 놀라?"

 

"..아니야. 근데 얼마나 한다는 거야?

지가 귀걸인데 그래봤자, 요즘 금값도 싼데 비싸봐야 일이십만 원 정도 하는 거 아니야?"

 

", 성덕선, , 일이십만 원? ....넌 어떻게 된 게, 나보다 모르냐?

우리 언니가 저거 골랐다가 식겁하고 포기했잖아."

 

"? 정말 비싼 거야?"

 

"그래. 저 목걸이만 160만 원이 넘어."

 

"뭐어? 뭔 목걸이가 그렇게 비싸?"

 

"다이아몬드라니까."

 

"그래도 귀걸이는 더 싸겠지? 그렇지?"

 

"웃기시네. 진짜 얘는 뭘 모르네. , 귀걸이가 더 비싸. 저거 반짝거리는 거 전~~부 다이아몬드야.

얼만 줄 아냐? 이뻐서 나도 사고 싶어서 물어봤다가 내가 저건 가격까지 외웠잖아.

172만 원이랜다. 가격 듣고 나, 기절할 뻔했어."


"..!!!!! 172만 워언?!!"

 

덕선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앉아. 챙피하게 왜 그래?"

 

곁에 앉아 있던 자현이 덕선을 끌어당겨서 겨우 앉기는 했지만, 덕선의 심장은 쿵닥쿵닥거리며 터질 듯이 뛰어대었다.

 

미쳤다. 미쳤어. 최택!!! !! 미쳤지...아우씨.....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아줌마에게 얼음물을 시켜서는 원샷으로 들이켰다. 자현과 미옥은 그저 황당하다는 듯 그런 덕선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그렇게 충격적이냐? ...혹시...?"

 

".....그게....."

 

미옥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려 하자. 덕선은 황급히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 아는 사람이, , 그러니까 우리 팀 언니가...저걸...저걸 받았거든."

 

"오올~~~!! 남친한테?"

 

순간 덕선은 고민했다. 아니 애들한테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 ...아니. 그냥 아는 사람이래. 아는 사람. 아니, 친구래. 오래된 친구."

 

"뭐야? 친구가 재벌이야? 웬열~! 그렇게 재벌이 친구면 진짜 좋기는 하겠다."

 

"있지. 만약에 저거 선물준 거면, 뭘까, 그냥 우정?

돈이 너무 많아서 저 정도는 껌값이라서 옛다, 선물, 이렇게 주는 건가?"

 

그 말에 미옥도 자현도 거품을 물고 덤벼들었다.

 

"미쳤냐? 아무리 재벌이라도 저거 선물로 준 거면, 그건, 그냥 고백이지."

 

"성덕선, 넌 아직도 세상을 모르냐?

돈이 넘쳐나도, 영양가 없이 돈은 안 쓰는 게 돈 있는 놈들이야.

그것들이 더 독해요.

여튼 고백이든, 꼬시는 거든, 어쨌든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고백...마음.....

 

아이들의 말은 자꾸만 덕선의 가슴 안으로 내려앉아 봄바람처럼 흔들어대고 있었다.

 

3

 

그렇게 한 주가 지나가고, 월요일 새벽이 되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덕선은 조용히 흰죽을 끓였다. 비행을 나가기 전, 흰죽을 말갛게 끓여 보온도시락에 넣었다. 별 거 아닌 일인데, 덕선의 입가로 자꾸만 미소가 번졌다. 택이가 중국에서는 아무 것도 못 먹는다는 걸 알기에 더 그런 듯했다. 이럴 때 보면, 유 과장님에게 탑 언니를 소개시켜 준 건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싶다. 이번 주 중국 스케줄이 있다는 걸 안 순간, 탑 언니가 조정하겠거니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탑 언니는 대국이 있는 호텔까지 맞춰 두었다. 대국 일정 때문에 기원 사람들이 한 시간 일찍 들어가는 것 말고는 그 이후 일정에서는 겹칠 수도 있었다.

