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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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상플에 나오는 프로 기사는 실제 프로 기사 이름을 약간씩 변형하여 사용했음. (유ㅊㅎ 기사, 윤ㅇㅅ 기사)
바둑 대회 우승 및 바둑 두는 스타일, 실제 기사 내용을 활용하여 적었음. 실제 택이가 진 경기, 1회 여류 대회 우승 등은 모두 사실임.
그러나 회식 장면에 쓰인 내용은 위의 실제 두 명의 기사와는 무관한 사항임을 밝힘. 일화는 모티프로 따왔고, 이름은 변형하였음.
제13장 질투
그 사람이 어디가 좋은지 물어보고 싶었다.
어려서 좋은지, 같은 일을 해서 좋은지, 예뼈서 좋은지.
그러나 묻지 못한다.
그리고 그저 짐작한다.
예쁘구나, 어리구나, 비슷하겠구나.
너의 세계와 그 사람의 세계는
그토록 공통분모가 많은 거구나.
너의 사랑은 이토록 오래, 깊게, 고요히
그렇게 쌓여만 갔겠구나.
그런 니가 아프고, 그런 내가 아프다, 나는...
1
2주가 또 그렇게 덜컥 흘러버렸다. 9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덕선은 그 사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중국 스케줄을 소화하고 하루를 쉰 후, 바로 남미 노선을 탔다. 그 사이 우진을 잠깐 만났고, 그 후 상파울루로 떠났다. 남미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하루를 쉬고는 또 다시 바로 동경을 다녀왔다.
그러다 보니 다들 왜 이러느냐고, 미리 스케줄 잡아 놓고 나중에 연가라도 왕창 내려고 그러느냐고, 동기들이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야, 너 이러다 국수 먹여주는 거 아니야 등등. 그 말에 덕선은 그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일축해버렸지만. 동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웬만하면 피하고 싶어 하는 노선 1위, 2년 전부터 취항을 시작한 남미 노선을 스스로 자원해서 가겠다고 하질 않나, 스트레이트로 비행을 잡겠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게다가 공항에서 덕선과 우진이 함께 있는 것을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온갖 루머를 양산하면서 그렇게 스트레이트로 달리던 덕선은 또다시 비행을 잡으러 스케줄을 조정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누군가가 덕선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언니."
"너 미쳤지."
"네?"
"너 일독 올랐니? 왜 그래? 왜 그렇게 비행을 무리하게 잡아?"
"그냥 가을도 되고, 뭐 날도 좋은데 여행하는 기분으로 일하는 거예요."
덕선은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이지만, 탑 언니는 뭔가 이상한지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유 대리님을 소개시켜준 이후, 탑 언니와는 친한 언니 동생처럼 지내게 되었다. 남들이 있을 때는 덕선 씨라고 부르지만, 둘만 있을 때는 친한 동생에게 하듯 편하게 대했다.
"그래도 오늘 저녁은 시간 되지?"
"무슨 일 있으세요?"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네? 우리 팀 회식이라도 해요?"
"음....우리 팀은 아니지만, 뭐 비슷은 해."
말할 듯 말 듯 뭔가 머뭇대는 탑 언니가 진짜 이상했다.
"에이, 무슨 일인데요?"
"사실은 우리 유람 씨....."
유람이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탑 언니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올랐다. 아, 사랑을 하는구나, 라는 마음이 들 만큼. 이래서 감출 수 없는 거구나 싶은.
"유 대리님이 왜요?"
"이제 유 대리님 아니야."
"네?"
"유 과장님이지."
"와!!! 완전 축하드려요. 승진하시는구나. 축하해요. 언니."
"에휴...유람 씨, 진짜 오래 기다렸어.
사실 일반 회사 같으면 벌써 승진하고도 남았지. 벌써 5년이 넘었잖아."
"기원이 좀.... 승진하기 힘든 구조잖아요."
"내 말이. 다행히 이번에 같은 부서 과장님이 지금 있는 관철동에 남기로 하시면서 자리가 난 거야.
알지? 한.국.기.원 본원 이전하는 거?"
덕선은 금시초문이라 고개를 저었다.
"최택 9단이랑 친구잖아. 얘기 못 들었어?"
"서로 바빠서....잘 못 봐요."
"그래?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하네. 하기야, 너 남미 노선까지 탔는데 어떻게 보겠니.
본원, 어제 이사 끝냈대. 개원일은 내일이라더라."
"어디로 가요?"
"홍익동."
"그럼, 다른 분들도 전부 옮기시는 거예요?"
"음....나도 잘은 모르는데,
이 부장님하고 우리 유람 씨는 본원 이전하는 곳으로 가시는 거고,
아마 대국 자체를 본원에서 하니까, 연구생들은 모르겠지만, 프로기사들은 옮기지 않을까?"
"아....네......"
