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 선택 상플/(선택) 94년 어느 날, 어쩌면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8장 나는 니가 아프다

그랑블루08 2016. 2. 29. 23:47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8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932656

 

[텍본 수정본 재업로드] 

 

8장 나는 니가 아프다

 

 

 

너의 시선은 한결 같다.

5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너의 마음은 늘 한결 같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도 한결 같다.

내 사랑에 아파도,

나는 내 사랑보다 아픈 니 사랑이 더 아프다.

나는 그렇다.

바보 같고 어리석어도,

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고백의 말을 침묵해야 했을 니 사랑이 더 아프다.

그래서 나는 니가 아프다.

 

 

 

1

 

 

배경음악을 바꿨느냐는 삐삐 이후, 또다시 덕선의 삐삐가 울렸다.

 

"나 지금 쌍문동이에요. 잠깐만 나올래요? 얼굴만 보고 갈게요."

 

놀란 것도 잠시, 덕선의 마음 한 곳이 자꾸만 저릿해진다.

그래도 옷을 챙겨 입는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2

 

비행기에서 연락처를 알려주고 나서 처음 그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음성 녹음에는 그의 긴장한 목소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안녕하세요? 덕선 씨. 서우진입니다. ., 왜 이렇게 긴장되지? 흠흠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비행기에서 아기 침대 때문에....

그리고 덕선 씨께서 제게 우유도 주셨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지금 찍은 번호로 전화주시겠어요?

아니면 흠흠...연락처 남겨주시면 제가 전화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긴장하고 있는 모습에서 좀 웃겼달까. 안녕히 계십시오 라고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도 그가 얼마나 뻘줌해 하고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덕선도 사실 번호를 주긴 했지만, 만날 생각은 없었다. 젠틀해 보였고, 나름 괜찮아 보이는 타입이기는 했지만, 승무원과 승객으로 만난다는 것이 좀 그렇기도 했다. 남자들이 여승무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승무원에게 대시해서 만난다는 자기 과시욕으로 이용될까봐 싫은 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녹음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저 웃음이 나왔다.

 

정말 이 남자는 진땀이라도 흘리는 것 같았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을 기억 못할 리는 없을 텐데, 덕선이 기억 못할까봐 뭐라고 자꾸 얘기하는 것도 웃겼고,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는 것도 귀여웠다.

 

귀여워?

 

덕선은 지금 자신이 떠올린 단어에 스스로가 놀라고 있었다. 귀엽다라..... 덕선에게 대시해 오던 수많은 남자와 소개팅을 통해 만난 남자들에 대해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아니,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얘기를 해도, '감정'이라는 것이 생긴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다를까?

 

지금 그냥 탑승하면, 3일은 걸릴 텐데, 이 남자는 정말 기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못할지도 모르겠다 싶으니 무언가 자꾸 미안해졌다.

 

덕선의 손은 이미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고 있었다.

 

". 서우진입니다."

 

".....성덕선인데요."

 

그가 찍어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니 사무실 자기 전화인지도 몰랐다.

 

", 덕선 씨.....정말 전화해 주셨네요. ,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

 

당황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서 덕선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 죄송해요. 저 근데 직장이신가봐요."

 

". 사무실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연락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사실 저, 오래 통화는 안 되구요. 지금 탑승해야 해서....기다리실까봐 전화했어요."

 

", 공항이시군요."

 

"."

 

"이번에 가시면 언제 오시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오늘 가면 내일 쉬고 모레 들어와요. 오사카라 가까워서......."

 

덕선은 자신이 왜 이렇게 상세하게 대답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스스로가 믿기지 않은 채로 술술 대답하고 있었다.

 

", 그럼 괜찮으시면, 모레 저녁에 잠깐 뵐 수 있을까요?"

 

금요일 저녁인데......데이트 신청인가.....?

 

"데이트 신청....하는 겁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그는 덕선도 놀랄 만큼 단도직입적이었다. 보통은 돌려서 말하거나, 다른 핑계를 대서 어떻게든 만난 다음 운을 떼는 것이 상례지만, 이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거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거들먹거리지도 않았다. 비행기에서 봤던 딱 2, 그 두 번으로 이 남자는 덕선에게 데이트하자고 아예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순진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예 전문꾼일지도 모른다.

 

"부담....스러우시다면........"

 

주저주저하는 그 목소리 사이로 긴장감과 그의 진땀이 섞여드는 것 같았다. 만약 이 남자가 그 때 고마워서요 어쩌고 했다면, 덕선은 단칼에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식사는 부담스럽구요."

 

"..?"