 

죽을 쑤면서 덕선은 토요일을 떠올렸다. 사실 택이는 굳이 토요일에 다시 한국을 들어오지 않아도 됐었다. 택이의 스케줄은 정말 살인적이었다. 수요일 밤에 일본으로 가서 목요일은 일본에서 대국을 치르고 금요일에 중국으로 이동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택이는 월요일에 다시 중국에서 대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요일 대국을 치른 후,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사실 금, 토에 중국에서 대국을 치르고 화요일 대국까지 중국에서 계속 있는 것이 컨디션에 더 나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택은 웬일인지 토요일에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토요일, 오후 늦게 비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덕선에게 삐삐가 왔다. "1" . 또다시 봐도 설레기만 했었다. 택이는 자신도 막 도착했다며, 자신의 집에서 한 잔 하자고 했었다. 택의 목소리는 뭔가 주저하는 듯, 떨리는 듯했다. 그게 뭐가 그리도 설렜는지, 덕선은 그저 응응, 거리며 택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동룡과 술을 마시다, 선우의 충격적인 고백을 듣고, 매 타작까지 끝냈지만, 그래도 그 충격보다도 그 날 그 시간이 좋았다. 택이의 방에서 그렇게 같이 모여 있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마치 88년 어느 날로 돌아간 듯한 상황 때문이었다. 택이는 마치 그 열여덟의 날들처럼 덕선을 향해서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젠 피하지도, 차갑지도, 그렇게 공허하지도 않았다. 뭔가 슬픈 듯 날이 서 있던, 아니 공허한 듯 비어있던 그 눈동자가 따뜻하게 변해 있었다. 그 까만 눈동자는 오로지 덕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 검은 빛 속에 자신이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좋기만 했다. 지금 이 순간도 택의 그 검은, 그 깊은 눈동자만 떠올리면,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정말 병이지 싶었다.

 

그 날 하루, 그렇게 덕선의 심장은 그렇게 뛰어댔다. 중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북경 호텔에 도착해서도, 이 부장님 편으로 흰죽을 건네면서도 그렇게 가슴이 떨리기만 했다.

 

"흰죽이에요. 그냥 막 대충 만들었어요."

 

"...이걸 한국에서 들고 왔어?"

 

"어차피 중국 가까운데요, ."

 

"대단하다 대단해. 친구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허허.

, 근데 직접 주지 그래? 내가 전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할 텐데..."

 

"내일 중요한 대국이라면서요? 저보고 설레서 대국 망치면 어떡해요?

그냥 이 부장님이 전해주세요."

 

"그래, 그럴 수 있어.

최 사범이 덕선 양 진짜 좋아해.

괜히 대회 전에 덕선 양 얼굴 보였다가 심숭생숭해져서 안 돼.

이거, 내가 전해줄게."

 

". 저 농담인데요."

 

그래 그 말을 하기까지 덕선은 정말 장난이었다. 사실 택이를 보는 것이 조금은 떨리기도 했다. 그리고 왠지 대국 전에 살얼음을 걷고 있을 택이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어차피 이 부장님도 덕선의 말에 장단을 맞추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 난 진담인데."

 

이 부장님에게 농담처럼 건넨 말에 이 부장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진담이라 하시던 이 부장님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덕선은 자신이 전해준 보온병을 들고 부장님이 멀어지시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최 사범이 덕선 양 진짜 좋아해."

 

그 말이 가슴에 남아서 자꾸만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진짜가 아니겠지만, 아닌 걸 알지만, 그저 소꿉친구로 좋아한다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말 그대로, 착각하고 싶었다.

 

4

 

 

다음 날인 1025일 춘란배 결승 3번기 제1국이 시작되었다. 1국을 한 후, 내일 하루 쉬고, 그 다음 날 2국을 진행한다고 했다. 이 부장님 말씀으로는 1국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택이는 꽤 호전하고 있는 듯했다. 형세가 아주 좋다는 말씀에, 대국도 일찍 끝날 것 같다는 말씀에 덕선은 그저 다행이다 싶었다. 죽은 그래도 먹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저렇게 오랫동안 버티며 앉아 있는다는 것이 보통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아닐 텐데, 힘든 건 아닌지, 머리가 아픈 건 아닌지 자꾸만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덕선은 택이의 대국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시절이 좋아져서 이제 관찰실에서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래도 한 수 한 수 피가 마를 택이의 모습을 볼 담력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저 택이의 대국이 끝나면, 자신의 방으로 연락해달라는 부탁만 드리고, 방 안에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부장님, 끝났어요? 택이 나왔어요? 이겼어요?"

 

"나야... 택이..."

 

급하게 묻는 물음 뒤로 느릿느릿 대답하는 목소리는 택이였다. 수화기 너머로 마치 택이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덕선은 자신이 너무 급하게 들이댔나 싶어 살짝 뻘줌해지기도 했다.


