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38 – 일상(rou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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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재신의 일상은 바빴다. 두 달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구호 활동도, 아이들의 조혼 문제, 여성 문제와 싸워나가면서 발생한 이슬람 문화권과의 대립도,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 사이 그녀의 편도 생겼고, 그녀의 아군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적군도 생겼다.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만큼, 안티는 당연히 생기기 마련, 재신은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시경의 걱정과 근심은 그만큼 늘어만 갔다.
두바이에서 개최한 조혼 반대 컨소시엄에 참여했다가 과격한 종교단체 쪽에서 계란을 던진 이후, 시경의 근심은 현실화되었다. 그쪽 종교단체 입장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 공주가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경고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여튼 계란 세례를 시경이 온 몸으로 받아낸 이후, 근위대장은 공주님의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시켰다. 아니 당분간 모든 해외 활동을 금지시켰다.
근위대장에게는 그만한 권력이 있었고, 금지할 만한 충분히 유리한 위치도 점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공주님이 ‘니가 뭔데?’ 정도는 날려주실 수 있었으나, 공주님도, 대한민국의 국왕도 근위대장의 말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항아도 예전에 계란 세례 받은 적 있다고, 총도 아니고 계란 정도는 테러도 아니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공주님도, 국왕도 도저히 입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그만큼 근위대장의 얼굴은 심각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뱉어내는 근위대장 앞에서 “니가 왕 해라, 왕~”이라는 말도 재하는 궁시렁댈 뿐 차마 큰 소리로 뱉지는 못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나가보겠습니다.”
컨소시엄에서 돌아오자마자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근위대장이 대한민국 국왕의 집무실에 거의 쳐들어가서 했던 말이었다.
시경이 휠체어를 끌어주는 바람에, 재하의 방에 같이 갔던 혹은 끌려들어갔던 재신은 시경의 명령에 가까운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는 재신을 거의 반강제로 휠체어에 태워 공항에서 궁까지 데려와서는 출국 금지령을 때리고 또다시 그녀의 휠체어를 밀며 재하의 집무실을 나왔다.
에휴......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재하의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혜원은 너무 심각한 분위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공주님께 눈짓으로 물었다.
“박 실장. 나 당분간 해외 스케줄은 취소야.”
“뭐? 아..... 무슨 소립니까? 그게?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이 많은데....요?
두바이부터 시작해서 동남아 쪽, 중동 쪽, 아프리카 북부까지 갈 곳이 천지라고....요.”
혜원은 주위에 있는 궁인들 눈치를 보며, 억지로 ‘-요’를 붙이고 있었지만, 꽉 깨문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그러니까.....”
“박 실장님!”
재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시경이 바로 낚아챘다.
“공주님, 당분간, 아니! 앞으로 해외 출장은 없.습.니.다. 박.실.장.님.”
“네에?”
말도 안 된다는 듯 혜원이 되물었다.
지금 미친 건가.
이제 겨우 왕실복지재단이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고, 아이들을 먹이고, 여성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범국가적인 단체”로 이제 겨우 한 걸음 발걸음을 뗐는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공주님께서 이제. 절.대.로. 해외에 나가실 수 없습니다!!!”
혜원의 꼭지가 확 도는 게 느껴졌다.
“아니, 근위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제 겨우 자리 잡았다고요. 이제 겨우 NGO 단체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구요.
그 스케줄 잡느라 저희가 얼마나 많이 연락하고 로비한 줄 아세...”
“어쨌든 협.조. 부탁드립니다.”
단 한 마디도 먹히지 않았다. 혜원은 기가 막혔다.
“공~주님!!!”
한 마디라도 해보라는 듯, 혜원은 재신을 불렀지만, 재신은 고개를 저었다. 근위대장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리라.
“하.....”
혜원은 기가 막힌 것인지, 허탈한 것인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인사를 한 건지, 아닌지 애매한 채로 고개를 숙이는 듯하더니 홱 하니 돌려 저만치 걸어가 버렸다.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등의 말을 궁시렁거리며 말이다.
재신의 방으로 가는 길, 시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 근위대장인 것인지, 그냥 묵묵히 휠체어만 밀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딱 깨놓고 얘기해서 재신은 충분히 걸을 수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나날이 단단해져서 심하게 뛰는 것 외에는 뭐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시간이었던 걸음도 천천히만 걷는다면, 아니 중간중간 쉬기만 한다면 2시간까지 가능했고, 서 있는다면 더 이상도 가능할지 몰랐다.
