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19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1016357
*스아아아압 주의(최고 기록 갱신, A4 49장임ㅠ), 솔직히 분량 폭격 때문에 디시가 받아줄지도 의문.
*결국 안 돼서 에필로그로 나눔. 에필로그 뒤에 바로 올라옴(재업함, 처음 것은 삭제)
* ㅋㅅ 폭격 주의
*배경음악 : 이/적/ 걱/정/말/아/요/그/대/
https://www.youtube.com/watch?v=Dic27EnDDls
<갤줍, 감솨감솨>
[텍본 재업로드]
제19장 ‘사랑한다’라는 말의 능력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의 차이를
스물다섯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의 힘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말을 하는 이도, 그 말을 듣는 이도,
가슴 저 안으로 그 뭉클함이 번져 갔다.
말이 힘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일으키는지,
어떻게 사람을 살려내는지
지금 이곳에서 택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은, 단 한 마디로
온 세상을 다 가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나의 사랑은
이토록 나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사랑한다’라는 말의 여운을
그 말의 힘을,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그 말이 심장을 두드려대며 미치도록 뛰어대게 하는 그 능력을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택은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1
17년 간 누르고 눌렀던 마음이 터져버렸다. 머리는 분명, 더 이상은 안 된다고, 그만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경고를 하고 있었지만, 택의 입술은 그저 밀어붙이고 있었다. 혹여나 이 입술을 놓칠까, 이 머리끝까지 저릿한 감각을 잃을까, 조바심을 내며 더욱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리 입을 맞추어도, 가슴의 갈증은 전혀 해갈되지 못한 채, 자꾸만 더 타오르기만 했다. 19살의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5년 반의 시간 동안 그 소녀의 입술을 훔친 죄로, 지옥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소년은 이제 남자가 되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로 더 깊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따뜻한 입술은 왜 이렇게 부드러운지, 왜 이렇게 촉촉한지, 그리고 왜 이렇게 저릿하게 하는지. 택은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19살의 키스는 그저 풋풋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평상에서의 키스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택이 혼자 그 부드러움을 놓지 못해서 그토록 달려들었을 뿐, 오늘, 지금 이 순간 함께 나누는 입술이, 얽혀 드는 혀가 어떤 느낌인지는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택을 미치게 만들었다. 언제나 이성적이었던, 언제나 심사숙고하며 움직였던 바로 그 최택 9단을 오로지 감정만이 불타오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모자랐다. 아무리 그녀의 입술을 가져도, 아무리 그녀의 혀와 얽혀들어도, 마음은 모자라기만 했다. 너무 부드러워서, 너무 저릿해서, 온 몸의 피가 솟구치는 듯해서, 그래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이 터져버리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택 자신도 스스로가 무서울 만큼 그의 사랑에게로 다가가고 또 다가갔다.
그녀의 입술 안을 침범하며, 택은 그저 애달프기만 했다. 두려운 듯 피하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다가가 자꾸만 얽혀들었다. 천천히, 그러나 뜨겁게 그녀의 혀를 쓸었다.
하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헐떡임이 새어나왔지만, 택은 멈출 수가 없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이 명령하고 있었다. 아니 그 심장이 먼저 다가가 있었다. 사랑한다고, 너무나 사랑한다고, 아니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지금 이 순간, 온 마음으로, 자신의 심장을 내어 놓고, 택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하아...하아....태..택아....."
더이상 숨을 참지 못한 덕선이 택을 밀어내자, 택은 겨우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택은 눈을 감고 덕선의 어깨를 잡은 채로 그녀의 이마에 기대어 왔다. 그 날처럼, 콘서트 복도에서처럼 택의 숨결이 덕선의 코를 간지럽혔다. 덕선은 눈을 감았다. 자꾸만 심장이 간질거렸다. 한참을 두 사람은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키스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떨리는 심장을 겨우 누르며, 덕선이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서 택의 검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덕선의 심장이 쿵하고 떨어져 내렸다. 모르겠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죽기보다도 더 떨렸다. 아니 쪽팔렸다. 아까 미친 듯이 반응하던 자신의 모습과, 심지어 야한 신음 소리까지. 아.... 정말 미치겠다.
17년, 불알친구다. 그 친구랑 지금 키스를, 그것도 입술과 입술 정도가 아니라, 혀와 혀까지.... 덕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심지어 얼마 전 평상에서 자신이 먼저 키스한 것까지 모두 다 떠올라 덕선은 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 미치겠다, 정말.
덕선은 머리가 정말 하얗게 변해 갔다.
"덕..선아..."
택이가 낮은 목소리로, 아니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이었다. 덕선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실 의도된 행동이 아니라 그저 무조건 반사였다. 그 바람에 택이 역시 덩달아 덕선의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아..나...이제 가야 돼. 타..탑 언니가 나...그래 찾겠지. 아니, 찾을 거야.
태..택아...나....갈게...."
정신없이 허둥거리던 덕선은 덜덜 떨면서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뱉어내며 문을 향해 한 걸음을 뗐다. 아니 떼려고 했다. 그러나 택은 그런 덕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덕선의 팔을 잡아 당겨 그대로 자신의 가슴으로 안아 왔다.
"아니. 너, 못 가."
택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터질 듯이 뛰어대는, 이러다 고장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을 만큼 그녀의 얼굴로 부딪쳐오는 한 남자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덕선아, 난 아직 아무 말도 못했어.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품어 왔는지, 내 마음을....하아....얼마나 오랫동안 참아왔는지...."
이게 무슨 소린가. 덕선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그게 무슨 소리야?"
덕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택에게 물었다. 택의 눈빛에 고통이 스며들었다. 아직은 아팠다. 자신의 마음이, 17년 동안 침묵해야 했던 그 사랑이, 아직은 심장을 아프게 했다.