 

"차는 괜찮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덕선 씨......"

 

무언가 떨린 듯,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 이 남자, 많이 긴장했었나 보다.

 

"그럼, 어디서.......?"

 

"덕선 씨는 그날 몇 시에 퇴근하십니까?"

 

".....530분 도착이니까 정리하고 나오면 6시 반, 아니 넉넉잡아 7시 정도엔 나올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제가 시내로 나갈게요."

 

"제가.....공항으로 가겠습니다."

 

"? 그 시간에 퇴근이 가능하세요?"

 

".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날은 조금 일찍 퇴근해도 될 것 같아서요."

 

"힘드시면, 그 뒤에 만나도 되는데......"

 

"아닙니다. 그럼 모레 뵙겠습니다. 비행도 잘 다녀오세요."

 

". 그럼 모레 뵈어요."

전화를 끊는 덕선의 마음은 이상하게 간질간질거렸다. 이렇게 봄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3

 

 

그와의 첫 데이트는 웃기게도 공항이었다. 어디 가기도 그렇고, 공항 안 커피숍에 들어갔다. 약간 긴장하는 것도 같았지만, 여전히 그는 따뜻하고 젠틀했다.

 

"시장하지 않으세요?"

 

", 괜찮습니다. 덕선 씨께서 시장하시겠네요. 방금 도착하셨으니....."

 

"아니에요. 비행기 안에서 간식을 좀 먹었어요."

 

"......."

 

이건 소개팅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개팅이 아닌 것도 아니고, 마치 소개팅인 것 같은데, 아닌 것도 같고, 참 미묘한 상황이었다. 둘 다 뻘줌하니 그저 목을 가다듬으며 커피를 홀짝대고 있었다.

 

"....수면제....."

 

"?"

 

"수면제.....많이 드세요?"

 

덕선이 내내 궁금했던 수면제에 대해 물었다. 어쩌면 이 남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수면제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닙니다. 상습 복용은 아니고, 제가 해외 출장이 잦아서 그 때만 먹고 있습니다."

 

"......"

 

"처방 받아서 먹는 거라서, 그렇게 문제되지는 않고요.

사실 시차 적응은 안 되는데 바로 일하러 나와야 하니, 차라리 도착해서 하루 이틀 먹으면 몸 회복이 훨씬 나아서 먹고 있습니다."

 

", 그럼, 평상시에 드시는 건 아니구요?"

 

". 이번에는 돌아오는 날 하루만 먹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덕선을 우진은 약간은 불안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다음 나온 덕선의 말이 우진의 심장 안으로 서늘하게 들어와 앉았다.

 

".......걱정.....했어요."

 

덕선이 왜 이 말을 했는지 덕선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수면제라는 말에 누군가가 떠올랐고, 이 사람도 그 고통을 겪는 건가 싶어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그를 보자 수면제부터 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툭하고 그 말이 나오고 나니, 실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몇 번 봤다고, 아는 사람도 아닌데, 뭐라고 생각할까, 싶었다. 남자나 밝히고 꼬시기 위해 하는 말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싶었다.

 

덕선 스스로도 당황해서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는데, 남자의 눈빛이 너무나 선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덕선을 마주보는 눈빛에는 분명 울렁대는 무언가가 있었다.

 

"......"

 

한참 후 나온 우진의 목소리. 말을 시작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덕선의 말에 대한 대답도 아니었다. 무언가 자기 스스로 알기 시작했다는, 무언가를 알게 된 그런 말이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에 대한 깨달음 같은 그런 말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수면제 드신다고 해서요.

사실 제 오랜 친구가 수면제를 먹어서......

늘 두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불면증 때문에 고생도 하고 해서요.

그래서 혹시 우진 씨도 그러신가 해서........"

 

자신도 모르게 변명도 아닌 변명을 늘어놓는 덕선에 대해서 우진은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나 지금 뭐하냐, 싶을 때쯤, 우진이 툭 하고 한 마디를 던졌다. 물론 우진은 예의 바르게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의 깊이가 덕선의 가슴 안으로 툭하고 물결을 일으켰다.

"그 친구분이....많이 걱정되시나 봅니다."

 

"...?"

 

"수면제...라는 말에 그렇게 신경 써주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사실은......비행기 안에서 그걸 좀 느꼈습니다."

 

"...뭘요?"

 

"제가 수면제라는 말을 꺼냈을 때, 덕선 씨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거든요.

갑자기 저를 다르게 보는 것 같은.....아무튼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 주시기까지 하니까......"

 

", 그게, 아무래도 친구 일이 있다 보니까....."