그 정도로 재신의 다리는 이제 정상인에 가깝게 돌아오고 있었다.
또한 그만큼 대한민국의 첨단 의료 산업은 홍보가 되는 중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재신의 피나는 노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폭발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재신은 하루에 2시간씩 꼬박꼬박 재활 훈련을 하고 있었고, 해외 출장 중에도 물리치료사가 동행해서 훈련을 이어갔다.
결국 재신의 다리는 재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점점 건강해지는 중이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상황, 시경이 굳이 재신의 휠체어를 밀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공항에서부터 휠체어를 준비시키고, 재신을 안아서 앉힌 다음,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휠체어를 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마치 자신의 임무는 재신의 휠체어를 미는 것인 양, 그 누구도 그 일을 할 능력이 안 된다는 양, 굳은 얼굴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중이었다.
“누가 보면 노르망디 구출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줄 알겠네.”
“예?”
재신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궁시렁대자 시경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니에요.”
재신의 목소리는 담담하다고 해야 할지 딱딱하다고 해야 할지 사무적으로 들렸다. 재신의 방에 들어올 때까지 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에 들어와서도 재신은 시경을 빤히 쳐다볼 뿐,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쉬세요. 공주님.”
긴장한 채 눈썹만 문지르던 시경은 결국 후퇴를 택했다. 공주님께서 화가 나신 듯한데 그렇다고 자신이 그 화를 풀어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협상은 불가능했다. 해외 출장은 무조건 금지였다. 시경에겐 그랬다. 불리한 상황에서 후퇴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전쟁에서는 후퇴도 필요한 법, 무조건 진격하다가는 더 큰 출혈이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후퇴하려는 순간, 상대는 이미 자신의 전술을 눈치챈 듯했다.
“왜요, 불리하니까 도망가는 거예요?”
공주님은 휠체어에서 일어서서 시경의 팔을 붙잡았다.
시경은 침을 삼켰다.
“아...아닙니다.”
“뭐.가, 아니죠?”
“도망가는 거, 아닙니다.”
“그럼, 불리한 건 맞고?”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말 이럴 때 보면, 공주님과 전하는 쌍둥이 같다. 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가 없다.
“따라 와요, 은.시.경.씨.”
시경 씨가 아니라 은시경 씨.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데, 은시경 씨가 나왔다는 건,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그의 검은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걸음은 이미 공주님이 당기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재신은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더니, 옆 자리를 손으로 팡팡 친다.
“빨리 앉아요, 여기.”
“예...예?”
이상하게 얼굴이 홧홧해졌다.
공주님이 복귀하시고 그 첫 날 뜨거운 밤을 보낸 이후, 둘의 스킨십은 매우 후퇴된 상태였다. 손 잡고, 키스하고, 겨우 포옹하고, 그 정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궁이기도 했고, 공주님께서 치료 받기 전 자신의 집무실에서 그녀를 가졌던 이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자신의 약속을 목숨 걸고 지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바이는 사실 기대하기도 했다.
해외 출장. 궁에서 벗어나 공주님과의 시간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컨소시움 장소에 당도하자마자 계란 세례가 터지면서 그 모든 기대가 박살나고 말았다.
테러에 대비해서 경계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길로 바로 공항으로 내달려 전용기를 탔으니 말이다.
그렇게 두 달만의 해후는 계란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도대체 그녀를 제대로 안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상황인데 공주님이 지금 침대에 와서 앉으라는 것이다.
“빨리 와요. 뭐하는 거예요?”
“예?....예.”
쭈뼛쭈뼛대며 시경이 재신의 옆에 앉았다. 바로 붙어 앉으면 오해하실까 싶어 한 뼘 정도 띄우고 앉는 모습에 재신은 기가 막혔다. 이건 떨어진 것도 아니고, 붙은 것도 아닌...이 어정쩡한 거리를 어쩔 거냐고.
“빨리 옷이나 벗어요.”
“예에? 방금...뭐..그러니까...뭐...라고....?”
시경의 눈이 목소리만큼이나 심하게 흔들렸다.
“못 들었어요? 옷 벗으라구요, 옷!”
“공주님! 여기 궁입니다!”
놀란 시경이 정색하며 대꾸하지만, 재신은 뭐, 어쩌라고 라는 표정으로 끄덕도 없었다.
“내가 벗겨줘요?”
“아, 아닙니다. 제가....하...하겠습니다.”
갑자기 공주님이 왜 그러시는 건지,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재신의 단호한 목소리에 시경은 자켓의 단추를 풀었다.