홍익동이라는 말에 덕선의 머리로 떠오른 건 쌍문동에서의 거리였다. 종로보다는 성북구 쪽이 아주 조금 더 가깝지 않을까, 택이가 운전을 조금 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복잡했던 종로보다는 그래도 나을 듯해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래도 네임밸류 빵빵한 한.국.기.원이잖아요. 그것도 본원인데.
세계 최강 기원에서 과장님 되신 거 완전 축하드려요."
"뭐, 내가 된 건가. 유람 씨가 된 거지."
"어쨌든요. 그럼, 이제 진짜 두 분 곧 국수를....?"
"얘. 너무 넘겨짚지 마.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도 참 잘 됐다 싶었다. 긴가민가 하며 소개해 준 두 사람이 이렇게 좋은 만남을 계속 이어온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축하 파티?"
"응. 기원에서 과장 승진 회식한다는데 나도 오라는 거야. 근데....."
"근데요?"
"나 혼자 가기가 뻘줌해서....."
"다 아시는 분들이잖아요. 부장님도 아실 거고, 다른 분들도 오며 가며 안면은 있으신 분들인데......"
"그래도 공식 회식 자린데 나 혼자 앉아 있기가 좀 그래서......."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모두 기원 사람인데, 아무리 여친이라지만, 외부 사람인 자신 혼자 그 자리에 끼여 있기가 뻘줌하기도 하고 계면쩍기도 하고 그런 듯했다.
"같이 가 드릴까요?"
탑 언니는 덕선의 이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줄래? 고맙다, 덕선아. 역시 의리하면 성덕선이지.
지금 바로 정리하고 가자."
아니나 다를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자며 독촉해댔다. 그렇게 탑 언니와 함께 정리를 하고 공항 밖으로 나오는데 한 남자가 그들 앞을 막아선다. 처음에는 탑 언니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 그저 서 있었는데, 그것도 아닌 듯했다.
"저......."
"네. 무슨 일이시죠? 탑승 관련은 데스크로 가셔서 말씀하셔야......."
탑 언니가 뭐라고 설명했지만, 남자는 머뭇대더니 덕선의 앞으로 좀 더 가까이 왔다. 뭔가 싶어 바라보는 덕선의 눈을 남자는 결심이 서린 눈빛으로 마주하며 입을 뗐다.
"동경에서 오는 3시 30분발 대한항공 비행기에 계셨었죠?"
"네? 네."
"저도 같은 비행기를 탔었는데요."
뭐지 싶은 순간, 남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혹시 퇴근하시는 거면, 커피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덕선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탑 언니가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지금 시간이 안 됩니다.
그리고 비행 이후에 이렇게 사적으로 말씀하시는 건 불편합니다."
"아, 그럼 성덕선 씨, 삐삐 번호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언제 이름까지 안 건지, 서빙할 때 명찰을 봤던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내 규율이 있어서.......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덕선은 예의 바르지만, 단호하게 거절한 후, 도리어 탑 언니를 이끌고 택시 승강장으로 걸어갔다.
"오올, 성덕선. 단호한데? 너 우진 씨 있으니까 확실하게 철벽치는구나?"
"에이...그런 거 아니에요."
"여튼, 우진 씨 진짜 불안하겠다.
너 도대체 어떻게 하길래 비행 끝날 때마다 남자들이 저리 난리냐?
너 무슨 약이라도 쓰니?"
"무슨요. 안 그래요."
"뭐야? 난리 치는 건 맞지만, 약은 안 쓴다?"
"아유, 언니....."
탑 언니는 꽤 단호한 덕선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덕선을 놀려대기만 했다.
2
여승무원. 정갈하게 올린 머리와 부드러운 목소리, 하루에 수백 번도 더 연습해서 만든 비행형 미소까지, 남자들의 로망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회식 장소인 고깃집에 도착해서 탑 언니와 함께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오는 덕선을 향해 기원 식구들의 눈빛이 몰려들었다.
길게 붙어 있는 상들 사이로 유 대리, 아니 유 과장이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적어도 탑 언니가 누구인지 아는 까닭이었다. 간간히 여자 연구원들도 보였다.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네.... 여자 연구원들은 훨씬 어리고, 훨씬 예쁘고, 또 훨씬 반짝였다. 적어도 덕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관철동에서 하는 마지막 회식 자리였다. 유 대리님 아니 유 과장님의 승진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관철동의 추억을 정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기원으로서는 나름 역사적인 자리인데 덕선은 자신이 끼어도 되는 자리인지 민망했다. 주위를 슬쩍 둘러봐도 택이는 없었다. 회식을 좋아하지 않으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덕선은 택이가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어, 최택 9단님은 오늘 안 오세요?"
나름 덕선을 데려올 수 있었던 이유가 최택 9단의 친구이기 때문이었는데, 정작 최택 9단이 없자, 탑 언니 입장에서도 덕선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못 오실 것 같긴 한데...... 저한테 따로 봉투도 두둑이 챙겨주셨답니다."
"와, 최택 9단님, 그런 것도 주실 줄 아세요?"