", ...택아. 고생했어."

 

"푸훗"

 

이번에는 아예 택이가 대놓고 웃고 있었다. 덕선은 무엇 때문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그저 택이가 웃고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 괜찮아?"

 

", 괜찮아. 끝나고 지금 방이야."

 

괜찮다고 말하는 택이의 목소리는 괜찮지 않았다. 지치고 허스키하게 갈라져 있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속상한 마음에 걱정되는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머리 안 아퍼?"

 

"..조금... 약 먹었어."

 

", 먹고 먹지. 얼른 자. 뭐 하러 전화 했어?"

 

"배고픈데... , 배고파. 덕선아. 같이 밥 먹자."

 

뭐가 그리도 좋았을까. 덕선은 자신의 입술로 터져 나온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래 로비에서 봐."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덕선은 가져온 캐리어를 헤집으며, 그래도 가장 예쁘다 싶은 옷을 꺼내 입었다. 몇 번이나 대보다가 늦을까 싶어서 옷가지들은 엉망진창으로 흩뿌려둔 채, 급하게 내려갔다. 다행히 택이는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마침 그 때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 사이로 흰 색 니트를 입은 택이가 덕선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덕선을 웃게 했다. 자신의 머리를 귀여운 듯 쓰다듬는 택이의 따뜻하고 큰 손이 좋았다. 설렜다. 마치 둘이 연애하는 것처럼,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해도, 아니 어쩌면 택이도 조금은 자신을 여자로 보는 게 아닐까 하는 그 설렘을 가진 채, 택이와 나란히 돌아섰다.


", 최 사범님. 나오셨네."

 

"덕선아? 우리도 지금 저녁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가자."

 

로비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나한테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길 리가 없지. 허탈한 마음으로 어설프게 웃어주고 택이를 보는데, 택이의 표정이 참 미묘했다. 그들을 따라 걸어들어가며 택이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성덕선, 정말 미쳤나 보다. 이젠 한숨소리에도 이렇게 설레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가 찰 일이었다.

 

사실은 택이를 만나, 귀걸이를 물어보고 싶었다. 왜 선물했는지, 왜 그렇게 비싼 걸 자신에게 준 건지, 정말 돈이 남아도는 건지... 그러나 차라리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묻고 싶은 마음 뒤로, 묻지 말자는 그 마음도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탑 언니를 데려다준다며, 지안 언니가 일어섰을 때, 그 어수선한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 이 부장님은 화장실을 가신다며 잠깐 나가셨다. 앞에는 유 과장님이 술이 덜 깬 채로 졸고 계셨다. 덕선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음식에 젓가락질을 하는 순간, 택이가 덕선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덕선아...."

 

귓가로 택의 음성이 다가와 저 안까지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덕선의 심장으로 내려앉았다.

 

"...?"

 

"고마워."

 

"뭐가?"

 

", 잘 먹었어."

 

덕선의 입가로 미소가 퍼져나갔다.

 

", 먹었어?"

 

덕선이 살짝 돌아보니, 택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부장님이 마치고 나서 얘기하신 것 같았다. 덕선의 입술에서 피어난 미소가 택의 입가로 전해졌다.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미소가 번졌다. 아니 저 가슴 안에서부터 빛이 번지는 것처럼 환해졌다. 덕선은 택이에게, 택이는 덕선에게 그런 환한 빛 같은 존재였다.

 

"뭐야, 두 사람, 무슨 얘기하길래 이렇게 분위기가 좋아?"

 

이 부장님께서 들어오신 줄도 모르고 둘은 그렇게 서로를 향해서 환하게 미소 짓고만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유 과장님을 이 부장님과 택이가 부축해서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 부장님은 5층을 누르시더니, 오늘 덕선도 수고했다며 어서 쉬라며 독촉을 해댔다. 덕선과 택은 그저 황당해 하며 서로를 바라보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덕선은 어쩔 수 없이 5층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는 순간, 택의 눈이 뭔가 안타까워 보였던 것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덕선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5

 

택은 식사를 마치고,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덕선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멍했다. 붙잡고 싶었는데, 붙잡을 수가 없었다. 7층에서 두 분은 내리시고 9층에서 또다시 문이 열렸다. 택은 멍한 상태로 내렸다가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를 다시 붙들어 탔다.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되면서도, 택은 5층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어느 새 정신을 차렸을 때, 택은 503호의 문패를 보며 서 있었다. 토요일 중국에서 돌아와 파란 대문집 앞을 서성였던 그 날처럼 택은 벨을 누를지 말지 수십 번도 더 망설였다. 눌러볼까. 혹시나 탑 언니가 나온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혹시 덕선이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그래도 탑 언니가 잘 수도 있는데, 그럼 덕선이가 듣고 나오지는 않을까.

