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 선택 상플/(선택) 94년 어느 날, 어쩌면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15장 감각(感覺)

그랑블루08 2016. 4. 7. 19:51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15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98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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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감각(感覺)

 

 

 

 

때로 감정보다 앞선 감각이 있다.

애써 누르고 눌러도

머리로 아무리 설득해도

절대로 설득당하지 않는

오감이 존재한다.

 

그렇게 감각이 깨어날 때,

감정은 이제 더 이상 숨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도, 이성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된다.

 

모든 자극은 오로지 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오감은 오로지 단 한 사람에게로 귀결된다.

그리고 감각은 이제 모든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앞서 존재한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만 존재한다.

 

 

 

1

 

택이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는, 선우가 막 병원에서 나서려던 참이었다. 레지던트실에서 가방을 챙겨 나오려는 찰나, 전화가 울렸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에이 하면서 전화를 받았더니 택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찾고 있었다.

 

". 2병동 제1과 레지던트실입니다."

 

"선우야!! 성선우!!!!"

 

택이가 이렇게 다급하게, 이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전화를 한 적은 없었다. 선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택아!!! 무슨 일이야? 뭔 일 있어? ? , 아저씨 안 좋으셔?"

 

택이가 다급해 할 일이라면, 아저씨 일 밖에 없다 싶었다. 계속 관리를 하고 계시지만, 그래도 뇌출혈은 늘 조심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 덕선이가, 많이 아파."

 

"? 덕선이?"

 

"열도 많이 나는 것 같고. 지금 의식도 없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택의 음성이 자꾸만 떨려나왔다. 이 자식 아무래도 패닉이다.

 

", 최택! 정신 차리고 말해 봐.

열이 얼마나 나는데? 체온계로 재봤어?

쓰러진 거야? 쓰러질 때 어디 부딪치진 않았어?"

 

"체온계는 아직 못 재봤어. 쓰러진 건 아니야."

 

"정확하게 얘기해봐. 혹시 뭘 먹었는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된 건지...."

 

"덕선이가 오늘 일본에서 오자마자 우리 기원 회식에 왔어.

그리고 술을 좀 많이 마시고.

집에 와서 평상에 누워 있었는데, 지금 의식이 없어.

, 좀 빨리 와주면 안 되냐?"

 

"알았어. 일단 내가 약이랑 주사 몇 개 챙겨갈게.

넌 걱정 말고 덕선이 경과 좀 지켜봐.

, 혹시 계속 열이 나면, 이마랑 팔이랑 따뜻한 물수건으로 좀 닦이고...

, 니가 이걸 하겠냐. 아니면 아줌마께...."

 

"아니, 내가 할 수 있어."

 

"그래, 그럼 빨리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 고맙다. 선우야."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선우는 포도당 주사와 몇몇 약들을 챙겨 택시를 타고 날아왔다. 얼마나 심각하길래 애가 이러나 싶어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강철 체력 성덕선이 쓰러졌다면 보통 일은 아니었다.

 

덕선이의 집 문을 두드렸을 때, 일화는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와서는 선우의 손을 잡았다.

 

"아이고, 선우야, 내 인자 안심이다. 고맙데이. 진짜로 고맙데이."

 

"아줌마, 저야 그냥 와본 건데요. 별일 아닐 거예요."

 

"그렇제? 나도 그래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덕써이가 좀 무리를 했다 아이가.

거진 2주간을 비행을 한다꼬, 뭘 그리 무리를 해쌌는지 내 오늘 진짜 심장이 다 튀나 올라칸다."

 

"걱정 마세요. 제가 살펴볼게요."

 

"그래, 고맙다. 니 덕분에 내가 산다."

 

방으로 들어서니 동일이 앉지도 못하고 서서는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아이고매, 우리 의사 선상님 오셨당가. 우리 의사 선생 계신께 나는 하나~또 걱정이 없당게. 고맙다이잉."

 

"아니에요, 아저씨. 근데 덕선이는 어디....?"

 

"저 안에 있당게. 어여 들어가보소."

 

". 아저씨."

 

문을 열고 들어가 본 방에는 덕선이 누워 있는 자리 옆으로 택이가 걱정스레 덕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걱정 정도의 감정이 아니라,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이고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어이, 최 사범."

 

", 왔냐."


"뭐야, 니가 왜 다 죽어가?"

 

"덕선이 많이 안 좋은 거지?"

 

", 내가 점쟁이냐? 보자마자 알게? 진찰을 해봐야 알지."

 

"그럼, 빨리 해."

 

이건 뭐, 지금 너 뭐 하냐, 왔으면 빨리 진찰이나 해라, 뭐 그런 식이었다. 최택이 이렇게 단호하게, 거의 명령조로 빨리 하라고 말하는 걸 선우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래, 덕선이 일이니까...싶어 이해하기로 한다.

 

열을 재고, 다시 청진기를 대보고, 그러다 덕선이의 감긴 눈을 들여다보는 선우의 얼굴이 자꾸만 갸웃거린다. 그 모습이 못내 불안한 택은 결국 입을 열었다.

 

", 많이 안 좋은 거야?"

 

"아니...택아, 잠깐만."

 

이렇게 저렇게 살펴보던 선우가 기가 막히다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선우야!!"

 

이젠 정말 정신을 놓을 것 같은 택이가 선우를 닦달했다.