"은서 씨가 몰라서 그렇지, 최 사범님, 마음 씀씀이도, 봉투도 태산이세요."
덕선아, 어쩌니? 하며 미안해 하는 탑 언니에게 덕선은 괜찮다며 그저 웃어주었다. 덕선은 탑 언니 옆에서 그저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하기만 했다. 덕선 스스로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알지 못했지만, 덕선 주변에서는 은근한 자리쟁탈전이 있었다. 유 대리님, 아니 유 과장님께 애인을 소개해준 분으로 통했지만, 아주 오래된 몇몇은 최 사범님의 아주 오래된 소꿉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이곳에 참석도 하지 않은 최 사범님의 눈치를 일부러 사서 보며, 다른 이들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최 사범님, 진짜 안 오세요?"
유 과장에게 여자 연구생 하나가 쪼르르 곁으로 와서는 질문을 건넸다.
"아마 그러실 거야. 원래 회식 안 오시는 거 알잖아.
나한테도 따로 축하해 주셨고, 금일봉도 맡기셨어."
"그래도 관철동 마지막 추억인데 안 오시면 진짜 서운해요."
질문을 던졌던 여자 연구생의 말에 곁에 있던 기원 사람들이 다들 웅성웅성댔다.
"솔직히 최근 몇 년 간 최 사범님 기록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전 사실 본원 옮긴다니까 마음이 정말 이상해요."
하나 둘, 그런 마음들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최택 때문에 바둑에 입문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연구생까지 올라와 직접 최택의 대국을 지켜보며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들에게 관철동은 바로 최택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 최택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신의 영역이었다. 그런 신의 영역을 기적처럼 엿볼 수 있었던 곳이 관철동 본원이었고, 그래서 이 본원에 대한 애착은 그들에겐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최 사범님, 진짜 이곳에서 몇 년 동안 뼈를 묻으셨는데......"
한 명의 말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들의 전적인 양, 택의 기록 행진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기록의 향연들이었다. 89년 연간 111국 최다대국 신기록, 작년 한 해 90승으로 역대 연간 최다승 신기록, 올 한 해만 해도 국수, 명인, 최고위, 기왕, 패왕, 국기, BC 카드, 기성, 배달왕, SBS, KBS 우승, 국내 16개 기전 한 차례씩 모두 석권한 사이클링히트 달성, 13관왕으로 통산 최다관왕, 특히 봄에 치렀던 기왕전 우승으로 국내 전 타이틀 1회 이상 등정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들의 입에서 하나하나 뱉어지는 기록들은 마치 자신들의 기록인 양, 그렇게 뿌듯함과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전부 최택 팬클럽 회원인가 싶을 정도로, 택이가 89년부터 이루어왔던 어마어마한 기록들을 그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기억하며 마치 배틀하듯이 꺼내놓고 있었다. 웃기는 건, 그걸 듣고 있는 덕선 스스로도 가슴 저 안에서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밀려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덕선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최택빠였다. 그것을 뼈저리게 또 한 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올 해 이미 13관왕으로 최다관왕 신기록 세우셨지만....그래도....좀 아깝다. 마지막 하나."
"나도 나도. 내가 잠을 못 잤잖아. 진짜 아까워 죽을 뻔. 내가 다 억울하더라."
"8월에 무슨 일 있으셨냐. 진짜 그 전까지 전적 장난 아니셨는데....
14관왕 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잡히시다니....
진짜 말이 안 되는 상황 아니었냐?"
"그러게 말이다. 그 날 봤지?
대국 당일에 잠 한숨도 못 주무시고 나오신 것 같던데.
거의 쓰러지시는 줄 알았잖아."
덕선 맞은편 쪽에 앉은 연구생들은 건너편 상에 앉은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그 소리를 듣던 유 과장이 덕선에게 물었다.
"근데 덕선 양. 나도 사실 좀 궁금해서....."
"네? 뭐가요?"
"저번 달에 동네 친구들끼리 모인 적 있죠?"
"네? 네...두어 번 정도....."
"대국이 8월 25일이니까 전날 그러니까 24일날 모였었죠? 수요일이었을 건데....."
24일? 아...그날. 사천에서 장기 훈련을 마치고 오랜만에 휴가로 올라온 정팔이도 볼겸, 선우와 덕선 자신까지 아슬아슬하게 오프가 맞춰지면서 부랴부랴 만났던 날이었다.
"아. 네. 오랜만에 다들 시간이 돼서 모였었어요."
"그러니까요. 그 날 사범님 친구분들 만나신다고 일찍 가셨었거든요."
"네. 근데 왜....?"
갑자기 왜 그 이야길 하나 싶어서 유 과장을 쳐다보니, 유 과장이 조금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왔다.
"혹시 그 날 무슨 일 있었어요?"
앞에서 속닥거리던 연구원들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뭐....별 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그냥 술 마시고....그랬어요."
"그럼, 술기운 때문이셨나....."
그러고 보니 그 날 술을 꽤 마신 것 같기도 했다.