사실 택은 두려웠다. 덕선이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아까 서로 입술을 나누었던 기억은 자신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너무 밀어붙여서 그녀는 싫었던 걸까. 택은 겁이 났다. 혹시 화가 난 건지, 자신에게 실망한 건지. 그래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혹 자신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건지, 단지 순간적인 충동으로 다가간 거라 오해하는 건 아닌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넌 가버리는 건 아닐까, 나한테 실망했다고, 돌아서버리는 건 아닐까, 택의 가슴은 자꾸만 타들어갔다. 혹시나 그녀가 도망갈까 싶어서 자신의 품에서 또 빠져나가는 그녀를 잠시라도 붙들어두고 싶어서 택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의 팔을 잡은 손이 어쩔 수 없이 떨리는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미..안해. 덕선아."
이번엔 덕선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택은 입이 말라왔다. 이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택은 이미 17년 간 익히 알고 있었다.
"아, 내 말은....그게 아니라...."
말을 하면 할수록 꼬여갔다. 자신이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왜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지 택은 스스로도 기가 찼다. 그 사이 덕선은 혼란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음을 참아왔다고 했다가, 다시 미안하다고 하니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말이다. 이건 마치 실수를 사과하는 듯한 분위기로 보일지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덕선은 굳어진 표정으로 택에게서 팔을 빼려 했다.
"키스가....미안한 게 아니야."
"뭐?"
"내가 내 감정에 너무 널 몰아붙였을까봐....하아...그게 미안하다는 거야."
여전히 덕선의 눈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오래 묵혀둔 감정이 나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같았다. 말로 표현되는 것들은 정리되지 못하고 자꾸 오해만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택은 미칠 것만 같았다. 터져 나오는 감정들이 자꾸만 아우성치고 있는데, 무엇보다 어떻게 찬찬히 너에게 말해야 할지, 내 감정을, 내 마음을, 내 오랜 시간들을 너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너무나 어렵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널.....잊은 적이 없었어, 난."
"뭐? 그...그럴 리가...없잖아."
덕선의 말에 택은 아까보다 더 당황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니....
"무슨 뜻이야?"
"아니잖아. 택아, 너 다른 사람, 좋아한다고 했잖아."
"너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왜, 다른 사람을 좋아해?"
덕선은 혼란스러운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택은 애가 탔다. 그녀의 마음도 알지 못하는데, 이젠 오해까지 하고 있으니. 말은 하면 할수록 꼬여가고, 그녀는 자꾸만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아까까지 벅찼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쩌면 자신은 착각했던 건 아닌지, 그래서 그녀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던 것이 아닌지.
"아닌데...너....기원에서....그 사람...좋아했잖아?"
택의 눈빛이 화가 난 듯 단단하게 변했다. 택의 두 손이 덕선의 어깨를 똑바로 잡았다.
"덕선아, 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 좋아한 적 없어.
난 처음부터 너였어. 너 외에는 없었어."
"....니가....고백한다고 했었잖아....좋아하는 사람 있다고...고백할 거라고....."
"그래. 그 사람이 덕선이, 너라고.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그 사람이 바로 너야."
그 순간이었다. 덕선의 다리가 풀려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을 듯한 덕선을 택이가 자신의 팔로 끌어안았다.
"나...좀....앉아야겠어."
덕선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소파 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택은 그녀를 부축해서 긴 소파 쪽에 앉히고, 자신도 곁에 앉았다. 덕선은 그저 앞을 멍하니 바라본 채 앉아 있었다. 택은 마치 벌서는 듯이 덕선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 나쁜 것일까, 자신이 지금 잘못한 건 아닐까, 덕선의 마음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마음만 앞세워 그렇게 매달렸던 건 아닐까, 그래서 덕선이 화가 난 건 아닐까. 택의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들이 떠다니며 불안하게 했다. 처음 입을 맞출 때의 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점점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 결론이 나기 시작하면서 택의 입술은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덕선아....미안해. 내가...내 마음이 너무 커서....너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 착각했었나봐.
너는 아닌데, 너도 내 마음처럼 그렇기를 바랐나봐. 미안해...정말.....
널 함부로 생각해서 그런 건 정말 아니야. 그건 정말 맹세코 아니야."
택은 자책하는 듯, 물기어린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그제야 덕선은 정신을 차리고 곁에 앉은 택을 돌아보았다. 택의 눈이 아파 보였다. 왜 그러는 거지 싶은 순간, 덕선은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그것도 택이 자신을 향해 고백하고 있음에도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덕...선아....."
덕선의 이름을 부르는 택의 목소리는 안타깝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흔들리고 있었다. 이 바보 같은 최택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덕선은 자신의 팔목을 아직도 잡고 있는 택의 손을 바라보았다.
왜 나는 이 손을 보지 못했을까. 언제나 니 손은 이렇게 나를 잡고 있었는데. 바보 같이 난 왜 하나도 알지 못했을까. 너의 이 검은 눈이 언제나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하던 그 눈빛에 온전히 내가 담겨 있었는데, 왜 나는 알지 못했을까. 왜 나는 너의 그 다정한 목소리를, 나를 향한 수많은 너의 외침들을 하나도 알지 못했을까. 언제나 내 곁에 있던 너를, 언제나 내 등 뒤에 있던 너를, 힘겨울 때마다 변함없이 내 곁에 와서 나를 잡아주던, 나를 안아주던 너를 왜 나는 그 오랜 세월 알지 못했을까. 너의 미소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었는데, 다른 이를 향한 미소를 본 적이 없으면서, 난 왜 나만을 위한 너의 환한 미소를 알지 못했을까. 지금 이토록 정확하게 보이는데,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데, 너는 언제나 그렇게 정직한 눈으로 나만을 담고 있었는데, 나는 도대체 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덕선은 여전히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택의 손을 잡았다. 택의 떨림이 그 손을 타고 덕선에게로 흘렀다. 아니 덕선의 손도 떨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택아...."