“이건 내가....”
자켓을 천천히 벗자마자, 재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경의 와이셔츠 단추를 한 개씩 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시경의 가슴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셔츠 단추가 한 개씩 풀릴 때마다 시경의 심장은 튀어나올 듯이 뛰어댔다.
장난스러워 보였던 재신의 얼굴도 점차 붉어지는 듯하더니, 팔을 빼주면서는 착각이 아닐 만큼 빨갛게 물들었다.
사락사락 소리만큼 야했다.
뭘까 싶은 순간, 재신은 “돌아 앉아 봐요.”라며 전혀 예상에 없던 말을 뱉었다.
“예?”
당황한 시경의 궁금증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그의 팔을 밀어 돌려 앉혔다.
그러더니 재신은 시경의 등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 본다.
“아!”
시경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나왔다.
“쯧쯧...거봐요. 이럴 것 같더라니.....”
재신은 이상했었다. 달걀 세례. 겨우 그걸로, 사람이 다칠 수 없다 생각한 달걀 정도로 시경이 그렇게 화를 낼 거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시경이라면 그럴 수 있다. 재신의 일이라면 몇 만 배 더 예민하고 조심하는 사람이니.... 그러나 이상하게 시경의 분노는 예상을 초월했다. 출국 금지라는 초유의 강경한 태도며, 단 한 마디도 들어가지 않는 그 빈틈없는 단호함 때문에 재신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예상은 맞았다. 그까짓 달걀이 아니었다. 그의 등은 곳곳이 푸르스름했다. 아니 조금씩 보라색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달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자신을 온 몸으로 감싸 안았던 근위대장은 그 수많은 달걀 세례를 자신의 등으로 온전히 막아냈다. 도대체 얼마나 많았던 거지? 얼마나 세게 던진 거야? 왜 그렇게 시경이 화가 났는지, 왜 절대로 해외 출장은 안 된다고 한 건지,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퍼렇게 멍든 그의 등을 지켜보는 재신의 마음도 그랬다. 분노가 치솟았다.
“말을 했어야죠. 지금 당신 등, 어떤지 알아요?”
속상함과 화가 뒤섞인 그녀의 말에 시경의 어깨가 약간 움찔했다. 이 남자는 아마 자신의 등이 아픈 것보다 내 화가 더 신경 쓰이겠지. 재신의 예상은 맞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말이 돼요? 지금 은시경 씨가 못 봐서 그렇지, 당신 등, 엉망이라구요. 진짜....아, 열 받아.”
“풋~”
“지금...웃은 거예요? 사람 열 받는데, 자기는 웃는 거야, 뭐야?”
“흠흠, 아닙니다. 안 웃었습니다.”
“그럼, 뭐예요? 방금 내가 화내니까 웃었잖아.”
“행복.....해서요.”
“네에?”
이 남자는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시퍼렇게 멍든 주제에 뭐가 행복이야.
“공주님께서 절 걱정, 하시는 거니까......”
“당연하잖아. 내 애인 등을 이렇게 해놨는데, 열 안 받게 생겼어요?”
재신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서랍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시경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녀가 걷는 것,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 것이 낯설고 경이롭다. 자꾸 시간이 되돌려진 느낌, 맨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로 타임 워프가 된 것처럼...
돌아온 재신의 손에는 약상자가 들려 있었다.
“멍 든 덴 도대체 뭘 발라야 하지...? 이건가? 빨간 약도 안 될 테고, 뭘 해야....?”
“전, 괜찮습니다. 군인입니다, 저.”
“누가 뭐래요? 은시경 씨 군인인 거 모른대요, 누가?”
“군인에게 멍 드는 거 정도는 일상입니다.”
“알아, 알아요, 나도.
당신 몸 바쳐서 일하는 거 아는데, 멍 드는 게 일상이고, 부러지는 거 정도는 약과고, 폭탄 위에 몸 던지고, 총...까지 맞는 사람인 거 아는데.....
그런데...난....... 너무..... 싫어.”
“공...주님......”
“진짜....너무 싫어. 당신 다치는 거, 진짜.....진짜 싫어......”
시경이 그녀를 향해 돌아보려 하자, 재신은 황급히 그의 등을 다시 세운다.
코끝이 이상하게 자글자글해서 시경에게 들켜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똑바로 있어요. 약 찾았으니까......”
