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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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바둑과 인생이 닮은 이유
“제가 실제 상황보다 더 불리하게 본다는 것은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한 판은 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이길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다음입니다.
패배란 처절해야 하고, 동시에 철저해야 합니다.
늘 승자가 될 수는 없지만,
패자의 역할에 길들여져서는 안 되니까요."
1
우진은 아쉬웠다. 사실 덕선을 보고 싶은 마음에 퇴근하면서 쌍문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거의 쌍문동 근처에 와서 전화를 한 거였다. 혹시 집이면 잠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해서 전화를 한 건데, 덕선은 친구 가게에서 고기를 먹고 있다고 했다. 동네 친구들과 오랜만에 뭉친 거 같은데 오늘도 안 되겠구나 싶어 부럽기도 하고 실망도 되고 마음이 씁쓸했다. 가게에서 전화하는 거라 오래 통화도 할 수 없었고, 덕선은 뭔가 경황이 없어보였다. 친구 가게니 장사에 방해가 될까 걱정을 하는 것도 같았다.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던 우진은 한동안 전화박스 안에서 수화기도 내려놓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집으로 다시 갈까. 그러기에는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몇 달 간 끌어온 유럽형 프로젝트가 출시 직전에 오류가 나면서, 며칠 밤을 거의 새다시피 했다. 이대로 엎어야 하는 건 아닌지 지금까지 노력해 온 성과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팀에서는 거의 사생결단을 하고 매달려 있었다. 소프트웨어 쪽 프로그래밍을 하는 우진은 가장 핵심 멤버로 오류를 잡아야 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매달린 결과, 바로 오늘, 무엇이 문제인지를 드디어 찾아냈다.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일, 모레까지 이틀 정도 밤을 새면 출시 기한을 맞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오랜만에 팀원들과 같이 오늘은 사우나라도 갔다가 집에서 쉬고 나오자며 다같이 회사를 나왔다. 며칠만에 가는 집인지..... 사우나에 가서도 몇몇은 정신을 못 차리고 졸고 있었다. 그래도 뜨거운 기운에 조금은 회복되고 나니, 우진은 단 한 사람만 떠올랐다.
보고 싶다.
미소 짓는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다들 집에 가서 자라며, 미친 거 아니냐며 궁시렁댔지만, 우진은 쌍문동으로 차를 몰았다. 팀원들이 참 느지막이 하는 연애가 불타오른다며 질투어린 말들을 던져대도, 덕선을 볼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피곤한지도 몰랐다.
오늘처럼 이렇게 지치는 날, 또 며칠 밤을 새야 하는 일들의 연속인 날, 잠깐이라도 그녀를 보면, 그래도 조금은 숨은 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황망히 끊긴 수화기 너머로 뚜뚜뚜뚜....하며 퍼지는 기계음이 자꾸만 가슴을 스산하게 만들었다.
우진은 결심한 듯 다시 그 가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몇 시에 끝날 것 같은지, 마치면 자신에게 삐삐를 쳐달라고, 잠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지 그 말이라도 건네보고 싶었다. 몇 번 울리더니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네. 쌍문동 감포면옥입니다."
“아, 죄송하지만, 손님 중에 성덕선 씨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바로 전에 통화했었는데요."
"성덕선 씨요?"
"예."
"저 실례지만, 성덕선 씨와는 어떤 사이신가요?"
그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아까 친구 가게라고 했는데, 혹시 친구인 건지... 남자인 줄은 몰랐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남자친구...아니면 그냥 친구...아는 사람?
우진은 고민이 되었다. 덕선이 친구들에게 우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괜히 얘기해서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아....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상대방 남자는 뭔가 알아챘다는 듯 말을 꺼냈다.
"혹시.....성덕선 씨 남자 친구?"
"예?"
"두 달 만난 남자 친구, 아니세요?"
"아. 예. 맞습니다."
얼떨떨한 상태에서 우진은 대답했다. 두 달 만난 남자 친구..... 그 말이 뭔가 설레게 했다. 얘기했구나. 나에 대해....
"안녕하세요? 저, 덕선이랑 엄청 오래된 불..아니 동네친굽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안 그래도 덕선 씨가 친구 가게에서 고기 먹는다고 아까 얘기했었는데......"
"그렇죠. 저희 가게죠."
"아....네."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근데, 왜 전화하셨어요?"
이건 무슨 상황인지, 덕선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내용을 친구와 나누게 생겼다. 그러나 친구라는 말에 우진은 진땀을 흘리며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여자친구의 가족을 만나는 듯이 긴장이 되었다.