 

택의 머릿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가 떠다녔다. 혹여 덕선이가 나온다고 해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지금 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면, 덕선이는 뭐라고 말할까. 그저 보고 싶어서, 지금 이 순간 니 얼굴을 보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왔다고 하면, 덕선은 뭐라고 말할까. 미쳤다고 할까, 정신 차리라고 할까. 택은 스스로도 한심하다는 듯,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덕선이 묵고 있는 방 옆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 수, 한 수,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데, 혹여 자신의 마음이 달려가 버릴까 걱정이 되고 만다.


그렇게 한참을 기대어 서 있던 택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오늘 밤, 또 잘 수 없겠구나, 싶어서, 택은 니코틴의 힘을 빌려 보고 싶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 했다. 아니, 진심으로 그러려 했다.

 

담뱃불을 붙이려던 그 순간, 로비창 안으로 그녀가 보였다.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너무 보고 싶어서 이제 헛것이 보이나 싶을 즈음, 덕선도 택을 발견한 듯 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선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이, 그 쌓아두었던 눌러두었던 마음이 먼저 저 앞으로, 그녀에게로 달려 나갔다. 자신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의 앞에 앉아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녀를 향해 걷는 그 순간이 가슴 저리다 못해 심장이 아프기까지 했다.

 

"방에 안 갔어?"

 

덕선의 앞에 앉으며, 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설렌 듯 조금은 들뜬 목소리는 숨길 수가 없었다.

 

".... 문이 잠겼어. 탑 언니 잠들었나 봐."

 

택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너 먼저 들어가. 얼른 가서 자. 난 직원 오면 키 받아서 가면 돼."

 

그 얘기를 듣던 택은 덕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택은 사실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내뱉어도 되는지, 그러나 그녀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내 방에서 자."

 

덕선은 그 말에 황당한 듯 바라보았지만, 택은 단호했다. 내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른 어떤 상황들보다, 덕선이 니가 우선이라고.

 

"내 방에서 자라구."

 

그래서 한 번 더 정확하게, 더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렇게 그녀를 데리고 택은 자신의 방으로 왔다.

 

"방에서 자. 난 여기서 잘게.”


택이가 거실로 나와서는 긴 소파에 이불을 올려놓으며 덕선에게 말했다.

 

"됐어, 내가 소파에서 잘게. , 방에서 자. 제대로 잠도 못 잤으면서....”

 

"너 소파에서 자는데 내가 어떻게 잠이 오냐?"

 

택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 덕선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툭 던졌다. 그 말에 덕선의 얼굴로 설렌 듯한 표정이 지나갔지만, 정작 택은 보지 못했다. 아마 택은 모를 것이다. 지금 그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불편한데 어떻게 자신이 편할 수 있느냐는, 한 남자의 고백처럼 들렸다는 것을, 정녕 택은 모를 것이다.

 

"난 어차피 약 먹으면, 여기나 방이나 똑같애."

 

덕선은 두근대는 마음을 누르며 택이 앉아 있는 긴 소파 옆으로 왔다가 정작 약 봉지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 요새, 이렇게나 많이 먹어?”

 

"이제 내성이 생겨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택이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덕선이 고등학생일 때부터 먹었으니 벌써 6, 7년은 되었을 텐데 내성이 안 생긴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 너 그거 많이 먹으면, 몽유병처럼 밤에 막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대?

너 그렇게 되면 어떡할라 그러냐?”

 

덕선은 자신의 걱정을 조금은 돌려서 말해본다. 조금은 줄였으면 좋겠는데, 택이는 어느 순간 수면제가 없으면 잠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택이가 덕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 아직 거기까진 아냐. , 또 모르지. 너 오늘 방문 꼭 잠그고 자라."

 

무슨 소린가 싶은 순간, 여전히 약봉지를 든 채로, 택이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나 약 먹고 무슨 짓 할지 모른다?"