 

", 최택!!!"

 

"? ? 덕선이, 많이 아픈 거야?"

 

"아이고...내가 미치지. 정말. , 덕선이 그냥 자는 거야."

 

"?"

 

선우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 택이 되물었다.

 

"어휴...진짜 최택 널 어쩌냐.

... 잔다고, 기절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잔다고. 새끼야!"

"...그럼 괜찮은 거야?"

 

"그래, 인마. , 니 말대로 열은 좀 나기는 하는데...술 마셨다며?"

 

"."

 

"많이 마셨냐?"

 

택이 고개만 끄덕인다.

 

"하여튼, 성덕선 지 주량도 모르고 퍼마시기는....."

 

"그럴 일이 좀...있었어."

 

"무슨 일?"

 

택의 입이 또다시 굳게 닫혔다. 저 자식 분명 또 입 닥치고 저러고 있겠지 싶어서 선우는 미리 포기하고 만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듣겠냐.

여튼 술 때문에 열이 올랐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리해서 감기 기운이 있을 수도 있어.

아줌마 얘기 들어보니까, 2주 연속으로 비행했다며? 그러니 아플 수밖에."

 

"그럼, 괜찮은 게 아니라, 아픈 거잖아."

 

"뭐래? 괜찮다니까. ! 나도 피곤해. 나도 열난다고.... 몸살 기운도 있고.

다들 그런 거지."

 

"그래? 그럼, 괜찮은 거야?"

 

"그래. 괜찮다.

근데 택아! 너야말로 괜찮냐? 너 입술 완전히 퉁퉁 부었어.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

 

선우의 말에 순간 택이 얼음이 되었다. 왜 저래 싶다가, 선우는 그래도 덕선에게 링겔이라도 꽂아 주어야겠다 싶어서 가방에서 포도당 주사를 꺼냈다.

 

"너야말로 몸 좀 아껴라. 덕선이보다 니가 더 걱정이다."

 

선우가 덕선의 팔을 걷고, 알코올솜을 묻혀 닦은 후 침을 꽂으려 하자, 택이 살살 해, 라며 훈수를 둔다. 이 자식이 싶어서 쳐다보니, 택의 눈빛은 이미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유난도, 어휴....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늘을 꽂아 링겔을 연결했다.

 

"피곤한 거든, 술독이든, 어쨌든 둘 다 링겔 맞으면 확실히 좋으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몸살이면 그것도 도움될 거고. 여튼 인마, 너나 걱정해라."

 

", 괜찮아."

 

"새끼, 괜찮긴...!!"

 

뭐라고 대답하려던 선우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했다는 듯이 덕선의 얼굴을 살폈다.

 

"덕선이, 진짜 많이 피곤했나? 얘도 입술이 엄청 부었네. 너네 둘다 너무 무리.....!"

 

선우가 말하다가 갑자기 말을 흐렸다. 이상하다 싶었다. 둘다 입술이 부어 있다라.... 설마. 희동이 이 자식이?

 

", 희동이, ...설마.........진짜 설마...너 혹시.....!!"

 

"...아니야. 다 됐지? 가자, 이제. 아주머니, 아저씨 걱정하시겠다."


택은 뭔가 당황한 표정으로 선우를 잡아서 거의 끌다시피 하며 밖으로 나왔다. 안 그래도 걱정이 되어선지 동일과 일화는 문 바로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선우는 괜찮다며,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라서 잠든 거라고 안심을 시켜드렸다. 그리고 자신이 한 시간쯤 후에 다시 오겠다고도 덧붙였다. 그렇게 연신 고마워하는 동일과 일화를 두고 두 사람은 집 밖으로 나왔다.

 

 

2

 

 

택이와 선우가 밖으로 나간 후, 일화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또 뭐 땜시 그러능가, 임자?"

 

"택이가, 저래 놀라는 거 본 적 있나?"

 

"없제. 달리 돌부처당가."

 

"그렇제? 참 희한하데이."

 

사실 동일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아까 회식이라며 연락이 온 덕선에게 술 취하면 집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호통을 쳐두었는데, 정작 들어오지 않자, 그 또한 걱정이 되었다. 기다리다 못해 문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택이의 목소리였다.

 

"옴마, 택이 니가 뭔 일이.....!!

이건 뭐다냐? 이 화상은!"

 

택이가 덕선이를 업고 문 밖에 서 있었다. 택의 눈에는 뭔가 물기가 고인 듯도 했다.

 

"뭔 일이래? ?"

 

"아저씨. 덕선이가....많이 아파요."

 

"뭐시여? 우리 개딸이가 아프대?"

 

"죄송해요. 저 때문이에요."

 

그 말에 일화도 방에서 튀어나왔다.

"덕써이가 아프다꼬? 이래 튼튼한 아가?"

 

"죄송해요. 아줌마. 오늘 덕선이가 기원 회식에 왔는데, 술을 좀 마셨어요.

술 깬다고 평상에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택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가?"

 

"......그러다가 의식이 없는 것 같아서 엎고 왔어요. 열도 나는 것 같고....

죄송해요."

 

"택아, 니가 뭘 잘못했다고 이카노. 델꼬 와줘서 고맙기만 하다."

 

"아니에요. 저 때문이에요."