"대국날, 택이, 많이 안 좋았어요?"
덕선의 물음에 유 과장은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 그날 아침에 무슨 일 있으신 줄 알았어요.
한숨도 못 주무시고, 완전히 눈도 충혈되셔서 어휴...
여튼 대국을 치르신 게 기적입니다.
진짜 무슨 사단이 나는 줄 알고....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그날, 사실 전 사범님 실려가실까봐.....어휴....."
유 과장님은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시는 듯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그 때 그 날 뭐였더라.
그 날 별 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저 아이들은 여전히 자신을 놀렸고, 선우는 심지어 팜므파탈이라고까지 했었다. 동룡이 100일 넘길 수 있냐며 건배를 제안했고, 2달 조금 못 되었다는 얘기를 처음으로 애들한테 밝혔던 날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택이는 그날 술을 꽤 마셨다. 선우가 술 마신 날은 절대 수면제 먹지 말라는 얘기도 했었고..... 별 다른 건 없었는데.... 술 때문에 수면제를 못 먹어서 밤을 샜나 싶기도 했다. 잠을 못 자서 컨디션이 엉망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즈음, 덕선의 뇌리로 바로 자신이 던졌던 음성 하나가 재생되었다.
"택아, 얼굴 좀 보고 살자.”
"나중에, 내 남자친구랑 같이 한번 보든가......”
덕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아니겠지.....
덕선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앞에 놓인 술잔을 그대로 들이켰다.
3
사실 덕선이 유 과장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덕선의 앞자리는 은근한 견제와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스물스물 덕선의 곁으로 오려고 이리저리 대거리를 하는 사이, 결국 덕선의 앞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덕선이 앉아 있던 줄보다 한 칸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덕선도 신문에서 봤던 얼마 전, 택이를 이긴 인물이었다. 그것 때문에 바둑기사 인기투표에서 택이를 위협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다.
기사 제목도 아주 자극적이었다. 여름의 남자가 가을의 남자를 이겼다는 제목이었다. 덕선은 뭐 이따위가 다 있냐며 신문을 북북 찢어버렸지만, 그 자극적이던 기사 내용은 아주 오래도록 덕선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게다가 최택빠인 자현조차 멋있다고 했을 정도니, 괜히 신경 쓰이기도 했었다. 그래도 최택인데.... 싶었지만, 이런 식의 기사로 비교질을 하는 것 자체가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아까 유 과장이 말씀하셨던 바로 그 날 대국의 우승을 가져간 분인 듯했다.
어쨌든 기원생들은 그가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비켜주며 옆으로 밀려났다. 유 과장님께 인사하러 일부러 온 듯했다.
"축하합니다. 유 과장님."
"아이고 감사합니다. 유 사범님."
유 사범이라는 그 사람은 택이보다는 나이가 있는 것 같았다.
"어떡합니까. 이 좋은 날. 과장님으로 승진하신 날, 하필이면 저희 집 제사라...."
"아, 가보셔야 되는군요."
"예. 진짜 죄송합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때 카운터에서 유 과장님을 찾는 전화가 오면서, 둘의 대화는 끊어졌다. 그 대화를 들으며, 유 사범이라는 사람은 곧 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사람은 덕선의 맞은편에 여전히 앉아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그 남자가 덕선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뭔가 뻘줌해진 덕선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하자, 그 남자도 목례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유현욱이라고 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남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덕선의 이름을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성덕선입니다. 오늘....유 과장님 승진 소식 듣고 축하드리러 언니랑 같이 왔어요."
덕선이 민망해 하며 자신의 소개를 하자, 남자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진짜 미인이시네요."
"네? 아......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놓고 미인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승무원분들, 아름다우신 분들만 뽑는 건 알았지만, 진짜 빛이 나십니다."
너무 직접적으로 하는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어 당황하는 사이, 갑자기 유 과장이 일어섰다.
"아니, 사범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그곳에 앉아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단 한 곳으로 모였다. 그곳에는 택이가 이미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시끄럽던 좌중이 일시에 고요해졌다. 조선시대 임금 행차라도 하는 것처럼, 거기에 앉아 있던 모두가 일어섰다. 최택 9단을 향한 그들의 마음을 엿본 것도 같았다. 마치 택이가 납셔주시는 것만으로도 흥감에 넘치는 분위기랄까. 존경을 넘어 경외심을 느끼는 듯도 했다.
덕선은 택이가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모두가 일어선 가운데 유일하게 앉아 있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모두 일어서서 다행이다 싶었다. 적어도 자신이 있다는 건 감추어질 테니.... 그러나 그것은 덕선의 착각이었다. 택이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덕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저 앞에서부터 길이 열리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옆으로 비키면서 길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의 끝이 덕선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그렇게 택은 그 길을 따라 덕선의 바로 앞까지 왔다. 그러고는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인 것처럼 덕선의 옆에 앉았다.
"언제 왔어?"
"어? 어.....아까....."