맨**담을 짜서 그의 등 곳곳에 묻혔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의 등을 문질렀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닿자 시경의 등이 눈에 띄게 움찔한다. 천천히, 최대한 아프지 않게 재신은 약을 문질렀다. 벗은 그의 등이 조금은 낯설었다. 그토록 그의 등에 업히고, 그의 등을 안기도 했지만, 정작 한 번도 제대로 그의 등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늘 단단하고 듬직하다고만 생각했던 그의 등인데 이렇게 눈으로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멍이 들기는 했지만, 그의 등은 역시 군인이었다. 군살 하나 없이 근육으로만 꽉 채워진 등. 등 위로 솟아올라온 그의 근육은 탄탄하다 못해 육감적이었다.
약은 이미 충분히 스며든 것 같은데, 재신의 손은 여전히 그의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아니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어깨선과 재신의 허벅지보다 더 굵은 듯한 그의 팔뚝까지, 그러다 날개 죽지를 지나 날렵한 허리선까지 재신의 손은 멈출 줄 몰랐다. 어쩌면 이렇게 몇 시간이고 만져도 질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의 구릿빛 등이 자꾸만 재신을 유혹했다.
하아.....
그때였을까. 한숨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그의 왼손이 그의 허리 쪽으로 내려오고 있던 그녀의 왼손을 잡는다. 그렇게 한참을 그의 손에 붙들린 것 같다.
“에휴....알았어요. 이제...그만 할....!”
그만하겠다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그녀의 눈 앞에는 시경의 검은 눈이 있었다. 그녀의 왼손을 잡아끌어 그녀를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그녀를 위에서 바라보는 시경의 눈은 깊게 가라앉기만 했다.
“시....시경 씨.....”
“이제.....이름....불러 주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지, 이름을 부르다니....계속 은시경 씨라 불렀구만.....아....그랬나? 내가? 시경 씨가 아니라 은시경 씨라 불렀나....
대낮이라서 그런 걸까. 그의 벗은 상체를 보는 건, 부끄러우면서도 유혹적이었다. 곳곳에 흉터가 있었지만, 확연한 근육들이 자리를 잡고 아우성대며 재신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아직도 나는 이 남자 앞에서 부끄러웠다. 그가 이렇게 내려다 볼 때, 이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때, 이 남자가 수컷의 향을 뿜어올 때, 진심으로 부끄럽다.
“공주님께서 먼저...유혹하신 겁니다.”
“어?”
그 말과 더불어 그의 숨결이 입술을 간질였다. 숨결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재신의 손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시간도, 공기도, 생각도 모두 멈추었다. 한 사람의 존재만 뚜렷해지며, 모든 감각이 입술로 밀려들었다. 그녀의 손이 정처 없이 떠다녔다. 그의 등을 헤매는 그녀의 손을 따라 남자는 자꾸만 수컷이 되어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공주님!! 공주님!!”
“네..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잠, 잠시만요!!!”
시경도, 재신도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궁중실장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재신이 엉망이 된 블라우스를 다시 정돈하는 사이, 시경은 이미 셔츠를 다 입고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빠른지, 군인은 옷 빨리 입는 것부터 가르치는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다시 근위대장으로 돌아갔다.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아. 네. 공주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멈칫 하던 궁중실장은 이내 감정을 숨기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 그게....근위대장님이 다치셔서 제가 치료....네, 치료해드리느라....그래서....”
뭐, 침대 협탁 옆에 적절히 구급 상자도 보였고,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궁중실장님의 시선을 따라가 본 재신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엉망진창이 되어 구겨져 있는 침대보는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뭔 일이 있었다고.....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시경은 흠흠 하고 목을 몇 번 추스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나가버린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해도 귀며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건 감출 수 없었다. 궁중실장님도 괜시리 목을 가다듬었다.
2
“근데, 그건 뭐예요? 안 무거우세요?”
궁중실장님은 직접 큰 박스 하나를 들고 계셨다.
“위생용품이라 안 무겁습니다.”
“아...그래도 궁중실장님이 직접 가지고 오세요? 죄송하게....”
“아닙니다. 공주님.
계속 쓰던 제품에 문제가 좀 있어서
이번 달엔 유기농 위생용품으로 바꾸느라 조금 지체되어서요.
공주님 부족하실까봐 제일 먼저 가지고 왔습니다.”
“아직 있지 않아요?”
“저번에 봤을 땐 한 달치밖에 없었거든요.
어? 근데, 진짜 아직 남았네요?”
늘 넣어두던 서랍장을 열어보던 궁중실장은 위생용품이 그대로 남아 있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렇다니까요.”