"아....저 혹시 모임이 언제 마치는가 해서......"
"오....얼굴이라도 잠깐 보려고 그러시는구나."
"...그...그렇죠."
덕선의 친구는 뭔가 고민하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덕선을 바꾸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바꾸어주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 행간에서 우진은 자신이 어쩌면 실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만나 술이라도 마시고 회포를 풀고 싶을 텐데, 자신이 기다린다고 하면 괜히 부담만 주는 꼴이었다. 게다가 친구들도 불편해할 듯했다.
"저,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덕선 씨에게는 제가 전화했다는 말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왜 갑자기?"
"아, 생각해 보니, 제가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친구분들끼리 오랜만에 모이셨는데, 제가 부담만 드리는 것 같아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덕선 씨와 상의해서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예?"
"혹시 지금 쌍문동 근처 아니세요?"
"어..어떻게 그걸......."
"....뭐, 안 봐도 척이죠. 다시 전화까지 하신 걸 보면....
음....그럼 그냥 오시죠."
"어디를....말씀이십니까?"
"저희 가게요."
"예?"
"그냥 오세요. 덕선이 집은 아시죠?"
"아...예."
"거의 근처니까, 그 근처 공중전화에서 전화하세요."
"예....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진은 이곳에 오게 되었다. 놀란 듯 바라보는 덕선을 향해 뻘줌한 듯 웃어주며 그들의 사이로 들어왔다.
2
"모두....남자 분이시네요."
"아, 모르셨어요? 저희 5인방 전.부. 남자랍니다. 흐흐"
동룡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전.부. 남자라고 강조를 해댄다.
"야, 도롱뇽!!"
덕선이 버럭대기는 했지만, 우진이 신경 쓰여 제대로 화도 내지 못했다.
"뭐, 저희한테는 얘가 남자라는 말씀입니다. 저희 형제예요, 형제."
그렇게 통성명을 시작했다. 가게 주인인 동룡과는 인사를 이미 끝냈고, 뭔가 어색한 듯 이리 저리 눈치를 보는 선우와, 그리고 그 유명한 최택 9단까지 가볍게 악수를 했다. 놀라웠던 것은 최택과 잡은 손에서 강한 힘을 느꼈다는 것이다. 하얀 그 손이 그토록 강할 줄 몰랐다.
"그런데 나이가......?"
"우리보다 3살 더 많으셔."
선우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덕선이 대신 대답했다.
"너희 학교 선배야."
"우리 학교? 전공이.....?"
"아, Y대 전자과 나왔습니다."
"그럼, 지금 일도 그 쪽으로 하시는.....?"
"예. S 연구소 다니고 있습니다. 제품 개발 담당입니다."
"와, 근데 일찍 취직하셨네요. 87학번이시면 스물일곱이신데 군대도 그렇고...."
"아, 저 사실은 제가 바로 대학원을 갔다가 병력 특례로 빠졌습니다.
지금 회사 다니지만, 엄밀하게는 군복무 중인 거죠.
2년 됐습니다. 아직 3년은 더 다녀야 군복무가 끝납니다."
"아....그래서....."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참, 말씀 낮추시죠. 저희 학교 선배님이신데......"
"그래도 덕선 씨 친구분이시고, 오늘 처음 뵈었는데......"
말을 놓으라는 선우의 말에도 우진은 쉽게 말을 놓지 못했다. 천성이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그 때 동룡이 끼어들었다.
"야, 덕써이~, 근데 너 왜 오빠라고 안 불러? 3살이나 많으신데?"
"어...어?"
오빠라는 말에 덕선은 택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택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오빠, 하면 되지. 우진 씨가 뭐냐?"
동룡은 아예 작정을 하고, 오빠라고 부르라며 집요하게 덕선을 괴롭혔다. 아마 덕선이 곤란해 하는 걸 보고 싶어서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우진 씨만 아니었으면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는 건데..... 열은 받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소리 없이 우진이 보지 않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너, 나중에 보자.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모양으로 전했더니, 동룡은 부르르 떨며 부산스럽게 일어났다.
"밖을 너무 많이 비웠나? 나 잠깐 테이블 좀 보고......"
동룡이 휑하니 나가버리자, 선우가 이리 저리 눈치를 보더니, 나도 화장실 좀, 하며 따라 나간다.
방 안에 남은 건, 덕선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만이 앉아 있었다. 덕선은 이 정적에 숨이 막혔다. 왜 하필이면, 둘 다 나가서.....
3
"도롱뇽!! 너 미쳤냐?"