 

택은 빨갛게 핏발이 선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고마, 우짜노. 이 가시나 너무 무리했는갑다.

야가 북경에, 거 어디고 남미 어디에, 일본꺼정 갔다 안 왔나.

내가 진짜...이 노무 가시나를..."

 

"아줌마...덕선이 많이 아파요."

 

"그래, 맞다. 어여 들어와 눕히자. 얼릉 들온나."

 

일화가 급히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폈다. 덕선을 눕힌 택이가 전화 좀 쓰겠다며, 전화를 걸었다. 뭔가 싶어서 들어보니 선우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당황하고 놀란 목소리였다. 이 골목에서 택이를 함께 키워온 동일내외였다. 이 아이가 이렇게 당황하고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따뜻한 물수건 좀...주세요."

 

"? . 알았다, 있어 봐라. 내 아까 물 뜨사논 게 있어가....."

 

일화가 부랴부랴 택에게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을 건네자, 택은 거침없이 덕선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그 모습을 보던 동일과 일화가 당황하고 있었다. 다 큰 딸내미 방으로 장성한 남자가 들어가는 걸 말릴 수도 없고, 그냥 그대로 보고 있는 것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일과 일화는 택을 말리지는 못했다. 택의 얼굴이, 그 단호함이 왠지 말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둘이...뭐꼬?"

 

"어허...임자도. 뭐긴 뭐여. 깨복쟁이 친구들이제."

 

"그렇제? 너무 오래 돼가 그런가, 식구보다 낫데이.

맨날 덕써이가 마이 챙겨조가 택이가 갚는갑다."

 

"두말하면 잔소리제. 이 사람아, 뭘 그리 걱정해싼대.

순리대로 내비두면 그리 된당게, 신경쓰지 마소."

 

그러나 일화의 미간은 쉽게 펴지지 못했다. 일화의 눈이 덕선의 부어 있는 입술로 자꾸만 향했다.

 

"아이겠지...그럴 리가 있나....."

 

3

 

 

그날 이후, 덕선은 집에서 내리 이틀을 그냥 쉬었다. 어차피 비행이 없기도 했다. 원래 조정해서 더 가려했으나, 회사에서 단칼에 거절했다. 달별 크루 스케줄에서도 이미 덕선은 너무 많이 달려와서 한동안 이름이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회사 입장에서도 그렇게 심하게 무리해서 달리는 게 서비스의 질과 연관되는 문제라 단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죽도록 쉬자 싶어서 그냥 빈둥대며 집에서 쉬기만 했다.

 

그 사이 일화가 덕선을 끌고 용하다는 한약방에 데려가서 보약도 지었다. 덕선이 아무리 괜찮다고, 강철 체력이라고 말해도, 일화는 단호했다.

 

"시끄럽다! 니 이카다 진짜 쓰러진데이. 이번엔 무조건 무라.

클 때도 제대로 못 믹있는데, 이번엔 마, 제대로 함 묵일끼다."

 

일화의 미안해 하는 말에, 덕선은 더 이상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진맥을 하더라도, 약이 되려면 4~5일은 걸린다고 했다. 덕선은 잘 되었다 싶었다.

"엄마, 그럼 나, 다음 주 토요일 지나서 먹을게."

 

"뭐를? 보약 말이가?"

 

"."

 

"약 받아오마, 바로 묵지, 뭐할라고 있다 묵노. 퍼떡 먹어야 약 효과도 있다."

 

"그래도, 엄마, 토요일 지나고...? ?"

 

"토요일? 도대체 뭐길래, 이케샀노? 아이고 마. 8일이마 택이 생일 아이가?

징하다, 징해. ~단한 우정 나셨다. 택이 생일날 와, 축하주는 꼭 마셔야겠디나."

 

"당연하지. 원래 생일에는 술을 좀 마셔줘야 하는 거지."

 

덕선이 너무나 당연하게 얘기를 하자, 일화는 혀를 차다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이럴 때 엄마의 모습은 덕선을 긴장하게 했다.

 

"? 왜 또?"

 

"우리 개딸아, 고마, 택이 잡아뿌라, ? 개딸아!!"

 

", 진짜,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또 왜 이러셔?"

 

"택이가 눈이 돌아가가, 니 좋다 칼지 아나?

저번에 택이 진짜 걱정 마이 하더래이."

 

"됐어. 택이 좋아하는 사람 있어."

 

"진짜가? 아이고 아까바라.

근데 와 안 사귀노? 사귀는데 비밀로 하는 기가?

내 선우네한테는 안 카께. 말해 봐라."

 

"택이가 아직 고백 못했대. 아주 오래됐어.

그러니까 엄만 그 정도만 알고 있어. 모르는 척하고, 알았지?"

 

"알았다. 우짜겠노. , 되게 아깝네."


"뭐가 그래 아깝노? 엄마는?"

 

"택이가 니한테 엄청 잘한다 아이가.

저번에 니 업고 왔을 때도, 아가 사색이 다 됐더라.

니 옆에 딱 붙어가, 나가지를 못하대.

그래가 하마나 했지."

 

"아니라니까. 엄마는! !"

 

"알았다, 알았다, 가시나 성질머리하고는....이게 점점 보라 닮아가나.

니는 닮지 마래이. 우리 착한 덕써이."

 

"알았어. 알았다고. 에휴."