그 말에, 설렜을까. 덕선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그 말에 조금은 웃겼던 것도 같고, 그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던 것도 같다. 아주 오랫동안 봉인해 두었던 그 기억. 5년 반이나 그저 가슴 안에 침묵시켰던 그 마음이 어느 새 아무렇지 않게, 아니 스스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새어나와 버렸다.

 

"왜 또 키스하려고?”

 

처음 그 말을 뱉었을 때는 덕선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 말이 그대로 덕선의 귀로 되돌아왔을 때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다. 5년 반의 시간이 그대로 돌아왔다. 바로 그 시간, 1989년 그 찬란했던 봄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간, 또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터뜨렸던 시간 그리고 동시에 그 생생했던 꿈의 기억 때문에 5년 반을 지옥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시간.

 

".... 아니었구나."

 

택이 천천히 덕선을 바라보았다.

 

", 거짓말 했어?"

 

택은 물었다. 자신의 꿈을 이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 시간, 이젠 물어야 했다. 현실을 꿈으로 바꾸어야 했던 그 진실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너의 마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내놓았던 남자의 고백을 너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5년 반의 세월이 지나서야 택은 묻고 있었다.

 

"겁이....났어."

 

덕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 한 번 택의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17년의 세월, 17년의 마음이 지금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안다, 택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상황을 최악으로 본다는 것을. 지금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택의 오랜 습관이었다. 실제보다 불리하게 보는 것. 기자들이, 그리고 우진조차 말했던 택의 대국 습관이었다. 주어진 상황을 극단적으로 안 좋은 쪽으로 보는 그 습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택은 최악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눈이 뜨거워진다.


"우리 친구잖아. 어색해지면 어떡해."

 

그 순간 택은 덕선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왼쪽 눈으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친구. 그랬다. 가장 든든하면서도, 가장 폭력적인 단어였다. 택에게는 그랬다.

 

"너랑 어색해지는 건, 상상이 안 되거든."

 

택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택은 약봉지를 내려놓으며,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끝까지 왔다. 니가 말하는 겁이 무엇인지, 어색해지기 싫었다는 말이 무엇인지 택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주저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자꾸만 가슴 저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아 올라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그 또한 할 수 없다. 아니, 택의 습관으로 볼 때, 더 부정적인 쪽으로 보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택은 숨을 죽이며 기다리다가 일어나야 할 때,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순간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택의 마음이, 17년의 세월이 쌓아나간 그의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라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이제 한 발을 내디딜 순간이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덕선의 떨려나오는 목소리였다. 지금 너는 무엇 때문에 겁을 내는 걸까. 무엇이 그토록 너를 떨게 하는 걸까.

 

택은 그 순간 결심한 듯 고개를 돌려 덕선을 바라보았다. 택의 검은 눈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다. 그 눈을 마주하며 덕선의 눈도 파르르 떨려온다.

 

"지금은?"

 

그 말에 덕선은 숨을 멈추었다. 택이는 지금 덕선의 마음을 묻고 있었다. 여전히 어색해지는 것이 두려운지, 겁이 나는지 묻고 있었다. 덕선은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택의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눈을 내리깔며,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그 말을 꺼내기로 했다. 이제 사랑을 피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이제 사랑에게 나를 선택해달라고 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내가, 직접 내 사랑을 선택하리라 그리 외쳤으므로. 지금 이 순간 그 사랑이 자신을 외면한다고 해도, 덕선은 이제 자신의 빗장을 열어 그 마음을 보여주기로 한다.

 

"지금도 어색하겠지."

 

덕선은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떨려오는 마음을 다잡으며, 용기를 내어 택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뗐다. 5년 반의 세월 동안 할 수 없었던 말, 그러나 그토록 매일매일 너의 눈을 보며 하고 싶었던 말, 나는 그 세월 동안 너를, 너라는 존재를 온 마음으로 품어왔다고, 그 말을 하기 위해 그 어려웠던 한 마디를 꺼냈다.

 

"근데......"

 

그리고 덕선은 생각했다. 택의 눈빛이 이토록 깊었던 적이 있었는지, 이토록 남자의 눈을 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 그 검디 검은, 깊고 깊은 심연의 물빛을 띤 남자의 눈빛 앞에서 심장이 떨어져 내리기도 전, 그 찰나의 순간,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그 때 느꼈다. 그 날, 평상에서 우리는 그날도 이렇게 입을 맞추었다는 것을,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날도 너는 내 입술을 이토록 탐했었다는 것을 덕선은 휘몰아쳐오는 택의 입술을 마주하며 그제야 느끼고 있었다.