 

"그러니까요.

다른 사람의 상황을 들어도 그렇게 반응하시는 걸 보면,

그 친구분에 대해 늘 걱정하고 염려하고 계시는 거죠."

 

덕선은 그 말에 아무 말도 못했다. 우진은 너무도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저는, 다행입니다. 수면제를 먹어서 말입니다."

 

"?"

 

"수면제를 먹는다고 말했으니, 덕선 씨가 그렇게 바라봐주고, 관심도 가져주신 거니까요."

 

"......그게......"

 

가면 갈수록 당황하고 있는데 우진은 살짝 민망한 듯 자신의 미간을 만지며,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수면제가 아니었으면 제가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사실은......비행기 타면서부터 덕선 씨를......계속 보고 있었습니다.“

 

"? 저를요?"

 

"그게......예쁘시고......또 승객들에게 따뜻하게 대하시니까......."

 

"당연히 제 직업이니까......"

 

"웃으실 때, 덕선 씨 굉장히 예쁘세요. 사실은 몇 번 심장이 좀.....떨렸습니다."

 

이제 세 번째 만난 남자의 말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애인이 있으실 것 같아서......

제가 번호를 물어봤자 소용없는 게 아닐까 싶어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우유를 가져다주시길래, 용기를 냈습니다.

적어도 저에 대해서 약간은 알아주시는 것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려 본 건데

오늘 이런 자리까지 가지게 되어, 저는 정말 영광입니다."

 

", 아니 무슨 영광씩이나........그러세요. 민망해요."

 

"친구분께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니, 덕선 씨의 우정어린 마음에 감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정....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씁쓸한 이 감정은 자꾸만 꿈틀대며 올라오려 했다.

 

"친구분을 굉장히 아끼시나 봅니다. 별 상관없는 제게까지 신경 써주신 걸 보면......."

 

덕선의 고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끄덕여졌다.

 

".....아주 오래된....소중한...하아..........거든요."

 

그리고 잠시 덕선은 고개를 숙였다. 이 남자, 너무 많이 넘겨짚으면 안 되는데.....그러면 안 되는데..... 덕선은 나오려는 눈물을 밀어 넣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4

 

 

그날 그렇게 만난 이후 덕선은 우진과 연락하기 시작했다. 연락해도 되느냐는 우진의 말에 덕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왜 거절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의 따뜻한 시선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제 정말 덕선도 이 지긋지긋한 감정에게서 놓여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 연락하며, 가끔 보며 지내기 시작했다고 해도 우진은 직장 일이 바빴고, 덕선 역시 비행이 많아 만날 틈도 없었다. 처음 그를 만나고 한 달 동안 만난 건 딱 3번이었다. 그것도 공항에서만 2, 공항과 쌍문동 1, 그렇게 총 세 번뿐이었다. 공항에서만 3번이 될 뻔했으나, 3번째 만난 날, 우진은 차를 가져왔다며 덕선을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었다. 혹시나 동네 사람들 눈에 띌까 싶어 조금 떨어져서 내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진이 처음 쌍문동 근처에 와본 첫 번째 날이기도 했다.

 

차로 데려다 주겠다는 우진을 따라 그의 옆자리에 타고서 집이 쌍문동이라고 했을 때, 우진의 반응은 바로 이랬다.

 

"쌍문동? 둘리가 사는 동네군요."

 

", 아무래도 다들 그렇게 아시네요."

 

"어렸을 땐, 쌍문동을 한 번 찾아가 볼까도 했습니다."

 

"만화, 좋아하셨어요?"

 

". 둘리 보느라 보물섬도 열심히 사봤습니다.

그러다가 진짜 쌍문동 한 번 찾아갈까 했죠."

 

"큭큭....왠지 우진 씨랑 안 어울려요."

 

"그래요? 실망하신 건, 아니죠?"

 

"저도 좋아해요. 만화. 안 본 만화책이 없어요."

 

"사실 둘리도 안 됐죠. 엄마 옆에 있었어야 하는데, 희동이가 데려왔으니...."

 

"?"

 

", 내용 중에 타임머신 타고 엄마 찾아 간 적 있잖아요.

그 때 둘리는 엄마 옆에 있고 싶어했는데, 희동이가 둘리 발에 줄을 매달아서 현재로 데리고 오죠."

 

........

 

"처음엔 희동이가 너무 이기적인가 했는데,

생각해 보면, 둘리를 너무 사랑했던 거죠.

둘리가 없으면, 희동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

 

", 농담입니다. 이런......덕선씨 당황하신 듯한데....