정작 택의 물음은 고요했다. 그리고 대답하는 덕선의 목소리는 떨렸다. 유 과장은 자리를 정리하며 택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그 사이 연구원들의 수근거림이 마치 메아리처럼 떠다녔다. 그제야 모른 척하고 있던, 연구원들이 귀띔을 해주고 있었다. 왜 사범님이 저 여자 옆에 앉느냐, 저 여자는 누구냐, 사범님이 언제부터 승무원 취향인 거냐, 다 필요 없다, 외모가 최고인 더러운 세상, 행복이 외모순은 아니잖아요, 어쩌고 하는 사이, 덕선이 아주 오랜 동네 친구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사자인 택은 조용히, 그러나 좌중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변을 향해 목례를 했다.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왔네."
"어...."
이번에는 덕선이 던진 질문에 택이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너, 회식 자리 싫어하잖아."
덕선이 이상하다는 듯, 택이를 바라보자, 택은 대답 대신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의 바닥까지 비워냈다.
4
프런트에서 유람 과장님께 전화가 왔다며 유 과장을 찾았다. 유람 과장이라는 말에 유 과장은 어차피 기원 사람들은 여기 다 있는데 누굴까 싶어 전화를 바꿨다.
"유 과장님......"
그는 최택 9단이었다.
"아, 최 사범님. 무슨 일로....?"
"아, 저 집에 가기 전에 인사드리려고 전화했어요."
"아이고, 사범님도. 아까 인사 다 하시고 금일봉까지 주시시 않으셨어요."
"그래도 같이 참석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승진, 축하드립니다."
"뭘 그런 말씀을..... 다 알고 있으니, 절~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솔직히 기원 사람 다 모이는데, 최 사범님 힘드신 거 당연한 겁니다.
다들 최 사범님을 신앙처럼 받드니...이건 뭐 신경 쓰이실 수밖에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참, 내일은 홍익동으로 출근하는 거 아시죠? 관철동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지도는 아까 그려드린 거 보셨죠? 꼭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사실은 내일 길을 못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택시 타고 가려구요."
"예? 아 그럼 오늘 차 안 가지고 오셨어요?"
"예."
"진~~짜 잘 생각하셨어요. 한동안은 익숙해지실 때까지 운전 직접 안 하시는 게 맞습니다."
"예.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아, 참, 맞다. 여기 덕선 양 와 있어요. 제 여자 친구랑 같...."
"예? 덕선이가요?"
"아, 진짜 모르셨구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린 건...."
"지금 바로 갈게요."
"예? 사범님? 사범님!"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갑자기 오신다고 하니 무슨 상황인가 싶기도 했다. 멍한 상태에서 수화기를 놓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이곳 장소는 아시나 싶어 걱정이 되려는 찰나, 최 사범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신 거였다. 아무리 기원 옆이지만, 그래도 전화 끊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들어오실 줄은 몰랐다. 달리셨나? 사범님과 진짜 어울리지 않는데 싶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나타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냥 달린 것이 아니라 전력 질주일 때 가능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기원과 가까워도 길도 건너고 하려면 사범님 평상시 걸음으로는 최소 10분인데, 5분은 뭔가, 진짜 전화 끊고 앉는 사이에 도착하신 것이다. 덕선 양의 옆에 앉은 최 사범님의 이마에는 작은 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5
유현욱은 여전히 덕선의 맞은편에 앉아 최택 9단과 덕선의 관계 파악에 주력하고 있었다.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덕선의 얼굴이 어느 정도 낯익다는 면에서 예전에 최 사범님의 친구로 왔던 그 사람이라는 걸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제야 스스럼없는 두 사람의 대화도, 생전 처음 보는 최 사범님의 태도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덕선 씨가 최 사범님, 친구분이셨군요."
"네? 아....네."
뭔가 말을 더 이으려는 찰나,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유 사범의 삐삐였다. 사실은 아까부터 확인하는 걸로 봐서는 계속 오고 있었던 듯했다. 난감해 하던 유 사범은 일어서려다가 뭔가 결심한 눈빛으로 다시 앉았다.
"저, 덕선 씨."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덕선보다도 택이었다. 택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유 사범이 약간은 계면쩍은 듯 목을 가다듬었다.
"아, 최 사범님, 제가 방금 덕선 씨와 통성명을 했습니다."
그 말에도 택의 눈은 여전히 유 사범을 향하고 있었다.
"제가 지금 나가봐야 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어보겠습니다."
기사에서 본 대로, 굉장히 저돌적인 스타일인 것 같았다.
"애인....있으십니까?"
오늘 처음 본 사람이, 그것도 택이가 곁에 있는데 그런 질문을 던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약간 호감을 보이다 가겠거니 했는데, 게다가 바로 곁에 택이가 있는데 설마 대놓고 수작을 걸겠나 싶었는데, 이 남자는 그가 두는 바둑처럼 적극적인 성격인 듯했다.