동룡을 따라 나온 선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눈치 없는 새끼야, 너, 미쳤냐고!!!"
"내가 뭘......"
열을 내고 있는 선우에 비해, 동룡은 자신이 뭔 잘못이 있냐며 적반하장이다.
"야, 너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너, 택이가....아우...씨.....여튼 새끼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니가 이러면 안 되지."
"써누,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뭐래? 갑자기?"
"둘 중 하나만 무조건 선택해."
"뭘?"
"여튼. 지금부터 물을 거니까. 자, 1번 택이랑 정팔이,"
"뭘, 어쩌라고?"
"선택하라고, 둘 중에 무조건, 새끼야."
"아놔, 진짜. ....택이."
"좋아, 2번 택이랑 나."
"당연히, 택.이."
"3번 정팔이, 나"
"정팔이."
"야!!! 왜 난 없어?"
"시끄러, 새끼야. 니가 뭘 잘했다고."
"좋아, 마지막. 택이 덕선이."
"어?"
"무조건 뽑으라고, 새끼야."
"....태...택이!!!"
"그래, 이 새끼야. 넌 택빠야, 무조건.
형제다 이거냐? 이 더럽고 치사한 인간아?"
"지금 뭐하냐고!!! 아, 내가 미쳤지. 쌍문동 개나리 유치원 새끼랑 뭔 말을 섞겠다고, 내가 미친 놈이다, 내가!!"
"택이, 너."
"뭐?"
"난.....택이."
"뭐래?"
"택이, 정팔이.....역시 난 택이."
"새끼, 혼자 잘~논다."
선우는 점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동룡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정이랄까.
"정팔이, 너......나도 정팔이다 새끼야."
그리고 장난스럽던 동룡의 눈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택이, 덕선이."
그 물음에 선우도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놈은 뭐라고 대답할지.
"난......덕선이."
"뭐?"
"난, 덕선이라고. 새끼야."
"무슨 소리야? 그게?"
"솔직히, 택이가 당연히 1빠지. 당연한 거야, 우리한테.
근데, 그래도 나한텐, 그런 택이 앞에 있는 게 덕선이라고."
진지했다. 진지라고는 삶아먹으려고 해도 없는 이 놈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덕선이.....2달 넘었어."
"어?"
"이놈이 이렇게 길게 만난 적, 처음이라고."
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동룡이 어떤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건지, 아주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놈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거다.
"어떤 사람인지, 넌 안 궁금하냐? 성덕선이 이렇게 길게 만나는 남자가?"
선우도 납득이 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달이야. 우리가 봐야 될 거 아니야. 괜찮은 사람인지, 아니면 나쁜 놈인지.
빨리 보고 이상한 놈이면 마음 더 깊어지기 전에 떼놔야 될 거 아니냐고."
선우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한 사람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럼...택이는?"
"5년을 입 쳐닫고 있는 놈이다."
"그래서?"
"이번에 아예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뭐긴 뭐야? 잡든지, 접든지!"
"무슨 소리야, 그게?"
"아, 진짜. 너 의대생 맞냐? 국어 안 돼? 국어?
아예 삼자대면을 제대로 해서 정신 차리고 잡든지,
아니면 둘이 축복해주고 접든지 해야 한다는 거잖아."
축복? 이 자식이 미쳤나? 순간 선우는 버럭 했다.
"야, 넌 도대체 누구 편이야?"
"그럼 어쩔건데? 돌부처가 움직이려면 불이라도 지펴야 될 거 아니야.
지가 사람이지, 돌덩어리야?"
"그래도...만약에....괜찮은 사람이면...택이...어떡하냐?
덕선이가 많이 좋아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이러잖아.
덕선이가 더 좋아하기 전에 어떤 놈인지부터 봐야 한다고.
괜찮은 사람이라서, 덕선이가 좋아하면, 그걸로 게임 끝이지 뭐."
"야!!! 택이는!!!!"
"시끄러워, 인마. 난 무조건 덕선이 편이야.
덕선이가 좋아하고, 또 덕선이 좋아해주는 사람이면, 그걸로 된 거야."
"이 의리 없는 새끼. 택이는, 택이 마음은 생각도 안 하냐?"
"말했잖아.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된다고.
이제 좀 정신 차리고 잡든가, 아니면 확실하게 접고 딴 여자 만나든가."
"니 일 아니라고 말은 쉽다?"
"그러니까, 내가 돌부처한테 불 질렀다고, 됐냐?"
"뭐?"
"이러다 택이 죽는다고 인마.