제가 어릴 때 워낙 좋아했던 만화라......."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우진이 조수석에 앉은 덕선을 돌아보았다.

 

", 맞다. 그러고 보니.....더 유명한 인물이 쌍문동에 사네요.

최택 9, 맞죠? 최택 9단이 둘리가 사는 동네에 산다고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덕선은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동네에서 사시면, 동네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친구...예요."

 

"?"

 

"아주 오래된 동네 친구."

 

"....대단한데요."

 

우진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최택 9단이 아닌가.

 

"그냥 동네에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5명 친구들 중 하나예요."

", 저번에 얘기했던...."

 

"."

 

2번째 만났을 때, 우진이 물었었다. 쉴 때 뭐하냐는 말에 친구들 만난다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나 동네 친구들 만난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에 우진은 부러워했었다. 아파트 생활을 일찍 해서 동네 친구가 많이 없다며, 예전 동네에서 이사 나오고 나서는 거의 보기가 힘들다는 말도 했다.

 

"세상에, 그 중 한 명이 최택 9...~.

장난 아닌데요?"

 

그래, 보통 사람들의 반응은 그랬다. 최택 9단과 동네 친구라고 하면 대부분 그런 반응이다. 우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중에 덕선 씨 친구분들한테 인사할 때, 최택 9단님께도 인사드릴 수도 있겠네요."

 

그 말에 덕선의 가슴이 꽉 막히는 듯 조여왔다.

 

그렇구나.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우진과 덕선이 꼭 무어라고, 정확하게 사귄다고 말한 건 아니었다. 우진에게서 그저 연락이 왔고, 덕선은 그것을 받아주었다. 우진은 덕선에게 어떻게 하자고, 어떤 마음이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덕선이 받아들일 때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덕선이 웃을 때 예쁘다는 말로, 그럴 때 가슴이 떨린다는 말로, 그리고 덕선에 대해 궁금해 하며, 그렇게 자신이 덕선에게 어떤 마음인지 천천히 그러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전해왔다.

 

우진은 만나자고 말할 때도 늘 덕선의 의사를 물었다. 많이 바쁜지, 시간은 괜찮은지, 시간 내기가 힘들면, 이렇게 삐삐로 연락할 수 있어도 자신은 충분히 감사하다고 늘 그렇게 덕선을 배려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우진이 말한 것처럼, 그런 날도 오겠구나, 1달이 되던 때 덕선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렇게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5

 

그래서 그런 말을 툭하니 던졌던 것 같다. 얼마 전, 택이에게 자기 남자친구와 같이 보자고 말했던 것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 남자를 만나다 보면, 이렇게 보슬비처럼 내리는 이 남자의 마음을 받다 보면, 그런 날도 올 수 있지 않을까, 그 날이 되면,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 덜 아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더랬다.

 

오늘 집 앞까지 온 이 남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듯도 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달려오게 했을까.

 

덕선에게 악수를 청하는 남자의 손을 잡으며, 아주 잠시 덕선의 손을 꽉 잡던 남자의 힘이, 그리고 따뜻함이 오랫동안 손의 감각 속에 남아 있었다. 그저 덕선이 있어주어서 고맙다고 감사해 하는 이 남자를 보며, 그의 삐삐 번호 마지막 4자리처럼 정말 1004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커서, 덕선은 그게 더 미안했다. 고마워할 수만 있다면, 그저 이 남자처럼 자신도 감사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를 보내며 그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본 순간, 덕선은 생각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평생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 미안함은 어쩌면 평생을 갈지도 모른다고......

 

".....택아.....!!!"

 

택이에게서 들어야 했던 말들.....남자 친구, 두 달, 같이 보자.

 

그 말들은 분명 덕선에게서 나갔던 말이지만, 고스란히 심장을 찔러대는 비수처럼 덕선에게 날아왔다.

 

"덕선아........"

 

".............."

 

"행복하니?"

 

"......?......"

"아니....행복...하라고......."

 

"...택아......."

 

"들어가자. 늦었다."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택을 보며, 덕선의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 행복하라고? 나한테?

 

그럴 거면, 그런 눈빛은 왜 하는 거냐고, 왜 그렇게 니 눈빛은 깊은 거냐고, 왜 그렇게 나를 착각하고 싶게 만드는 거냐고, 따지고 묻고 싶었다. 화가, 났다. 그랬다. 내가 이러는 건, 너 때문이라고,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따뜻하게 바라보지도, 상처받은 듯이 쳐다보지도, 그렇게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지도 말았어야 했다고, 자꾸 내가 착각하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꾸만 기대하고 싶게, 혹시 하는 마음을 품고 싶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모든 건 최 택 너 때문이다. 이 모든 건!!!