덕선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택의 눈이 긴장한 듯 파르르 떨린다.
"난....니가.....좋아. 택아."
택의 목울대가 울렁인다.
"나, 정말 니가 좋아.
니가 다른 사람 좋아하는 줄 알고....하아...내가...너 잊으려고...별 짓 다해 봤어.
미친 듯이 남자도 만나보고 했는데....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
어느 새 덕선의 눈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너를 잊고자 했던 그 세월이, 그 시간이 자꾸만 울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잊으려고 해도 안 됐어.
내가...널.....너무 좋아하더라."
"덕...덕...선아...."
덕선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덕선은 멈추지 않았다.
"택아, 난 니가 너무 좋아. 그래서...너무 아팠어. 너 때문에.....나....정말 힘들었..."
택은 그 순간 덕선의 손을 잡아 당겨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하아..... 가슴 저 안에서부터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한숨이 그의 모든 마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택은 자신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아팠을지도 모른다. 쿵쿵 울려오는 심장이, 자꾸만 새어나오는 그의 숨소리가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그의 품속에서 듣는 그의 말에 덕선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덕선아....사랑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덕선은 택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로 듣는, 사랑해라는 말은 자신의 5년 반의 시간을, 그 아픈 시간들을 완전히 뒤덮고도 남았다.
택은 덕선을 자신의 품에서 놓아주었다. 아니 덕선은 놓아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택의 부드러운 입술이 덕선의 눈에 와닿았다 떨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다가와 볼에 남아 있는 덕선의 눈물을 훔쳤다. 덕선은 눈을 감았다. 아직 눈썹 끝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어느 새 택의 입술이 가져가버렸다. 눈을 감은 채로,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느꼈다. 마치 남아있는 자신의 슬픔을 다 가져가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팠던 시간들을, 애탔던 시간들을 택의 입술이 모두 가져가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또다시 그의 입술이 그녀의 붉은 입술로 다가왔다.
그의 입술과 그녀의 입술이 마치 태초의 순간처럼 하나로 맞닿았다. 입술 사이로 그가 뜨겁게 밀려 들어왔다. 여전히 두려웠지만, 덕선도 이제 피하지 않았다. 그가 얽혀오는 대로, 그가 쓰다듬는 대로, 그렇게 자신도 그에게로 다가갔다. 미친듯이 전율이 흐르고, 발끝으로 저릿한 감각들이 흘러다니는 그 순간, 택은 또다시 그녀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하아....사랑해, 덕선아."
그의 고백을 들으며, 그의 고백 같은 입술과 뜨거운 혀와 얽혀들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받아내면서도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저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두 연인은 빌고 또 빌었다.
2
헐떡이던 순간이 지나고, 택은 덕선을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놓아주었다. 사실 덕선이 힘겨워하지 않았다면, 어디까지 달렸을지 택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더 이상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어떤 이성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사랑은 내달렸다. 그러나 그 순간, 덕선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 힘겨워한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택의 마음은 멈추었다. 그렇게 내달리던 그 사랑이 그녀 앞에서 폭주하려는 자신을 막아냈다.
하아..하아....
택의 어깨에 기대어 덕선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택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자꾸만 잃어버리려는 이성을 찾아내어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택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이 사랑을 지켜낼 것이라는 것을. 사랑이 달려 나가려는 사랑을 막아내리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자신은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덕..선아....."
"응...?"
덕선은 부끄러운 듯, 여전히 택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그런 덕선을 택은 자신의 팔로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방에 데려다 줄게."
그 말에 덕선은 풋 하고 웃었다. 택이 왜 그러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아까 사실 두려운 순간도 있었다. 아이 같았던 택이가 정말 남자가 되었었다.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자신에게 밀려들어 왔었다. 덜컥 겁이 나려는 순간, 택은 덕선 자신보다도 먼저 덕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 택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내가 먼저였다. 바보 같이 덕선은 이제서야 그걸 깨닫고 있을 뿐이었다.
"니 방에서 자라며?"
놀려보고 싶었다. 택이가 어떻게 반응할지. 여전히 택의 품에 안긴 채로 덕선은 한 마디 더 던졌다.
"난, 너 믿는데?"
덕선의 뭔가 놀리는 듯한 말에, 택이가 순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택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왜 그러나 싶어 덕선이 택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바라보던 순간, 덕선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 친구 택이가 아니라, 남자 최택이 있었다. 온전히 남자인, 자신의 여자를 안고 싶어하는 남자 최택이 덕선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난...못 믿겠어, 나를."
“태..택아...."
택의 눈이 순간 심연처럼 깊어지는 듯했다. 택의 입술이 다시 덕선의 입술로 와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스스로 참고 있는 듯, 아까처럼 깊지는 않았지만, 택은 그녀의 입술을 놓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가자."
덕선의 손을 잡아 일으킬 때, 어쩌면 덕선의 마음도 아쉬웠을지도 모른다. 그의 단호함이 고마우면서도, 아쉬워서 자꾸만 가기가 싫어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지. 덕선은 그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자꾸만 이 순간이 안타깝기만 했다. 1층 로비에서 키를 받아 5층으로 가는 시간이 왜 그리 짧은지, 직원이 좀 늑장을 부려주길, 엘리베이터가 늦게 와주길 덕선은 자신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바람은 반대로 되고 만다. 어느 새 503호 앞에 와 있었다.
인사를 하려다 말고, 덕선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택아...."