 

뭐라고 엄마에게 타박했지만, 덕선의 얼굴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상하게 보는 엄마가 민망해서 덕선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하지만 그 날의 기억은 고삐가 풀린 것처럼, 스물스물 새어나왔다.

 

그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그 날....

 

생각나는 것은 한 가지였다. 눈을 떴는데, 바로 눈 앞에 택이가 있었다. 그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환상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 기억들은 연결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뚝뚝 끊어지면서 장면으로만 등장했다.

 

, 아니야!!!!! 아니라고!!!!!

 

그 다음 기억인지 꿈인지가 떠오르자, 덕선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다음 장면은 정말로 현실이어서는 안 되었다. 무조건 꿈이어야 했다. 덕선 자신이 택의 깃을 잡고 끌어 당기는 장면, 두 입술이 서로 부딪치는 장면, 그러나 그 감각만큼은 너무나 생생해서 그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발끝이 자글거렸다.

 

문제는 이틀간 계속 같은 꿈을 꿨다는 거다. 지금 이 장면들이 무한 반복되었다. 꿈속에서 덕선은 자꾸만 택이를 잡아 당겼고, 택은 그런 덕선에게 입을 맞췄다. 어떨 때는 덕선이 매달렸고, 어떨 때는 택이가 덕선의 입술을 거칠게 빼앗기도 했다. 정말 욕구 불만인가, 싶을 만큼 자꾸만 꿈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때마다 가슴이 저릿하고, 온 몸의 감각들이 자글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그 날의 기억인지, 혹은 계속 반복되는 꿈인지 알 수 없으나, 늘 같은 영상은 하나였다. 덕선이 택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는 것.

 

"으아아아악!!!!!"

 

자신도 모르게 질러버린 비명에 일화가 뭔 일이냐며 다급하게 물어왔다.

 

"덕써나, ? 뭔 일 있나?"

 

", 아니야. 엄마."

 

꿈이다, 꿈이다, 덕선은 마치 자신을 스스로 세뇌라도 하는 것처럼 되뇌었다.

 

, 아니면 어떡하지. 아우...내가 미쳐...

아닐거야. 생각해봐.

 

어렴풋이 들렸던 소리...

 

"미안해. 덕선아. 나 때문이야."

"헤어지길 바랐는데..... 근데 니가 헤어지니까.....더 아파, ...."

 

그 목소리는 확실히 택이의 것이었다.

 

내가 헤어진 걸 알리가 없잖아. 개꿈이다. 개꿈...

 

그러면서도, 그렇게 믿고 또 믿으려 하면서도, 덕선은 택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집 앞 평상에 택이가 앉아 있는 소리만 들려도, 덕선은 나가다가 들어와서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야말로 쪽팔려 죽을 것만 같았다. 마치 주문처럼 외었다. 꿈이다, 꿈이다.

 

그러나 또다시 밤이 되면, 꿈속에서 그 날이 재생되었다. 그곳에서 덕선은 여전히 택이를 끌어당겼고, 택의 입술은 덕선을 탐했다. 그 밤이 지나고 나면, 덕선은 한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택이가 주는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너무나 따뜻하고 촉촉해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고, 더 더 안으로 깊게 들어오던 택이의 입술이 느껴져서, 덕선은 그저 그 감각을 끌어안고 그렇게 그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4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토요일이 되었다. 오늘까지 집에서 뒹굴까 말까를 고민할 즈음, 탑 언니에게서 호출이 왔다.

 

"여보세요."

 

", 언니, 저예요. 덕선이."

 

"그래, 덕선아. 너 좀 괜찮니? 그 날 많이 취했지?"

 

"아뇨. 괜찮았어요."

 

"최 사범님이 그래도 의리가 있더라. 너 딱 데려다 주고...."

 

"저희가 워낙 오래된 한 동네 친구라....."

 

"그래, 좋아 보여. , 참 덕선아, 너 오늘 시간 되니?"

 

". 별 일 없어요. 왜요?"

 

"그날 나 때문에 기원 회식에도 같이 가주고 고마워서, 내가 밥 사고 싶은데, 나올래?"

 

"? 오늘 토요일인데, 유 대...아니 유 과장님 안 만나세요?"

 

"오늘 기원에서 대국 있대. 좀 늦게 마친다고 밥 먹고 만나야 할 것 같아."

 

"...... 그럼, 택이 대국 있는 거예요?"

 

"그럴 걸? 연말에 대국이 많다며, 이것 저것 소소한 거 많은 거 같더라."

 

"....."

 

"그럼, 나올 수 있어?"

 

". 돼요. 어디로 갈까요?"

 

"그냥...반줄에서 볼까?"

 

". 좋아요."

 

"그럼, 한 다섯 시쯤 보자. 좀 일찍 만나서 밥도 먹고 좀 떠들고."

 

"좋아요. 언니. 그럼, 좀 이따 봬요."

 

", 덕선아 예쁘게 입고 와라."

 

"? 왜요?"

 

"그냥, 둘이서 헌팅이나 하자."

 

"...... 언니, 제가 유 과장님께 다 일러줘도 되는 거 맞죠?"

 

"됐어. 알았어. 그럼 좀 이따 봐."

 

". 언니."