"어머, 유 사범님. 이를 어쩌나...... 덕선이 애인 있어요. "
정작 대답을 대신 해 준 건, 탑 언니였다. 그 대답에 유 사범의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대 툴툴 털더니 더 기겁할 말을 꺼내놓았다.
"삐삐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덕선이 애인 있다니까요.
엄청 멋있고, 젠틀하고, 완전 장난 아닌 애인 있어요."
은서는 자신이 더 황당하다는 듯, 우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언니......"
덕선이 택의 눈치를 보며, 은서를 말리는데, 그 남자는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라며 한 번 더 덕선을 향해 자신의 호감을 표현했다. 덕선이 정말 이젠 자신이 한 마디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 순간, 택이 술잔을 한 번에 비우며, 탁, 하고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곁에 있던 연구원들도, 앞에 있던 유 사범도 얼음이 되었다. 원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최택 9단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감정을 알 수 없는 그 표정이 더 싸늘하고도 두렵게 느껴졌다. 누가 보더라도 최택 9단이 지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그 감정이 없는 돌부처가 지금 감정이라는 걸 보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좌중이 고요해졌다.
"아, 죄송합니다. 최 사범님 친구분이신데.....
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분명 나이가 많아 보이는 유 사범이 택에게 고개를 숙이며 깍듯이 사과를 했다. 보통은 괜찮다고, 아니라고 할 택이였지만, 정작 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쫄릴 만큼, 분위기에 압도될 만큼, 주변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덕선 씨, 오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들이 대서 죄송합니다."
그 말에 덕선은 어설프게 웃어 보이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곁에 있던 은서가 덕선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야, 덕선아, 너 완전 대.박.이다. 요즘 왜 이러니?
아까도 승객이 와서 번호 달라고 해, 이번에는 유 사범이 달라고 해.
그리고 유 사범, 최택 9단만큼은 안 되어도, 인기 장난 아니야.
바.둑.계의 3대 천왕이랜다."
"네? 3대 천왕요?"
"어...조 사범님, 서 사범님, 그리고 아까 그 유 사범."
"그럼, 택이는요?"
"야, 장난하냐? 최 사범님은 천상계지. 인간계가 아니잖아."
"네?"
"신이지, 신. 감히 인간계에서 거론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존재."
아마 친구들과 같이 들었다면, 다들 등.신 말하는 거지 하면서 마음껏 비웃었을 텐데,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곳 사람들은 모두 택이는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어쨌든, 덕선아, 너 삐삐 번호 함부로 주지 마. 특히 승객들한테는..... "
"안 줘요. 걱정 마세요. 언니."
"우진 씨는 다행히 괜찮은 사람이지만, 승객 중에 이상한 사람 많아.
그래도 조심해야 돼."
"저 이제 승객들은 안 만나요."
그 말에 덕선의 곁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조용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택이가 순간 잔을 든 채로 멈칫하는 것 같았다. 덕선이 이상해서 택이를 바라보자, 그제야 덕선의 시선을 의식한 듯 잔을 입에 갖다 대었다.
"그래, 안 만나겠지. 우진 씨로 게임 오버됐잖아."
마치 뒷북처럼 은서의 말이 두 사람의 애매한 시선 사이로 끼어들었다.
6
기원 사람들은 왁자지껄 마셔대는 것 같아도, 뭔가 자신들만의 위계질서 같은 것이 있었다. 나이와는 상관없는 그들 세계만의 상하의 질서가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강요나 권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진정한 권위에 대한 자발적인 존경이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은 바로 택이었다. 그 곁에 앉은 덕선은 그 존경과 선망과 거기에 질투까지 더해진 수많은 시선들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덕선아, 근데 여자 기사들도 많은 것 같지 않아?"
덕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덕선이 느끼고 있던 것을, 탑 언니도 느끼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남자친구 회사에 젊고 예쁜 여자 기사들이 늘어난다는데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까도 택이가 안 오는지에 대해서 다들 유람에게 와서 물어보니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봐, 저기 윤정아 기사도 있잖아. 윤 기사도 덕선이 너보다 어릴 걸?"
"네. 2살 어려요."
"어, 자기도 아는구나. 하기야 요즘 좀 기사에 나왔니.
맨날 최택 9단과 엮어대는데 누구라도 알긴 하겠다.
어머, 어머, 윤 기사 이쪽으로 온다, 얘. 최 사범님께 오는 거 아니야?"
윤정아 2단. 요즘 여자 기사들 중에 단연 톱으로 기사에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탑 언니의 말처럼, 윤정아 2단은 택이와 연계해서 자꾸만 기사가 나오다보니, 덕선의 뇌리에는 매우 상세하게 각인된 인물이었다. 올해 시작된 여류기사 전에서 윤정아 2단이 우승을 차지하면서 1회 우승자로 언론에 계속해서 공개되고 있었다. 게다가 어릴 때 독일에 살다가 와서 자유로운 마인드에 예쁘기까지 하니 대중들의 흥미를 끌기에 아주 적합했다.