덕선이 잡든가, 안 되면 좀 접기라고 하든가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저 자식 대국 저 딴 식으로 계속 두다가는, 애 잡는다고.
살려야 될 거 아니야. 좀!!!"
4
방안은 여전히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살얼음판처럼 무언가 깨져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긴장감이 숨을 막히게 했다.
"최택 9단님, 팬입니다."
느닷없이 나온 우진의 한 마디. 그제야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던 택이 얼굴을 들었다. 우진은 생각했다. 조용한 듯, 아니 이렇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아도 이런 존재감을 갖기는 어려울 거라고..... 도저히 자신보다 3살이나 어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감사합니다."
택은 여전히 느릿느릿 대답했다. 우진은 그런 대답조차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중압감. 그랬다. 태산 앞에 선 중압감이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저희 아버지께서도 엄청난 팬이십니다. 최택 9단님 신문까지 스크랩해두시거든요."
"예......"
택은 그저 감사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우진이 당황할까봐 덕선이 끼어들었다.
"원래, 택이 말 많이 안 해요."
"아...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무겁고 진중하실 것 같았습니다."
"네? 택이가요?"
"언젠가 인터뷰하신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것에 대해 최택 9단님께서 하신 말씀이셨는데, 바둑을 두면 인내해야 할 것이 많다고......"
덕선도 본 적이 있는 인터뷰였다.
"그 때 느꼈습니다. 이 분의 내공은 정말 보통이 아니겠구나....싶었는데 직접 뵈니까 상상을 넘어서네요."
우진의 말은 진심이었다.
"형세를 판단할 때 실제보다 불리하게 보신다고 하셨는데, 대국 두실 때 정말 질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십니까?"
우진과 우진의 아버지는 바둑의 광팬이었다. 어쩌면 우진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일 수도 있다. 언제나 이기는, 우진의 입장에서는 늘 그렇게 보이는 택이 늘 불리한 쪽으로 보는 비관파라고 인터뷰한 내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어떻게 늘 저렇게 이기는데, 비관적으로 본다는 건지, 어쩌면 아버지께 말씀드릴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마치 기자라도 된 것 마냥 물어보았다. 언제 또 기회가 오겠나 싶기도 했고, 덕선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 좀 그런 편입니다."
"그럼, 늘 주어진 상황을 더 극단적으로 안 좋은 쪽으로 보신다는......?"
택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우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덕선에게로 옮겼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눈은 도대체 어디를 둬야 할지도 당황스러운 덕선은 택의 시선 앞에서 숨이 덜컥 막혔다.
"바둑을 두면 실제로 인내해야 하는 상황이 많습니다.
불리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리면서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박하고 싶지만, 약하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다 기회가 오면 역전할 수 있으니까.....바둑은 그렇게 숨을 죽이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유리하다고 너무 좋아하거나 방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바둑과 인생이 닮은 이유입니다."
택이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인터뷰도 아닌데, 그저 오늘 처음 본 사람 앞에서 그렇게 낯가림이 심한 택이가 저렇게 진지하다 못해 냉철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덕선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본 적이 있다. 이런 모습은, 대국 앞에 선 택이의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택이의 대국을 봤을 때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광저우에서 대국을 치루기 전, 대국을 치를 때, 택의 모습은 바로 이 모습이었다. 정중하되 냉철한 모습. 친구에서 최택 9단이 된 모습.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실제 상황보다 더 불리하게 본다는 것은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택은 진지했다. 마치 바둑의 복기를 하듯, 아니 다시 이기기 위한 준비를 하듯, 하나하나 되짚어 보고 있었다.
"한 판은 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이길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다음입니다.
패배란 처절해야 하고, 동시에 철저해야 합니다.
늘 승자가 될 수는 없지만, 패자의 역할에 길들여져서는 안 되니까요."
한참 정적이 흘렀다. 마치 바둑 대국 같았던 정적을 깨고 우진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오늘.....인생을 배운 것 같네요."
"..................."
"아버지께서 이 자리에 계셨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최택 9단님을 승부사로 부르는 이유를, 정말 알 것 같습니다."
택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지고 갔다.
5
"어, 분위기 왜 이래? 뭐, 전쟁이라도 치르신 거니?"
동룡이 한 손에 고기를 잔뜩 담은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덕선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좀 숨이라도 쉬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두 사람, 어떻게 만났어요? 소개팅? 아니면......"
"비행기에서....처음 만났습니다."