 

그 말 때문이었을까, 그저 바지나 입고 대충 나가려다, 탑 언니의 말대로 기분 전환이나 할 겸, 스커트를 챙겨 입었다. 집에만 계속 쳐박혀 있어서 계속 그런 꿈이나 꾸는 거다 싶었다. 기분 전환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다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덕선아, 여기 여기!"

 

탑 언니는 이미 와 있었다. 그런데 탑 언니 옆에는 모르는 남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 언니."

 

좀 당황스럽다 싶은 덕선은, 그저 아는 분을 만난 건가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탑 언니의 그 다음 말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인사해. 내 대학 후배야."

 

", 안녕하세요? 언니랑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는 성덕선이라고 합니다."

 

".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정훈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은데, 탑 언니가 한쪽 눈을 찡긋한다. 그제야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설마 이 언니가..... 그 때 이 남자에게 삐삐가 오면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덕선은 탑 언니에게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물었다.

 

"미안, 미안. 얘기하면 너 안 나올 것 같아서....."

 

"그럼, 진짜 소.....인 거예요? 지금?"

 

"그래. 안 그래도 너한테 소개 한 번 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 저번에 그 사람하고 끝났다고도 하고,

또 내 후배도 소개 시켜달라고도 하고 해서....."

 

"그래도 언니, 말씀을 먼저 해주시지....

저 사실 아직 다른 사람 만나기..힘들어요."

 

"알지, 내가 왜 모르겠냐.

그래도 덕선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야."

 

"언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나 봐.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다 보면, 무뎌져."

 

뭐라고 덧붙이려는데, 남자가 돌아왔다. 사실 불편했다. 언니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아직 그 어떤 마음도 정리되지 못했다. 그리고 한 남자를, 그렇게 매몰차게 끊어냈다. 그래 놓고 지금 여기서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게 정말 맞나 싶었다.

 

"그럼, 둘이 이야기해."

 

그러나 덕선이 어떤 생각을 할 틈도 없이 탑 언니가 일어섰다.

 

"언니, 가시게요?"

 

덕선이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탑 언니는 단호했다.

 

"유람 씨, 만나기로 해서....

, 정훈이 너, 덕선이 집까지 에스코트 확실하게 해라."

 

"당연하죠. 선배."

 

"그래, 믿는다. 참 덕선이 집 쌍문동이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뭔가 군대식으로 반 장난식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둘이 많이 친한 듯했다. 정말 미치겠네 싶은 순간, 그렇게 탑 언니는 가버렸다. 덕선은 애매한 미소를 띤 채, 그저 자신 앞에 놓인 물잔을 그대로 들이켰다. 그래도 속이 타기만 했다.

 

남자는 그저 그랬다. 그 전에 소개팅으로 만났던 남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자를 많이 만나본 듯했고, 매너도 있었다. 그저 여자를 배려하는 것이 익숙한 듯했다. 저 정도면 얼마 전까지 애인이 있었을 각이었다. 사실 덕선 스스로도 그랬으니 뭐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무난했고, 조금은 얼굴값을 하나 싶기도 했다. 그저 어서 시간만 흘러라 싶었다.

 

식사 후 남자는, 일찍 들어가겠다는 덕선을 한사코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그렇게 우겨댔다. 탑 언니한테 엄청나게 혼난다며, 무조건 같이 가야 한다고 난리라서 나중에는 덕선이 손을 들었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인데 뭐, 하는 심정으로 쌍문동까지 그의 차를 얻어 탔다.

 

그렇게 쌍문동 골목에 내려주자, 덕선은 고맙다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남자가 따라 내리더니, 덕선의 팔을 잡았다.

 

"덕선 씨...."

 

"?"

 

갑자기 남자가 팔을 잡자, 덕선은 긴장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설마 탑 언니 후밴데 뭔 일이야 있겠냐 싶기도 했다.

"덕선 씨 옆에 남자들이 애간장이 녹을 것 같네요."

 

"네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덕선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남자를 애타게 만들고, 자꾸 붙잡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으시네요."

 

이건 또 어떤 작업 멘트인가 싶어서 머리를 굴리는 동안, 남자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냈다.

 

"이거, 은서 선배가 준 건데, 저랑 같이 영화 보실래요?"

 

그야말로 훅 하고 공격이 들어왔다.

 

"...저 그게...제가 요즘 좀 일이 많아서......"

 

여기까지다 싶었던 덕선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거절의 멘트를 꺼내고 있는 중이었다.

 

"죄송하지만, 저 덕선 씨랑 영화 못 보면, 은서 선배한테 죽습니다."

 

"?"

 

"은서 선배가 저 죽일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덕선 씨가 애프터도 안 받아주느냐구요.

안 그래도 저한테 표 주시면서, 애프터 못 얻으면, 각오하라고 하셨거든요."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지, 거절도 못하고, 그렇다고 승낙도 못한 채, 덕선은 애매하게 서 있었다. 더 단호하게 한 마디 해야겠다 싶은 즈음, 남자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사람 한 명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자원 봉사 한 번만 해주세요."

 

생긴 것과는 달리, 꽤 능수능란했다. 잘 생기고, 매너도 좋아 보이는데, 의외로 여자의 허점을 잘 치고 들어왔다. 불쌍한 척, 뭔가 도와달라는 척, 그렇게 이 남자는 아주 호기롭게 덕선에게 애프터를 신청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완전히 거절하는 것도 이상해 보였다. 애프터 한 번 더 받고 끝나도 뭐가 문제랴 싶어서, 그것도 탑 언니가 소개해 준 사람인데, 너무 매몰차게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사실 탑 언니에게 눈치 보이기도 했다.