"어."
"너 5년 전에...아니 이제 6년 전인가.... 왜...그 때 고백 안 했어?"
택의 눈빛이 깊었다. 망설이던 택이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덕선아. 그 때...하아...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덕선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택이 무엇을 생각했던 건지 그가 무엇을 지키려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조금은 억울하지만, 그래도 그 시간들이 헛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자신이 지금 자신의 앞에서 이토록 검은 눈동자를 한 이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이 남자와 함께 보낼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으니까 괜찮았다.
"택아...알지? 나, 니 선물만 받았어."
"어?"
"난, 택이 니가 주는 선물만 받는다고."
덕선은 환하게 웃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택이도 알 것이다.
"들어갈게. 택아. 잘 자."
덕선이 인사를 해도, 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뭔가 쑥스러워진 덕선이 키로 방문을 열었다. 문을 조금 여는 순간, 택의 손이 뒤에서 그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동시에 덕선의 몸이 뒤로 돌려졌다.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택의 입술이 덕선의 입술을 찾았다. 그것은 그녀의 말을 택이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아니 이제 자신의 사랑에 빗장을 걸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일지도 몰랐다. 택은 부드럽고 촉촉한 그녀의 입술을 놓지 못하고 자꾸만 더 안으로 깊이 깊이 들어와 얽혀들었다. 그래도 자신의 사랑은 아직 모자라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꾸만 애가 타서 택의 가슴은 그 터질 듯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탐하고만 있었다. 그 복도가 온통 헐떡이는 숨소리로 가득하도록, 연인은 서로의 입술을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3
덕선은 다음 날 돌아왔다. 덕선이 나올 때, 택은 유 과장님과 함께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손도 한 번 못 잡고 온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제 속앓이는 끝이 났으므로, 저 검은 눈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이제 잘 알고 있으므로, 덕선은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택은 덕선이 떠난 다음 날인 27일에 2국을 치러야 했다. 만약 2국을 지게 된다면, 28일에 3국까지 치러야 해서, 택이를 보려면 빨라도 금요일은 되어야 했다. 그것도 일찍 끝나야 금요일이지, 대국이 길게 간다면 택은 토요일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무리 일찍 본다고 해도 3,4일은 있어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덕선의 착각이었다.
덕선이 귀국하고 다음 날, 저녁을 먹는데 이미 택이의 대국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 북경에서 열린 춘란배 결승 3번기 제2국에서 저우웨이 9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고 했다. 최종 우승이자 작년에 이어 2연패였다. 덕선은 기가 막혔다. 자신과 그런 일이 있고도 어떻게 저렇게 흔들림이 없는 건지, 역시 최택 9단이다 싶을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택이였다.
대문 밖에는 이미 택이가 서 있었다. 택이가 덕선에게 손을 내밀며 붉은 입술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멋진 건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손을 잡고 그의 품에 안겼다. 안 춥냐며, 자신의 옷 안으로 덕선을 안아오는 그의 품이 너무나 따뜻했다. 그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소리만큼 덕선의 심장도 그렇게 터질듯이 뛰고 있었다. 아빠의 퇴임식에 오겠다는 택이를 겨우 말리며,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러다 들키겠다 싶을 즈음, 덕선이 택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왜?"
뭔가 서운한 듯 물어보는 택이를 보자 덕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제 들어가. 너, 피곤하잖아. 이제 가서 쉬어."
"너...춥지?"
"아...니야. 근데 니가 쉬어야지."
둘은 서로를 걱정하고 있었다. 덕선은 택이가 쉬어야 한다며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택은 덕선이 추울 테니 보내줘야 하나 갈등하는 중이었다. 사실 택의 이성은 그녀를 집에 보내는 것이 맞다고 몇 번이나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거부하고 있었다. 분명 덕선이 추우니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맞지만, 도저히 보내줄 수가 없었다.
하아.....
택이가 갑자기 한숨을 쉬자, 덕선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택은 덕선의 손을 잡았다.
"덕선아, 잠깐 내 방에 갈래?"
살짝 당황하는 듯하던 덕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덕선도 아쉬웠을지 모른다.
택의 손을 잡고 언제나 오던 그의 방에 들어왔지만, 이상하게 어색했다. 택은 잠시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덕선은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뭔가 자꾸 떨려오는 마음을 조금 진정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언제나 오던 방, 거의 자신의 방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살다시피 하며 드나드는 방이건만 오늘따라 왜 이리 다른지 모르겠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새롭게 보였다. 이곳에 어쩌면 택의 마음이 스며있을지도 몰라서, 자신을 향한 택의 그리움이 있을지도 몰라서 자꾸만 설레기만 했다.
그의 책상에 앉아 벽에 붙여둔 삐삐 번호를 보며 덕선을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정말 택이가 자신에게 삐삐를 친다는 것이, 아니 이제 자신이 택이에게 언제든지 삐삐를 쳐도 된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웃음을 짓던 덕선이 서랍 아래로 눈을 돌렸을 때, 늘 잠겨 있던 그의 제일 아래 서랍장 자물쇠에 열쇠가 풀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서랍문이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서랍을 닫아주려는데, 뭔가 빡빡해서 다시 열고 닫는 순간, 그 안에 든 포장지를 보던 덕선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얼마 전 자신이 받았던 그 포장지였다. 그것도 같은 크기의. 이상하다 싶어 서랍을 여는데 그곳에 그런 포장으로 싼 작은 함들이 여러 개가 보였다.
"어....덕선아....."
그때였다. 택이가 들어오면서 방문을 닫다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둘의 눈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택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택아. 이거...뭐야?"
"아...."
택은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너, 일로 와봐."