 

 

6

 

 

"지금은....?"

 

택은 이제 자신의 다음 수를 던졌다. 사실 택은 이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지금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신도 모르게 지금이라고 말하는 그 17년의 마음을 믿기로 했다.

 

사실 택에게는 꿈이 아니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택의 입장에서는 덕선이가 이미 택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분명 꿈속에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감출 수 없는 마음을 그대로 키스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약을 빌미로 택은 꿈이니까, 꿈이라서 그렇게 덕선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택의 입술이 다가가도 꿈이니까 덕선이 거부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이 현실임을 안 순간, 그리고 덕선이 그것을 감추었다는 것을 안 순간, 택의 뇌리로 스친 것은 하나였다. 친구. 어색해지는 것이 겁이 났다는 말. 택에게는 그랬다. 이미 89년의 키스로 택은 고백을 한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고백을 덕선이 전해 들었고, 덕선은 그 고백을 덮었다. 우정 때문에, 우정을 지키고 싶어서 제대로 고백도 못했는데, 택은 자신도 모르게,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19, 그 날에 고백을 했고, 덕선은 그것을 감추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게 89년에 고백한 마음에 대해서 5년 반이 지난 지금 이 순간, 그 마음에 대한 거절을 들은 것이라 택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처음엔 그렇다고 생각했다. 거절당한 것이라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어색해지기 싫다는 이유로 덕선이 거절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택의 오랜 습관 때문이기도 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것. 상황을 극단적으로 더 나쁜 쪽으로 보는 것. 이미 고백은 끝났고, 뒤늦은 거절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러면 왜 그날 덕선은 거부하지 않은 것일까, 싶었다. 왜 덕선은 두렵다고, 겁이 났다고 표현했을까. 왜 지금 그녀는 저토록 떨고 있을까. 자신이 아는 덕선이라면, 정말 아니라면, 미쳤냐며 화부터 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는데, 덕선은 수줍었다. 저 아래에서부터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심장을 울려대고 있었다. 어쩌면...정말 어쩌면...... 그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어쩌면'의 기대감이 심장을 아프도록 뛰어대게 했다.

 

택의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지난 과거를 닦아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결심한 듯 그의 얼굴은 덕선을 향했고, 눈빛은 이미 남자가 되었다. 19살 여린 소년이 아니라, 24살 이제 제대로 남자가 되려 한다.


터질 듯이 울려대는 심장의 소리에 답하기 위해, 정말 그 기대가 맞는지 알기 위해, 그리고 만 17년을 이어온 자신의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택은 과거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대답을 물어보고자 한다.


"지금은?”

 

그래서 그 물음을 던졌다. 사실 그것은 질문이기도 했지만, 통보이기도 했다. 너의 마음이 어떻냐는 물음이기도 했지만, 이 한 마디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구차하게 내가 이렇게 널 좋아했노라고, 너를 잊고자 1년에 111국이라는 엄청난 대전을 치러왔노라고, 미친 듯이 사랑했노라고, 아니 니가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난 이미 빈 껍데기였다고. 그런 구질구질한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 그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그저 구질구질한 감정 놀음일 뿐이므로, 택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택은 다른 말로 물었다.

 

지금은?”

 

이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택의 고백이었다. 내 마음은 그 때도, 지금도 같다, 라는. 그 때도, 지금도 나는 한결 같이 너를 사랑한다고, 아니 도리어 더 깊어졌다고.


19, 그 날 나도 모르게 했던 입술이 먼저 다가갔던 그 고백처럼, 24, 오늘, 지금도 같다라는, 그 고백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택은 그렇게 전했다. 나는 여전히 널 사랑한다고, 그래서 지금, 내가 그때처럼 또 너에게 다가갈 거라고, 그러니 니가 싫다면, 나를 차라고, 내 뺨을 때리라고, 그렇게 정신차리겠다고...... 그렇게 택은 자신의 17년이 사랑을 고백하며, 또한 자신은 지금 이 순간 너에게 그때처럼 다가갈 거라고 먼저 알려준 것이었다.

 

그러나 택 스스로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 이토록 용기를 내게 했는지, 지금 이 순간 너에게 그날처럼 다가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지. 단 하나, 지금 터질듯이 가슴을 뛰게 하는 그 기대감이 택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러나 남자는 그 물음의 진중함 때문에 침을 삼키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에게는 1초가 영겁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어색하겠지.”