92년 일본에서 고바야시 이즈미(小林泉美) 5단이 여류 명인전에서 우승했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울먹였던 일화는 일본 바둑팬뿐만 아니라 한국 바둑팬들에게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냉정한, 감정이 없는 듯한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훨씬 감정적으로 바둑의 인기를 몰아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택의 인기로 여자 연구원들이 기원으로 찾아오기 시작하고, 일본에서 적당한 때에 감성적 영역이 터져주면서 94년에 드디어 1회 여류기사전이 개최된 것이다. 1회 우승자인 윤정아 2단은 한국의 고바야시 이즈미라며 언론이 대서특필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일화를 또 택이에게 붙이면서 이상한 형태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덕선을 며칠 간 식음을 전폐하게 만든 기사는 바로 이거였다. 종로에서 이루어진 가상 설문조사로, '만약 최택 9단이 결혼을 한다면'에 대한 투표 결과였다. 거기에는 한국의 유명 여자 연예인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거론되었지만, 그 수많은 사람을 제치고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스티커를 받은 사람은 윤정아 2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처음으로 개최된 제1회 프로여류 국수전, 제1회 EBS배 여류 프로기전까지 우승을 싹쓸이 했으니 미래의 여자 최택으로 언급되기까지 했다. 물론 그 기사를 쓴 기자는 최택과 비교했다는 것만으로 신문사의 전화가 마비될 만큼, 엄청난 몰매를 맞기도 했다.
심지어 윤정아 2단에게 결과를 알려주며 심정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 때 윤정아는 영광이라고 했었다. 자신이 연구원이 되고 바둑에 입문한 이유는 오로지 최 사범님을 만나기 위함이었다는 말과 함께. 그 뒤에 시끄러웠던 기사들, 첫 바둑 커플이 탄생하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에 덕선은 며칠 앓아눕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지금 윤정아가 마치 보란 듯이 택의 옆 자리로 와서 앉았다. 사실 덕선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녀가 입단한 건 92년. 그러나 덕선이 그녀를 처음 본 건, 88년이었다. 덕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 보자며 종로로 택이를 데리러 갔던 날, 줄을 맞춰 최택과 악수를 하며 감격에 겨워하던 여자 연구원 중 한 명이었다. 사범님을 너무나 동경해 마지 않던, 예쁜 소녀였었다. 6년이 지난 지금은 미모와 실력까지 겸비하며 올해의 여성 바둑인으로 우뚝 서 있었다.
그런 윤정아가 지금 택의 곁으로 온 것이다.
"사범님께서 웬일로.....오셨어요?
하기야 유 대리님, 아니 유 과장님 일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하네요."
바로 옆에 앉은 택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덕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한 잔 하세요."
이어 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얘, 뭐니, 둘이?"
탑 언니가 그걸 보더니, 덕선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뭐라 대답하기도 그래서 그저 웃었더니, 또다시 귓속말을 했다.
"너, 그거 알아? 요즘 연구원들이랑 프로기사들 연애 장난이 아니래.
생각해봐. 하루 종일 붙어 있지, 공부하네, 배우네 어쩌고 하면서 일대일로 붙어서 그렇게 하루종일 앉아 있는데 정이 안 생기고 배기겠니?
게다가 바둑 기사들이 그렇게 진득한 사람들인데, 둘 다 진득하니 있으면서 그렇게 많이 사귄댄다."
"어떻게 아세요?"
탑 언니는 당연하다는 듯, 눈짓으로 유 과장을 가리켰다. 오늘따라 술이 당겨서 덕선은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술을 마셔도, 정신을 잃기는커녕 점점 또렷해졌다. 곁에 앉아 이야기하는 소리들이 자꾸만 덕선의 신경을 자극했다.
몇 마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옛날 깍듯하던 동경하던 소녀가 아니라 여자가 된.... 대화에서는 그 옛날 스승처럼 대하던 모습이 아니라 한 남자 앞에서 허물이 없어진, 혹은 아주 많이 가까워진 한 여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덕선은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었다.
"오빤....진짜 신기해요. 어떻게 이렇게 세지?
또 원샷이야."
조용히 둘이서만 얘기하는 느낌이었다. 그 작은 소리가 그녀의 귀를 지나 저 심장 안까지 들어와 박혀버렸다. 뭐? 오빠? 덕선은 기가 찼다. 어디 하늘같은 9단에게 오빠 같은 소리 하네 싶었지만, 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덕선은 직감하고 있었다. 너의 5년을 지금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목울대가 얼얼했다. 덕선은 또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어, 너 술 좀 받는구나?"
또 탑 언니가 부어주자, 덕선은 기다릴 새도 없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누가 봐도 연속 스트레이트로 원샷을 해대는 품새였다. 탑 언니가 유 과장님과 이야기 하는 사이, 덕선은 소주를 자신의 잔에 부었다. 아니 부으려고 했다. 누군가의 손이 덕선의 손에 있던 소주를 낚아챘다.
"그만...마셔.