덕선은 방문 앞에서 꿈쩍도 못하고 있는 택의 손을 잡고 와서는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는 마치 심문하듯이 그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는 택이를 노려보았다. 택은 그런 덕선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꾸만 눈을 피하기만 한다.
"최택!! 이거 뭐야?"
"어? 아.....그냥...."
"그냥, 뭐?"
택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덕선은 세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너, 이거 다른 여자 줄려고 산 거야?"
"내가 미쳤어? 다른 여자가 어딨냐? 전부 너 주려고...아....."
택은 스스로도 자신이 대답하면서 걸려들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최택! 안 그래도 내가 물어보려고 했어. 너!!! 도대체 귀걸이, 얼마짜릴 산 거야?"
"..........."
"야!!!"
"어...덕선아.... 얼마 안 해."
"얼.마.안.해? 야! 내가 가격 알아 봤거든? 172만 원이라며?"
"그만큼은 안 했어. 단골이라 5프로 깎아주셔서...."
"야!!!!!!"
택은 놀란 듯, 두 손으로 심장을 감쌌다. 그러나 여전히 덕선의 눈은 피했다.
"택아, 너 진짜! 다른 건 얼만데? 설마, 다 비슷한 거야?"
택은 눈치를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선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럼 저게 다 얼마야? 뭐가 또 4개나 돼. 와...이거 거의 천만 원이잖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
"야!! 그게 그거지. 너 안 되겠다. 나 너한테 이미 한 개 선물 받았으니까 저건 다 반품해."
택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왜 안 되는데?"
"저건 전부 오래 돼서....."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노을이가 얘기했던 나우누리 가십란 얘기가 진짜였나 보다. 세상에, 최택이 매년 날 주려고 선물을 샀다니.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비싼 걸, 매년. 그것도 5년이니. 하...돈이 얼만가. 그리고 올해 산 걸 올해 선물로 준 모양이다. 그러니 나머지 4개는 최소 작년에서 4년 전에 산 것들이니 반품도 안 되고... 아...진짜 미쳐.
"야! 너 정말 왜 쓸데없이 그렇게 돈을 함부로 써? 속상하게. 진짜."
그때까지 죄지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택이가 갑자기 얼굴을 들어 덕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덕선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쟤는 왜 저렇게 또 보는 건지, 사람 심장 떨리게..... 그리고 그 순간 택의 손이 덕선을 잡아 당겨 자신의 곁에 앉혔다.
"나 함부로 돈 쓴 적 없어."
"어..어?"
"내 마음이 저걸로 표현될 수 있다면, 값이 너무 싼 거야."
"태..택아....."
"매년, 니 생일마다 주고 싶었어. 축하한다고, 니가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다고,
온 세상을 향해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너라는 존재를 보내주셔서, 너라는 사람이 내 곁에 있어서,
그것만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그리고 너에게 사랑한다고, 매년 니 생일에 전하고 싶었어.
저 선물은, 그런 내 마음이야. 덕선아.
그런 내 마음에 비하면, 저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야.
1억을 아니, 더한 돈을 내어놓는다고 해도 내게는 너무 싼 거야."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는지, 뭘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킬 수가 있는지.... 그저 택의 한없는 사랑에 덕선은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언제나 뒷전이라 생각하며 자라온 세월들 속에서, 사랑받을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왔던 자신의 아픔들을 택은 순식간에 역전시켜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가장 축복받은 사람으로 택은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치잇! 너, 반칙이야.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키냐. 욕도 못하게...."
덕선은 아이처럼 팔뚝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일어섰다. 택이 당황한 듯 덕선의 팔을 잡았다.
"벌써 가게?"
"그럼 어떡하냐? 니가 방금 나, 쪽팔리게 만들었잖아. 갈 거야."
그 순간 덕선의 팔을 잡은 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어!! 택아!!!"
택이 힘 조절을 못한 것일까, 아니면 의도된 것일까. 덕선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택의 힘에 이끌려 소파에 누워있었다. 놀란 덕선이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택의 손이 덕선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바로 위로 택의 눈이 검게 가라앉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선은 택의 손에 양손을 잡힌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른 침만 겨우 삼킬 뿐이었다. 택의 입술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로 다가왔다. 서로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데 택의 입술이 열렸다.
"아직....안 돼."
말을 뱉는 택의 입술이 덕선의 입술을 스쳤다. 간지럽다 못해 저릿한 감각이 심장으로 전해지려는 찰나, 택의 입술이 덕선의 입술로 내려앉았다. 벌써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지만, 덕선은 여전히 택의 입술이 낯설었다. 아니 택의 입술은 늘 새로웠고, 짜릿했고, 간질거렸다. 덕선을 삼킬 것처럼 들어와 온전히 헤집어놓는 택이 때문에 덕선은 몇 번이나 숨을 헐떡여야 했지만, 그래도 택은 덕선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놓아줄 수 없었다. 덕선이 숨을 쉬지 못해 결국 택을 밀어내고서야 겨우 택은 덕선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덕선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이, 택은 자신의 이마를 덕선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런 택을 덕선은 두 팔 가득 안았다.
"덕..선아....."
언제나처럼 낮게, 느리게 택이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좋아서, 자꾸만 가슴이 자글거렸다.
"나....사실 불안했어."
"뭐..가?"
"덕선이 니가....아니라고 할까봐....."
"뭐가, 아니야?"
"그냥....집에 돌아왔는데, 실수였다고 할까봐....겁이 났어."
풋...
덕선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바보 최택. 무슨 소린가. 그게.
"그래서 그렇게 2국만에 이기고 온 거야? 그것도 몇 시간만에 어마어마한 대승으로?"
"어....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또다시 심장이 쿵쿵 뛰어댄다. 택이는 아무 생각 없이 뱉는 말일 텐데,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덕선을 설레게 했다. 아마 택이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설레는 말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지.....