 

덕선은 결심했다는 듯이 숨을 들이마시며, 무언가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들고 택을 마주했다.


"근데......!”

 

택 스스로도 이 말을 제대로 해석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 순간이었다. 기대감이 심장을 밀어내고, 이제 마음을 그녀 앞에 쏟아내 버리는 것을, 그는 현현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현실'이 되는 그 순간을, 머리가 인지하기도 전에, 심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지금은.....?”

 

이 말의 함의는, "내가 지금 키스하면 어떨 것 같아?"이므로....... 택은 그렇게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택은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고백하자고. 그 어린 날, 이미 고백이 던져졌으니, 제대로 고백하고, 제대로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든 드러내자고. 직진하든, 유턴을 하든, 평생 이 한 여자만 품고 살든, 적어도 돌아보았을 때, 그 때 고백은 했노라고, 사랑한다, 너 때문에 죽을 것 같다, 그 사랑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런 고백은 했노라고, 그러니 내 평생을 바쳐 그토록 미치도록 사랑했으니 후회는 없노라고, 먼 훗날 그렇게 미소라도 지을 수 있도록, 택은 그녀에게로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은 황홀하도록 응답했다.


택의 입술은 거침이 없었다. 덕선이 그 숨을 쫓아가지 못할 만큼, 택은 뜨거웠고, 급했고, 강했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다 따라가지 못해서 헐떡이면서도 덕선은 그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자신이 더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부드럽고 뜨겁고 촉촉한 그의 입술은 자꾸만 그녀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의 힘에 자꾸만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덕선이 자꾸만 밀려나자 애가 타는 택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 더 뜨겁게 안으로 다가왔다.

 

덕선은 숨이 막혀왔다.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아니 자꾸만 밀려오는 그의 강한 힘에, 그 부드러운 입술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숨을 쉬기 위해 택에게서 벗어나며 작게 입을 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말랑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그녀의 입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지금까지의 감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거침없이 들어오는 그의 혀가, 그가 만들어 내는 감각이 온 몸을 떨리게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흘러 다니고, 심장이 저릿해왔다.

 

덕선은 스스로도 제어가 안 되는 그 감각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피하는 그녀를 따라 자꾸만 얽혀 들어와 온 몸의 감각을 들뜨게 만들었다. 살아가면서, 이런 감각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너무나 저릿해서, 너무나 간질거려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잡고, 더 깊이 그녀의 입술 안으로 들어와 얽혀 들었다. 마치 절대로 도망갈 수 없다는 듯이,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설레며 심장이 터질 듯 어쩌지 못하는 한 남자의 사랑이 자기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어서 자꾸만 그녀에게로, 그녀의 안으로 들어와 감각을 깨워놓았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온 몸으로 받는 그 여자도 그 미칠 듯한 사랑 앞에서 숨이 막히도록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터질 대로 터져버린 사랑이 제 스스로 길을 내어가며 마음이 서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서로의 입술을 놓을 수 없는 두 연인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그 방 가득 울려퍼질 뿐이었다.

 

 

 

 

 

 

 

<응/팔/갤/줍, 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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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걸 쓰기 위해서 2월 12일 그렇게 <9.어.면>을 시작했는데, 정말 이날이 오는구나. 혼자 감격중이다.

 

* 호텔키스씬을 내가 우습게 봤다. 이렇게 길지 몰랐다. 아니, 내가 이렇게 길게 쓰고 싶어하는지 나도 몰랐다.
이번 회가 아니라 다음 회에 완결이 될 듯. 마무리하고 싶었는데....어찌 이리도 수다스러운지.ㅜㅠ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택의 이성과, 택의 감정이 혹은 택의 의식과 택의 무의식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그것을 쓰고 싶었다. 머리로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무의식은 이미 덕선의 답을 알아들었다고 말이다.

그걸 쓰고 싶었으나, 비루해서 그것을 다 표현치 못하는 것이 한이다. ㅠㅠ


* 그리고 친구는 나는 꼭 내 손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최택을 바둑, 사랑, 우정을 빼놓고 말할 수 없으므로.
작감이 태초에 만든 그 캐릭터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이 역시 어쩌면 나의 리뷰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회에는 마지막 회 올리면서 선택 리뷰(리뷰라 적고 잡담이라 읽기로 한다)도 올려볼까 한다.


* 지루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진짜.  그리고 이 길을 혼자 걷지 않게,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