선우가 던진 건 뭐 별 것 없는 물음이었다. 어떻게 만났는지 누구나 당연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또 덕선이 승무원이니 비행기에서 만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비행기라는 말에 덕선은 아차 싶었다. 택이가 들었을까. 그러나 택은 아무 말 없이 아니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술잔만 쥐고 있었다.
"제가 첫눈에 반했습니다. 덕선 씨에게......."
뭔가 수줍은 듯,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는 우진의 모습에 선우와 동룡은 탄성을 질렀다.
"오올.....웬열!!"
"와, 덕선이를 뭘 보고, 첫눈에......? 그게 가능한 얘기니?"
동룡은 기가 막힌다는 듯 선우를 툭툭 쳤다.
".....워낙 예쁘시니까...... 아마 저 말고도 덕선 씨한테 반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덕선 씨 지나가면, 몇 명이나 뒤로 돌아보는 걸, 저도 확인했습니다."
"으윽...선우야!!! 나 속이 안 좋다.
아, 진짜 왜 그러세요? 덕선이 진짠 줄 알아요."
동룡이 올릴 것 같다고 웩웩거리거나 말거나, 선우가 기가 찬다는 듯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거나 말았거나, 우진은 그저 진중하게 자신의 느낌을 전했다.
"진짭니다. 사실.....전 늘 불안합니다. 덕선 씨 웃으실 때 보면, 진짜 불안합니다.
일하실 때, 남자들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싶어서요."
"와.... 성덕선 저거 공주병인 거, 우진 씨 때문이네.
야, 성덕선, 저거 우진 씨 한정이야. 너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동룡은 어떻게든 덕선을 내려오게 하려고 난리였다. 그러나 덕선은 그저 이 자리가 불편할 뿐이었다. 우진이 진중하면 할수록, 솔직하면 할수록 이 자리가 답답했다.
탁......
그리 큰소리는 아니었지만, 택이 탁자에 잔을 두는 소리가 이상하게 두드러졌다. 방금 또 술을 비운 모양이었다.
"덕선아."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로, 선우와 동룡이 말도 안 된다며 성덕선 진짠 줄 안다고 난리치는 속에서, 택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조용히, 그러나 알 수 없는 무게로 덕선의 이름을 불렀다.
"...어?...."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덕선이 대답했다.
"너, 승객이랑은 안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어...어?"
술잔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택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덕선을 향했다. 검은 눈동자가, 아무 감정도 없는 듯, 아니 도리어 화가 났다고 해도 믿을 만큼 싸늘하게 식은 듯한 눈동자가 덕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안 만난다고 했었잖아."
덕선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자신을 향한 심연의 검은 눈동자 앞에서는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수면제 때문입니다."
우진이 대신 대답했다. 수면제라는 말에 일동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제가 수면제를 먹는다고 말하는 바람에, 덕선 씨가 신경을 써주셔서......"
5인방에게 수면제는 단 한 사람이었다.
"친구분 걱정을 하셨어요. 친구분이 수면제를 많이 드신다고......
그것 때문에 저한테도 신경 써주신 거고, 전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겁니다."
이상했다. 그 말을 던진 후, 다들 뭔가 당황하고 있었다. 선우와 동룡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택은 덕선을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우진은 옆 자리에 앉은 덕선을 바라보았다. 덕선은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러고는 마치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 친구......사실 택이예요."
이번에는 우진이 당황했다. 덕선의 시선이 천천히 택을 향했다. 검은 눈동자가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눈빛으로 섞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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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과 관련한 택의 이야기는 이.ㅊ.호.9.단의 인터뷰 내용을 내가 약간 각색한 것임. (바둑과 인생의 닮은 점 / 상황을 더 불리하게 보는 면 / 패자 관련)
아래는 실제 인터뷰 내용과 어록임.
-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들 한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바둑을 두면 인내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불리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리면서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 말이다.
반박하고 싶지만 약하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 기회가 오면 역전할 수 있다는 게 인생과 닮았다.
또 내가 유리하다고 너무 좋아하거나 방심하면 안 된다는 점이 비슷하다."
- 형세 판단할 때 실제보다 불리하게 보는 '비관파'다. 삶에서도 그런 편인지.
"그런 것 같다. 부정적인 시각이 건강에도 나쁘다고 하더라.
그래서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두면서 가진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서 쉽게 바꾸기 어렵다."
- 그 외 어록(ㅁ.생.에 나온 어록)
"중요한 승부에서 패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프로가 아니다.
그것은 인품과 무관하며 승부사에게
패배의 아픔은 항상 생생한 날 것이어야 한다.
늘 승자가 될 수는 없지만
패자의 역할에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 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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