"아...덕선아......"
택이가 또다시 한숨처럼 덕선을 불렀다.
"정말...이러다...미치겠다."
택은 또다시 덕선의 입술을 찾았다. 정말 미치겠다는 말처럼 덕선의 입술 안으로 깊게 깊게 들어왔다. 입술과 입술이, 혀와 혀가 얽혀들었다. 이러다 부모님들이 아시면 어쩌나 싶을 만큼, 서로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소파 위, 두 연인은 방문 밖으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입을 맞추는 소리가 울려퍼지는지 모르는 채, 그렇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4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94년은 어느 틈에 지나고 95년 설을 앞둔 금요일, 택과 덕선은 다음 날 영화를 보기로 약속을 했다. 다행히 덕선이 일본으로 비행을 가는 바람에 설 전 주말에 볼 수 있었다. 사실은 두 사람의 백 일을 위한 데이트였다. 작년 10월 25일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이후, 실제 100일은 설 연후 마지막날인 2월 1일이었다. 그러나 덕선이 설날인 31일에 비행을 떠나서 이틀이 지난 2월 2일에 오는 데다, 덕선이 도착하는 날은 택이가 대국이 있는 날이라 만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두 사람의 100일은 조금 일찍 만나는 걸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관에는 택이가 먼저 도착했다. 그녀는 늦는 듯했다. 오늘 도착하니 아마 끝나고 오면 늦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택은 그저 설레기만 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문이 열리면 자꾸 돌아보면서도, 다른 이가 들어오면 약간은 실망이 되면서도, 그래도 그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아는 체를 하고 사인을 받아가는 것도, 조금도 싫지가 않았다. 그렇게 낯가림이 심했던 최택 9단이, 아니 날카롭고 예민한 신경으로 유명했던 그 최택 9단이 이렇게 변할 줄은 최택 자신도 알지 못했다.
"버스 탔는데, 다 와서 막혔어. 많이 기다렸어?"
덕선이 빨간 코트를 입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천천히 오지. 나도 방금 왔어."
택은 그녀를 위해 아주 작은 거짓말을 던졌다.
"아직 시작 안했지."
"방금 시작했겠다."
"야 빨리 얘기하지! 빨리 들어가자."
어서 들어가자는 그녀의 손을 택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잡아왔다.
"야....."
덕선은 놀란 듯 빼려 하지만, 택은 더 힘을 주어 잡았다. 그냥 그것만으로 뿌듯했다. 사실 덕선도 느끼고 있었다. 요즘 들어 택이는 예전보다 더 손잡고 싶어하고 표현하고 싶어했다. 주변을 신경 써야 할 공인이지만, 택이는 자기 스스로를 일반인이라 착각하는 듯했다. 덕선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택이에게서는 조심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안 되는데, 스캔들이라도 나면 안 되는데 싶어 걱정하고 조심하는 건 덕선 자신일 뿐이었다.
한숨을 쉬며 영화에 집중하려는데,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등 위로 올라왔다. 택이의 손이었다. 덕선의 손이 택의 손을 잡았다. 서로가 서로의 손가락 사이로 얽혀들었다.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게 잡고 다닌 손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잡고 있는 것만으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두 연인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영화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서로에게 얽혀 있던 손만이, 그 따뜻하고 저릿하게 하던 그 손만이 기억이 날 뿐이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그 날처럼 택의 손은 덕선을 두근거리게, 저릿하게 만들었다.
어떤 선물도 받지 않겠다는 덕선의 선언에 따라 택은 그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덕선이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6년 전부터 준비했던 택이의 선물을 이런 기념일에 받겠다고 선언했을 뿐이었다. 새로 사는 선물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덕선의 뜻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택은 자신이 처음 샀던 귀걸이를 그녀에게 건넸다. 6년이나 된 선물을 받고도 덕선은 정말 많이 기뻐했다. 택은 그런 덕선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5
설날 아침 덕선은 일찍 비행을 떠났고, 택은 그저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선우와 오랜만에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설날 저녁인데도 포장마차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아마 설날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많이 없어서 이곳으로 몰린 듯했다.
"택아....."
"어."
"풋....."
갑자기 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택은 황당하다는 듯 그런 선우를 바라보았다. 지금 선우가 웃을 때가 아닌데 말이다. 보라 누나와의 교제를 허락받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인 선우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요즘 많이 안 좋은가 싶을 정도였다.
"왜, 너 많이 힘들어?"
"뭔 소리야?"
"아니, 그냥. 너 알아서 잘할 거라는 거, 잘 알지만, 그래도......"
"인마. 그냥 작년이 생각나서 말이야."
"어?"
"그냥 우리 둘이 작년까지 진짜 힘들었는데...."
택이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택아, 난 하나도 안 힘들어. 왜냐하면 보라랑 난 하나도 안 흔들리니까.
작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6년 동안 그 힘든 시간에 비하면 말이야, 진짜 아무 것도 아니야."
택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넌 아니냐?"
"....넌...보라 누나랑은 확실하지?"
"어? 무슨 말이야, 그게?"
"보라 누나 마음이 확실하다는 거, 넌 믿고 있는 거지?"
"당연하지, 새끼야. 그 믿음 없으면 난 죽지. 이 상황에서 내가 살 수 있겠냐?"
"그래....그렇지."