 

"알겠어요. 근데 저 이번 주는 계속 비행인데....."

 

"알고 있습니다. 주중은 힘드실 테니 다음 주 토요일은 안 될까요?"

 

", 안 돼요! 그 날은 절... 안 돼요!"

 

"? 토요일에 무슨 일이라도.....?"

 

". 그 날은 너무너무 중요한 아...그러니까 가족 모임이 있어서....."

 

", 그러시군요. 그럼 일요일은 괜찮으세요?"

 

"그 다음 날요? , 그 날은 돼요."

 

"그럼, 제가 일요일 걸로 바꾸어 둘게요.

덕선 씨가 오늘 사람 목숨 하나 살리신 겁니다.

오늘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도 해야 되거든요.

비행 잘 다녀오세요. 제가 연락 한 번 드릴게요."

 

"? ......"

 

남자는 정말 대단한 미션이라도 수행한 것처럼 기쁜 듯했다. 도대체 탑 언니가 뭐라고 했길래 저러나 싶기도 했지만, 탑 언니가 덕선에 대해서 늘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부담스럽다 싶었다. 그렇게 한숨을 쉬고 걸어 들어가는 덕선을 골목 끝에서 세 남자가 뻥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 지금, 덕선이냐?"

 

"그렇지. 아마도......"

 

황당해 하는 동룡의 물음에 선우도 떨떠름하게 대답을 했다.

 

"근데 저 남자는 누구냐? 딴 남자냐?

우진 씨는, 그럼 어떻게 된 거냐? ? 선우야?"

 

"낸들 알겠냐. ...진짜 성덕선, 장난 아니다. 진짜......"

 

"양다리는 아니겠지? 그렇겠지?"

 

", 덕선이가 아무리 남자를 만나도 상도는 지켜, 인마."

 

"그렇겠지? , 근데..... 우진 씨는 어떡하냐? 우진 씨 진짜 진지해 보였는데?"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동룡을 향해서 정환이 물었다.

 

"우진 씨가 누군데?"

 

"덕선이 애인. 아니 전 애인. 얼마 전까지 애인........"

 

"? 전 애인? 그럼 저 남자는?"

 

정환의 목소리가 까칠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충격에 휩싸인 동룡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현재 애인? 우와...989 성덕선, 진짜 와우!! 최고다 최고.

선우야 니 말대로 쟤는 파무 뭐더라, 파탈 뭐 있잖아. ?"

 

"어유, 무식한 새끼, 팜므파탈, 인마."

 

"그래, 그거, 그거다. 쟤 어쩌다가 저렇게 됐냐."

 

정환이 갑자기 간다며 손을 흔들었다.

 

", 뭐야, 인마, 너 벌써 가게?"

 

"그래, 새끼야. 사천이 얼마나 먼 줄 아냐. 다음 주에 보자. 어차피 택이 생일로 모이잖아."

 

"뭔 당일치기로 올라오냐, 그럴 바엔 그냥 올라오지 말고 다음 주에 그냥 올라오지."

 

"됐어. 니가 울 엄마를 아냐? 라미란 여사, 상태 안 좋아."

 

그렇긴 했다. 여튼 효자 새끼야, 저 자식은..... 선우와 동룡이 그러거나 말거나, 멀리서 온 친구는 또다시 내려가려 차에 탔다. 그 모습이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건, 그저 선우 자신의 기분 탓이려니 생각했다.

 

 

5

 

 

집에 돌아와서도 덕선은 마음이 복잡했다. 한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 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심지어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이게 정말 잘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왜 이리 남자가 꼬이나 싶었다. 왜 이렇게 화살표는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지, 왜 서로를 가리킬 수는 없는 건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자야겠다 싶을 즈음, 덕선의 삐삐가 울렸다.

 

이미 부모님이 주무셔서 덕선은 건넌방으로 조심스레 건너가 삐삐 번호를 눌렀다.

 

"덕선 씨......."

 

뭔가 취한 듯한, 젖은 듯한 목소리에 덕선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자신이 떠나보냈던 그 남자의 음성메시지였다.

 

"잘 지내요? ...후우.....잘 못 지내요.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왜 덕선 씨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을까......

그러다 신문을 봤어요. 기사가 나왔더라구요.

100일 때문이었어요? 그 날이....그 사람....생일이라서.....?"

 

그 말에 덕선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 다음 음성메시지로 이어졌다.

 

"끊겼네요. 그냥 물어보고 싶었어요.

만약, 우리 100일이 그 날이 아니었다면, 그 빌어먹을 108일이 아니었다면....

하아....우리는...아직 만나고 있을까요?"

 

음성을 듣는 덕선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흐느낌이 새어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자신은 정말 천벌을 받을 거라고 그렇게 소리죽여 울었다. 그 남자의 말이 맞았다. 그 빌어먹을 108일이 아니었다면, 그 남자와 나의 이별은 조금 더 유예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택이가 다른 여자를 만나, 그 사람과 사랑하며 또 그렇게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나는 그 날을 비울지도 모른다. 덕선에게는 그 날이 절대적인 시간이었다. 다른 그 누구와도 공유될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시간. 택이가 다른 여자와 떠난 후, 어쩌면 자신도 다른 남자를 만날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날만은 오롯이 남겨두고 싶은 그런 절대적인 시간이었다.