 

덕선은 벌써 몇 걸음 먼저 걸어가고 있는 택의 뒤로 뛰어가서 그의 왼팔을 잡았다.

 

"택아!!!"

 

무슨 용기였는지 모른다. 아니 오로지 분노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의 눈이, 표정이 어떤지 덕선은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앞에서 당황한 듯, 긴장하는 택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선아......"

 

"!!!!"

 

"..........."

 

", 어떤데? 넌 어떠냐고!!!"

 

덕선을 바라보는 택의 눈은 또다시 깊이 가라앉는다. 그것이 고통일지 슬픔일지 알 수 없지만, 덕선은 모르는 척하기로 한다. 아니 자신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고 싶은 착각. 5년을 품고 온 자신의 착각.

 

"무슨.....말이야?"

 

택이 입을 뗐다.

 

미치겠다, 성덕선. 정말 미치겠다. 천천히 들려오는 그의 음성에, 밤 공기로 흩어지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나른한 듯 퍼져가는 울림에 자꾸만 울컥대는 심장이 정말 미치게 만들었다.

 

"....택아.......행복....?"

 

택의 눈이 파르라하니 떨렸다가 또다시 가라앉았다. 너의 심연을 흐트러버리고 싶다고, 너의 아무렇지도 않은 그 눈빛을 흔들어버리고 싶다고, 덕선은 그래서 물어보았다. 어차피 그의 검은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다.

 

",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도대체 덕선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무엇을 묻고 싶어하는 건지, 택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한참 덕선을 바라보던 택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 왜 안 만나?"

 

또 다른 질문이 또다시 던져졌다.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하나 택이 고민하는 사이, 덕선은 한 번 더 물었다.

 

"너 소개팅 많이 하잖아. 왜 안 만나?"

 

"........선아....."

 

이제 소개팅하지 않는다고, 그 때 이후 그날 니 앞에서 얘기했던 전자회사 사장 딸도 거절했다고 그 이후는 계속 거절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해도 될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택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 말했었잖아. 5년 전에......."

 

"..?"

 

5년 전이란 말에 택의 목소리가 떨렸다.

 

", 그 때 그 사람한테 고백....했어?"

 

덕선은 택이 대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덕선은 침을 삼켰다. 5년 동안 매일 매일 물어보고 싶었던 말, 그 말을 내뱉기로 했다.

 

"그럼.....지금도 그 사람, 못 잊는 거야?"

 

택의 눈빛을, 그토록 흔들리는 눈빛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택의 턱이 단단해졌다. 어금니를 꽉 깨물던 택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잊은 적이 없어."

 

택의 시선은 온전히 덕선을 향하고 있었다. 택의 진심이었다. 5년 동안 한결 같았던 택의 마음이었다. 덕선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랬구나....그래서 그랬구나......

 

택의 시선이 자신의 팔을 꽉 잡고 있는 덕선의 손을 향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게 자신의 팔에서 스르르 풀려가는, 멀어져 가는 덕선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시는......그런 말 하지 마. 나한테."

 

"덕선아."

 

"행복...어쩌고,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마."

 

".........."

 

"너부터, 행복하라고. 너부터! 니가 행복해지면, 그 때 물어보라고."

덕선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걸었다. 걸어야만 했다. 들키면 안 되니까, 지금 흐르는 이 눈물을 저 아이는 절대로 봐서는 안 되니까, 저 아이가 그 사람을 봐온 5년 동안, 잊지 못했던 5년 동안, 나도 저 아이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본 거니까, 그러니 들켜서는 안 된다.

 

순간 한 달 전 우진의 말이 떠올랐다.

 

희동이는.....둘리를 잡고 살아간다는데....

죽을 것 같아서 둘리를 데려왔다는데.....

 

내가 아는 희동이에게는.....같이 있지 않으면, 잡고 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존재 따위는....없다고.....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단지 그 존재가 내가 아닐 뿐이다.

 

그저 5년 동안, 한 번도,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는 그 사람이 부러워서 질투가 나서 그래서 심장이 저릿해질 만큼 아파서 숱한 추억이 쌓인 그 길 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미칠 것 같은 건, 5년 동안 저 아이도 자신만큼 아팠을까봐, 지금도 아플까봐, 말하고 싶어도 추억까지 삼켜야 했을까봐, 그 고백의 말들을 침묵해야 했을까봐, 그것이 아파서 울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다.



 

 

 

 

 

<짤은 갤줍. 감솨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