다시 술을 들이키는 택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사실 선우는 택과 덕선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택이 스스로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선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변하기 시작한 택이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날, 중국에서 돌아온 날, 그 기겁하던 날, 선우는 알고 말았다. 방 밖으로 들려오던 그 낯뜨거운 소리들을. 안절부절 못하며, 부모님이 나오실까 진주가 나올까, 본가에서 보초를 서다시피 했던 그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부터 두 사람이 사귄 건지는 알 수는 없었으나, 바로 그 날, 두 사람이 확실히 그런 사이라는 것을 자신의 모든 귀로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택이 역시 선우가 알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선우는 언젠가부터 택과 덕선을 배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툭 던지듯이, 조심해라 좀, 이라는 말에서 이미 들킨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이렇게 100일이 될 때까지 구체적으로 말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택은 뭔가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너, 무슨 일, 있지?"
사실 그 말은 선우가 할 말이 아니라 택이 던져야 하는 말이건만, 지금 이 순간 선우는 택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택에게는 한없이 고마운 친구였다. 자신의 문제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도 선우는 오랜 친구를, 아니 이젠 가족이 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100일이야."
"안 그래도 그쯤 됐다 싶었지. 근데 뭐가 문제야? 둘이 좋잖아."
"난 자꾸 겁이 나."
"이게 무슨 소리야? 최택 9단? 니가 왜 겁이 나?"
선우는 도통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술잔을 내려놓았다.
"덕선이... 한 번도 100일까지 남자 만난 적 없었을 거야.
아니, 한 달 겨우 만났었나. 그....서우진이라는 사람 말고는 단 한 사람도 없어."
"갑자기, 덕선이 옛날 남자 얘기는 왜 하냐? 넌 배알도 없냐?"
"우리끼리 술 마시면서 얘기했었잖아. 작년에.
덕선이 남자 오래 못 만난다고...."
"뭐? 팜므파탈? 우리끼리 농담한 거잖아."
"그래도 난 자꾸 그게 마음에 걸려."
"와...진짜 무슨 소리야? 어이, 최 사범. 현재 살아있는 대한민국 국보 1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자꾸 자신이 없어. 덕선이가 나를 지겨워하지는 않을지..... 이러다 떠나버리는 건 아닐지....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처럼 덕선이가 견디지 못하는 건 아닐지....
난 너무 두려워."
"하아....택아...너 진짜....."
택은 진심인 듯했다. 또다시 택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털어 넣었다.
"이 바보야. 덕선이한테 그 남자들하고 니가 같냐?
그리고 난...덕선이가 그 남자들 오래 못 만난 거 너 때문인 거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덕선이, 너 때문에 그 남자들 만난 거 아닌가 싶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어?"
"생각해보면, 덕선이는 늘 너한테 특별했거든. 모든 게 특별했어.
니가 다른 사람 좋아한다고 착각했을 거야, 아마도.
니가 고백한다고 그랬다며? 그러고 나서 덕선이가 너 고백했느냐고 묻더라.
덕선이는 니가 다른 사람 좋아하는 줄로 알았을 거야.
고백 못했다고 하니까, 덕선이 표정이 뭔가...그랬어.
지금 생각해 보면, 덕선이가 널 좋아했던 거 같아."
선우의 말에 택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좋냐?"
"응"
택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순애보였다.
"어쨌든 최택, 겁내지 마. 니 마음을 믿듯이, 덕선이 마음을 믿어.
17년 아니 이제 18년 된 불알친구다.
그 친구들끼리 연애를 하는 건데, 그게 보통 사이냐.
믿어. 우리의 시간을 믿으라고."
"응."
그러나 여전히 불안함은 있었다. 바둑밖에 모르는 자신을 덕선이 견뎌내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다. 자신은 지겨울지도 모른다. 답답할지도 모른다. 처음 최택이 좋다며 그렇게 만나게 해달라고 하고서는 만나고 나서 답답해하며 떠나던 그 여자들이 떠올랐다. 단 한 번도 신경 써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 여자들의 이유가 신경 쓰인다. 혹시 그 이유로 덕선이도 떠날까봐 겁이 난다.
이젠 자신은 덕선이 없이는 살 수 없을 텐데...
이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을 텐데....
덕선이가 자신을 바라봐주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 따뜻한 시선과 미소가 너무 좋아서, 자신에게 안겨오는 그 여린 품이 너무 좋아서, 그러다 견디지 못하고 입을 맞출 때면, 수줍은 듯하면서도 따뜻하게 받아주던 그 입술을 이제 알아버려서 택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두렵다. 두려워서 죽을 것만 같다.
그리고 택은 여전히 눈을 뜨면 꿈인지 언제나 되뇌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혹시 꿈에서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그녀와 손을 잡고 그녀와 사귀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서 제일 먼저 덕선이에게 삐삐를 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삐삐가 필요도 없었고, 칠 줄도 모르던 천하의 최택이 이제 삐삐에 녹음된 덕선의 목소리에 안심을 하고, 덕선에게 삐삐를 치기 시작한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행을 갔을 때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애가 탔다.
오늘은 심지어 13시간이 걸렸다. 오늘 밤 늦게나 올 텐데 내일은 만날 수 있겠지 싶지만, 자꾸만 마음은 지치기만 했다. 거의 질 뻔한 대국이었지만, 결국 마지막에 뒤집을 수 있었다. 오로지 한 가지였다. 그래도 그녀가 왔을 때, 이겼다는 말은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보고 싶어서, 그녀가 떠날까 두려워서 그 마음에 겁이 나서 대국까지 져버린다면, 내가 어떻게 덕선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덕선이 무엇을 믿고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싶었다. 오로지 나약한 남자가 되지 말자는, 그 근성으로 마지막 판을 뒤집었다.
오늘따라 힘들었던 대국 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중,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토요일 영화관에서 사진이 찍힌 모양이었다. 기자의 질문에 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잘 됐다 싶은 마음도 컸다. 그러나 택은 노코멘트로 마무리했다. 아직 그녀에게 묻지 못했으므로, 그녀의 허락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는데, 이 부장님이 부르셨다.