너, 이러다 취해."
택의 목소리가 조금은 딱딱한 듯했지만, 덕선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음을 지었다.
"에이, 이 좋은 날엔 원래 마셔줘야지. 유 과장님 승진하신 날인데....
그죠? 유 과장님, 저 좀 취해도 되죠오?"
술이 꽤 들어갔는지, 덕선의 말끝이 말려 올라갔다. 볼이 빨개진 채로, 마치 애교를 부리는 듯한 귀여운 말투에 유 과장은 당연하죠 하며 덕선과 건배를 했다. 택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가고 있었다. 단지 덕선만 모를 뿐이었다.
"풋....."
누군가의 웃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윤정아 2단이 택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왠지 거슬렸다. 덕선은 자꾸만 열이 올라왔다.
"늘 보면, 저 언니한테 약해요. 오빤."
역시 작게 얘기하는 듯했지만, 택 바로 옆에 앉은 덕선에게는 선명히 들렸다. 못 들은 척 해야 하나, 끼어들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덕선은 점점 더 열이 받고 있었다. 그 열을 식히려 또 술을 마시면, 그 술이 더 열을 오르게 했다.
"덕.선.아."
점점 더 얼굴이 굳어 가던 택이 덕선의 이름을 한자 한자 힘을 주어 불렀다.
"걱정 마. 취할 정도로는 안 마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덕선은 가볍게 받아쳤다. "나 잠깐 화장실...." 하며 일어서는데 역시나 핑하고 천장이 돌았다. 덕선이 비틀대자, 택은 곧바로 일어나 덕선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덕선은 마치 못 봤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택의 팔을 밀어내며 은서를 불렀다.
"언니, 저랑 같이 화장실 좀......"
덕선의 말에 은서가 흔쾌히 일어섰다. 덕선이 신발 신는 것을 잡아 주며, 은서가 혀를 찼다.
"너 많이 취했지? 오늘 비행하자마자 왔는데, 너무 피곤해서 더 취해.
내가 괜히 데려왔다. 미안하다, 얘."
"무슨 소리세요? 제가 좋아서 마시고 있는데....
즐거운 날 마시는데 뭐 어때요?"
둘이 마주 잡고 걸어가는데, 뒤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택이가 가게 밖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택이를 따라 윤정아가 문을 열고 있었다.
덕선은 그저 걸었다. 화장실이 마치 엄청난 목표라도 되는 듯이, 저기까지만 가자고, 무너지더라도 저기에서 무너지자고, 다짐 다짐하며 그렇게 자꾸만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았다. 결국 여자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덕선은 칸 하나를 차지하고는 한참을 올려댔다. 게워내기라도 해서 자신의 속을 비우고만 싶었다. 자신의 마음도 이렇게 게워내고 싶었다.
7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 덕선은 나오지 않는다. 화장실로 돌아들어가는 복도 끝에서 택은 그저 서성이고만 있었다. 많이 마신 것 같았는데 괜찮은 건지, 어떤 건지......
그 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 괜찮아? 다 올린 거야?"
"네...괜찮아요. 언니. 미안해요. 저 때문에...."
"무슨 소리야? 니가 왜 미안해. 데려온 내가 미안하지. 근데..너....울었니?"
"네? 아...아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눈이 이렇게 빨간데.
너 무슨 일이야. 뭔 일 있는 거지? 맞지?"
"아니에요. 언니. 진짜. 올리다 보니까 힘들어서 눈물이 좀 나온 거예요."
"야! 너 장난해? 내가 몰라? 너 코도 완전 빨개. 펑펑 울었네. 눈 부은 것 좀 봐.
너 진짜 무슨 일이야?"
"..........."
"덕선아! 너, 진짜 무슨 일 있지?"
"..........."
"너....왜 울어? 야? 왜 그래? 덕선아!
우진 씨랑 싸웠어? 그래? 내가 불러서 혼내줘?"
밖에서 들어가 볼 수도 없고, 그저 서 있을 수도 없어 안절부절 못하며 이 대화를 듣고 있는 택이에게도 이제 선명하게 덕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너, 솔직히 말해.
너, 우진 씨랑 무슨 일 있지? 맞지?
왜, 너 너무 바쁘다고 못 만난다고 싸운 거야?
도대체 뭔 일인데? 어?"
울음 사이로, 덕선의 흐느낌 사이로, 택이 들은 말은 듣고 나서도 믿기 어려웠다. 잘못 들었겠지, 싶었으나 다시금 흘러나온 울음이 섞여 나온 덕선의 말은 택의 심장을 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헤어...졌...어요...언니.....우진 씨랑 나....헤어졌...어요....."
택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벽에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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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 본원 이전은 94년 9월 29일.
<9.어.면> 1회 강제 소환.
<%8> 88년 강제 소환.
<9.어.면> 1회~11회까지는 작성자 '그랑' / 12회부터는 '그랑블루'
'응팔 선택 상플 > (선택) 94년 어느 날, 어쩌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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