 

 

6

 

화요일 비행을 위해 집을 나서던 덕선은 대문을 열기 전, 주위가 조용한지부터 확인했다. 물론 평소 출근 시간보다 1시간 반이나 더 빨랐다. 사실 그 날 이후 줄곧 택이를 피해왔다. 도저히 택이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과 인사하는 택이를, 어른들께 인사하는 택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렇게 몸을 사리며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다 택이가 확실히 출근을 한 것 같은 오후나 되어서야 겨우 나오고는 했다. 오늘은 어차피 워낙 새벽이니 괜찮겠다 싶어 대문을 여는데, 그렇게도 피해 다녔던 택이가 평상에 앉아 있었다.

 

"...택아.....!!"

 

"출근하냐?"

 

거의 일주일만에 보는 택이였다. 덕선이 당황해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어버버하는 사이, 택이는 덕선의 앞으로 걸어왔다. 택이는 아예 작정하고 기다린 듯, 추리닝이 아닌 청바지에 후드티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택이의 눈이 빨갰다. 밤이라도 샌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잠을 못 잔 건가 싶어 짠해지는 덕선이었다.

 

", 이제 몸은 괜찮아?"

 

"? ....."

 

택이가 묻는 질문에 겨우 쥐어짜내어 대답을 해보지만, 새벽 공기 사이로 덕선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 흩어졌다.

 

"....그 날....기원 회식 있었던 날...."

 

덕선이 메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나 흔들리고 있는 눈빛은 감출 수가 없었다.

 

"덕선아, , 혹시 기억...?"

 

덕선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이라고 했다. 택이가 왜 그 날을 묻고 있는 것인지, 왜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택이의 붉은 입술...이었다. 덕선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던 그 장면에서 재생되는 것은 오로지 택이의 입술, 그리고 택이의 입술이 주던 말랑하고 촉촉했던 감촉이었다. 마치 재현이라도 되는 것처럼, 덕선의 입술이 전기가 지나가는 것처럼 짜릿했다.

 

"....?"

 

택이가 다시 한 번 덕선을 부르고서야 덕선은 정신을 차렸다. 미쳤구나, 미쳤어.

 

"? ...아니....기억 안 나. 내가 술을 많이 마셔가지고...."

 

"........?"

 

택의 목소리가 마치 실망이라도 한 것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내가 뭐, 실수한 거 아니지?"

 

"............."

 

덕선의 목소리가 떨리면서 공허하게 뿌려지지만, 택은 그저 덕선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택아......"

 

"... ...없어."

 

뭔가 단호한 듯한,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내뱉는 택의 말이 너무나 이상했다. 그러나 더 이상했던 건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진 택이의 행동이었다.

 

", ...뭐해?"

 

택의 손이 어느 새 덕선의 캐리어를 가져가버렸다.

 

"같이 가자."

 

", 니가 왜 가?"

 

"그냥....."

 

이상했다. 택의 행동도, 택의 말도, 그리고 지금 택의 눈빛도, 어느 것 하나 이상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러나 덕선은 정작 택을 말릴 수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캐리어를 끌고 가는, 자신의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택이를 들어가라고, 이건 내 거라고, 그런 말들을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덕선은 택이와 함께 걷고 있는 이 길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리로는 수천 가지의 생각들이 떠다녔다. 정말일까 아닐까, 꿈일까 아닐까... 정말 미칠 것 같지만, 한 마디도 건넬 수가 없었다. 택은 그저 덕선의 곁에서 나란히 걸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더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 대국은 없어?"

 

"내일이랑 모레..."

 

"....."

 

억지로 꺼낸 대국 얘기도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로 이 어색함을, 이 긴장감을 극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빨리 정류장에 도착해라, 그것만 죽어라고 빌고 있었다. 오늘따라 정류장은 얼마나 긴지,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정류장까지 몇 시간이고 걸어온 듯했다. 저기 정류장이 보이자, 덕선이 겨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덕선아..."

 

"..?"

 

그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그저 대답을 했을 뿐인데, 이토록 자신의 마음이 왜 이리도 떨리는지 덕선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이번 주 토요일엔 올 수 있어?"

 

". 당연하지. 니 생일인데..."

 

그 말에 그제야 택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막 햇살이 뿌려지는 새벽에 그 미소가 빛이 났다. 그 맑은 미소 앞에서 덕선은 얼굴을 붉혔다. 그 홍조가 덕선을 더 여성스럽게 보이게 했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와 트렌치 코트 사이로 날씬하게 떨어지는 그녀의 몸매가 홍조를 띤 얼굴을 더 빛나게 만들었다. 정작 덕선은 알지 못했다. 정류장까지 내려오는 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덕선을 돌아봤는지, 지금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도 얼마나 덕선을 흘깃거리며 보고 있는지, 그래서 택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정작 덕선만 모르고 있었다. 그 모든 걸 눈치 채기에는 덕선의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 저기 버스 왔다."

 

덕선이 타는 버스가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나 갈게. 너 사람들한테 이런 모습 들키면 안 돼. 너 유명인이야. 알지?"