"최 사범, 오늘, 고생했어."
"아니에요. 이 부장님도 고생하셨어요."
"내가 뭘, 최 사범이 고생했지.
근데...."
이 부장님이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셨다.
"오늘 열심히 한 만큼, 보람차겠어."
"예?"
"밑에 가면 선물 있을 거야. 가장 보고 싶은 선물."
그 말에 택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쏜살 같이 달려내려 갔다. 이 부장은 기가 찼다. 방금 전까지 다 죽어가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활력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최택 9단은 늘 그랬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웃지 않던 사람이, 유독 한 사람에게만 그토록 웃음이 헤펐다. 심지어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던 바둑 에티켓까지 어겼던 그 환한 미소 사진도 알고 보니 그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유독 그랬다. 최택에게 유일한 사람, 최택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청춘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사람.
"참, 천생연분일세. 허...."
자신도 모르게 이 부장의 입으로 툭하니 튀어나왔다. 그 말에 스스로도 놀라 주위를 살피는 이 부장이었다.
이 부장님의 말씀은 정말이었다. 그녀였다. 며칠 못 본 것뿐인데, 벌써 가슴이 울컥 올라왔다.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택은 자신의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었다. 세상의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것 같다.
"이거 꿈 아니지?"
택은 습관처럼 물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덕선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무슨 바둑을 13시간이나 두냐."
"그러게."
"고생했어."
그래 이 말이었다. 언제나 진심을 담아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덕선의 말,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응. 너도."
택은 그리운 그녀를 자신의 가슴 가득 안아왔다. 그러나 그 평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미 한참 늦어버린 시간, 택과 덕선은 내리지도 못한 채, 논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니 논쟁이랄 것도 없었다. 택은 뭔가 속상해하고 있었고, 덕선은 그저 그런 택을 달래고 있었다.
"내 말대로 해? 알았지? 지금 양쪽 어른들 선우랑 성보라 때문에 힘들어.
근데 우리 사이까지 알게 되면, 충격 크실 거야.
그러니까 오늘 열애설 난 거 아니라고 말씀드려. 응?"
"싫어. 거짓말 안 해. 6년을 속였는데. 더는 싫어."
덕선의 말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택은 싫었다. 그녀에 대한 거짓말도 싫었고, 이렇게 두려운 마음을 감춘 채 만남을 가지는 것도 싫었다.
"시간 지나고 세월 흐르면. 그때 상황 봐서 말씀드리면 되잖아.
너희 부모님도 우리 부모님도. 얼마든지 우리 얘기 들어주실 분들이야.
근데 지금은, 지금은 아니야. 난 안 변할 자신 있는데. 넌 없어?"
안 변할 자신이 너는 없느냐는 말에 기가 막혀서 바라본 덕선의 눈은 이미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안다. 분명 덕선의 그 착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덕선은 늘 이렇게 양보해 왔다.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해 왔다. 택에게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덕선은 모른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불안한지, 얼마나 두려운지. 자신의 사랑이 덕선을 숨 막히게 할까봐 얼마나 누르고 또 누르고 있는지. 그러다 덕선의 작은 말 한 마디, 작은 행동 하나에도 자신은 얼마나 겁이 나는지,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다.
"택아. 난 너 믿어. 우리가 쉽게 변할 사이처럼 보이냐?"
변할 사이라는 말에 택은 또다시 울컥하고 만다. 그런 말만으로도 불안하다는 걸, 정말 그녀는 모른다. 택은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을 수도 없다. 혹시나 그런 일이 일어날까 겁이 나서 말로도 뱉고 싶지가 않다. 생각만 해도, 상상만 해도, 택의 심장은 조여 오는 것만 같다.
"난 안 변해."
그 순간이었다. 마치 고백처럼, 그녀는 택을 향해 변하지 않는다고 그 진심을 전해왔다. 그제야 택의 얼굴에서도 겨우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천천히 시간 가지고 이야기 해보자. 응? 알았지?"
정말 미칠 지경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택은 그저 고개를 돌리고 답답한지 한숨만 깊게 내쉬었다.
하아....
그런 택을 달래려는 듯, 덕선이 아까와는 달리 밝게 말을 건네 왔다.
"대신 내가 선물 하나 줄게."
돌아보는 택에게로 덕선이 천천히 다가왔다.
"사랑해."
아..... 정말 그 말이 택의 가슴 저 안으로 내려와 심장을 뛰어대게 만들었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18년 간의 사랑이 사랑한다고 그 마음을 건네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택은 덕선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의 차이를..... 사랑한다는 말의 힘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말을 하는 이도, 그 말을 듣는 이도, 가슴 저 안으로 그 뭉클함이 번져 갔다. 말이 힘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일으키는지, 어떻게 사람을 살려내는지 지금 이곳에서 택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은, 단 한 마디로 온 세상을 다 가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나의 사랑은 이토록 나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택은 참을 수 없었다. 사랑해 라는 말의 여운을, 그 말의 힘을, 그 말이 심장을 두드려대며 미치도록 뛰어대게 하는 그 능력을 지금 이 순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녀는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입술을 보는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택은 그녀의 입술로 다가갔다. 그 벅차오르는 마음을 입술에 담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우리 사이 아시잖아요.
우리 사이가 변할 사이처럼 보이세요."
어른들께 했던 대답은 단 한 치도 거짓이 없었다. 진심이었다. 내 모든 세상을 걸고, 다짐한 나의 맹세였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이 사람을 사랑하노라고,
내 인생을 다 바쳐 이 사람밖에 없노라고,
그렇게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에게 나의 미래를 걸고 그렇게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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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에필로그 있음. 바로 올림 (길이 때문에 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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