 

캐리어를 택이에게서 받아 가는데, 그 순간 택이 덕선의 손목을 잡았다. 이젠 정말로 덕선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진짜...얘는 새벽부터 왜 이러는 건지..... 정말 지진이라도 날 것 같은 심장을 겨우 누르며, 택이를 쳐다보았다.

 

"덕선아..."

 

"?"

 

택의 울대가 순간 울렁였다. 마치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택의 눈빛은 더욱더 검게 짙어졌다. 택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나 너한테.....할 말 있어."

 

"......?"

 

이제 정말 덕선의 심장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심장은 덕선의 가슴을 넘어서서 이젠 온 몸을 두드려댔다.

 

"토요일날 보자. 너 돌아오면, 그 때 얘기할게. 너한테 줄 것도 있고....."

 

"........"

 

덕선은 그저 정신없이 대답을 건네며, 때마침 와준 버스에 올랐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좌석에 앉고 보니, 정류장 쪽이었다. 반대편으로 앉아야 됐었는데, , 내가 미쳐..... 택은 그런 덕선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택의 시선이 온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그것이 얼마나 숨을 막히게 하고, 얼마나 심장을 뛰게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게 하는지, 아마 택은 모를 것이다.

 

뭐지, 뭐지...진짜면 어떡하지.....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용기를 내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덕선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 검은 눈과 마주쳤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심연의 바다와도 같이 깊은 눈앞에서, 오롯이 덕선만을 담고 있는 그 검은 눈앞에서 덕선은 피하지도 못한 채, 쿵쿵 뛰고 있는, 아니 이제 질주를 하고 있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쿵쿵쿵쿵.....

 

그래도 버스 안 모든 사람이 들을 것처럼 덕선의 심장은 뛰어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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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어.면> 1회~11회까지는 작성자 '그랑' / 12회부터는 '그랑블루'

 

* 그리고 아래는 <9.어.면>의 시간+%8의 시간들 (추후 회차가 진행되면 아래 항목은 계속 추가될 수 있음)

 

6월 2일(목) : <9.어.면> 4회, 5회 : 택과 만난 싱가폴 라인(우진 만나기 1달 전으로 기억)
                   택과 비행기 썸. 한의원 썸. 전자회사 사장 딸 만난다는 얘기. 완전 마음을 접는 덕선/ 그 이후 선을 접는 택


6월 30일(목) : 덕선 런던 비행


7월 1일(금) : <9.어.면> 3회 : 덕선과 우진의 만남.
                   (런던으로 가는 중. 우진은 봤지만, 덕선이 기억 못하므로, 덕선이 자신을 기억하는 순간부터.) -> 100일 10월 8일


7월 4일(월) : 한국 도착


7월 6일(수) : <9.어.면> 8회 : 우진에게 처음으로 삐삐 옴


7월 8일(금) : <9.어.면> 8회 : 우진과 첫 만남


8월 24일(수) : <9.어.면> 1,2회 : 친구들 모임. 덕선, 우진과 2달 아직 안 됐다고 함. 택에게 남친과 같이 보자고 시전.


8월 25일(목) : <9.어.면> 13회 : 택의 유일한 패배(유현욱 9단에게 왕위전 패)


9월 1일(목) : <9.어.면> 6,7,8회 : 우진과의 만남 두 달 째. 자현 만남, 삐삐 배경음악 바꿈. 택과 선우 술. / 골목으로 온 우진 / 택과 덕선 : 행복해 시전


9월 7일(수) : <9.어.면> 9,10,11,12회 : 덕선에게 전화 온 동룡 / 동룡 가게 고기 / 우진과 삼자대면 / 택이의 손잡기 시전


9월 14일(수) : <9.어.면> 12회 : 덕선 우진의 키스 피함, 울면서 들어가는 덕선/ 이를 보는 택 / 택과 우진의 대화


9월 15일(목) ~ 9월 28일(수) : <9.어.면> 13회 : 덕선, 2주간 비행 스케줄 
중국(9/15(목)~9/17(토)), 하루 쉬고(일) 쉬고,

남미 상파울루(9월 19일(월) 밤 12시~25일(일) 오전), 26일(월) 하루 쉬고

동경(27일(화)~28일(수)에 돌아옴)


9월 17일(토) : 덕선 중국 비행 후 집에 옴. 덕선 생일 / 집에서 생일함.


9월 18일(일) : <9.어.면> 14회 : 우진 만남 / 우진과 이별
(9월 19일(월)~21(수) : 추석 연휴) 9/20(화) 추석
(9월 19일(월) 밤 12시 ~ 25일(일) 오전) 덕선 남미 상파울루 노선
(9월 27일(화)~28일(수)) 덕선 동경 노선


9월 28일(수) : <9.어.면> 14회 : 탑언니와 함께 기원 회식 / 택과 윤정아 2단 /  덕선 폭음 / 취중키스


9월 29일(목) : 본원 이전


10월 1일(토) : <9.어.면> 15회 : 덕선 소개팅(탑언니 소개) / 데려다 줄 때, 선우, 동룡, 정환(토요일에 당일로 올라왔다 내려감) 봄.

 

10월 4일(화) : <9.어.면> 15회 : 덕선 비행 나가다가 새벽에 택과 마주침 / 정류장 / 택이 할 말 있다, 생일 때 보자 시전


10월 8일(토) : 택이 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