“근데 왜 남았지?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하는 궁중실장의 이야기를 곁에서 듣고 있자니, 재신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재신은 황급히 휴대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두 달 가까이 생리가 없었다.
“어!!!”
“왜 그러세요, 공주님? 무슨 일이라도?”
재신은 무언가 계산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얼굴이 어두워졌다.
“공주님?”
걱정이 된 궁중실장이 연거푸 묻고 나서야 재신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저번 달에 건너뛰었나 봐요.”
“아..... 피곤하거나 긴장하는 일이 있으면 그럴 수 있죠. 별 일 없을....어!”
별 일 없을 거라며 덧붙이려던 궁중실장도 순간 말을 멈추었다. 궁중실장과 재신의 눈이 마주쳤다. 비록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저.....구해주실 게 있어요.”
“예. 공주님. 제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뭐가 필요하신지는......
테스트기와.....흠흠....피임 도구도 같이 준비하겠습니다.”
그 말에 재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쪽 팔리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컴백했던 날, 그 파티에서 너무 달렸던 거다. 그 남자가 너무 오래 참았던 거다.
에휴......
3
어제와 완전히 다른 오늘. 전하의 화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근위대장은 그 옆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주군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필요하면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설쳐대더니,
허, 이제 와서 갈아 타?
이것들이! 대한민국의 왕이 우스워 보여?”
시경도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임기가 다 된 수상과 새롭게 선출되어야 할 수상. 지금 정국은 몹시 시끄러웠다. 기존의 수상도 왕실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왕실의 존폐까지 언급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유력하다는 새로운 수상 후보는 말끝마다 거칠었다. 아니 거의 싸움꾼이었다. 게다가 왕비님까지 걸고 넘어지는 듯했다.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둥, 지금 같이 안보가 중요한 때에 공조가 웬 말이냐는 둥, 재하의 심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의 주권은, 권력은 바로 국민입니다. 21세기에는 21세기에 맞는 정치가 이루어져야 합니......>
삐리링 소리를 내며 TV가 꺼졌다. 재하가 전원 버튼을 눌러버린 것이었다. 새 수상 후보의 연설은 대놓고 왕실의 존폐를 거론하고 있었다. 몰랐던 바는 아니었다. 세금만 많이 써대는 밑 빠진 독 같은 왕실을 지지하지 않는 자도 많았다. 게다가 대한민국 왕실 복지 재단이니 뭐니 하고 있으니 국외에 돈 퍼주지 말고, 국내에나 신경 쓰라는 말들이 빈번히 나오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억울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후우.......
재하의 한숨이 너무 깊다 싶은 순간, 방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이렇게 벌컥 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뭡네가? 뭘 그리 화딱지를 내고 있슴네까?”
항아가 얼마 전에 100일이 된 준이를 안고 들어오는 참이었다. 그 뒤로는 고모의 손을 꼭 잡고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 소리를 내며 현이도 들어오고 있었다.
“뭐냐?”
질문은 항아가 했으나, 재하의 시선은 그 뒤에 걸어들어오고 있는 재신을 향했다.
“당신은 아직 몸도 안 좋은데.......”
이내 재하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나온다.
“일 엄슴네다. 우리 북*조*선 군인은 말입네다. 이 정도로는 끄떡없는 거 아시지 않습네까.”
“알긴 뭘 알아? 당신도 이제 나이 들어가고 있다고.
이렇게 몸을 막 굴리면 안 됩니다. 왕비 마마.”
“거~ 참! 씁~!”
항아의 단호한 씁~ 한 방에 전하를 K.O.패 하셨고, 현이는 오랜만에 와본 아빠의 집무실이 좋은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사실 항아의 방에 찾아간 건 재신이었다. 다녀와서 괜찮은지 걱정하는 새언니와 회포도 풀 겸, 남정네들 욕도 할 겸, 그렇게 방을 찾아 갔던 건데, 틀어놓았던 뉴스가 문제였다. 새 수상후보들의 연설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유력하다는 보수당의 후보가 나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항아는 “개철철이, 속 좀 타겄네”라며 혀를 차다가 준이에게 모유를 먹이다 말고 벌떡 일어난다. 그러더니 재신에게 갑자기 나가자고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언니, 모유 먹이다 말고 어디 가자는 말씀이세요?”
“아가씬 일단 따라옵네다. 위로해줄 동무 한 명, 아이 좋아하는 동무 한 명. 만나러 가야 하지 말입네다.”
“예?”
“현이! 고모 손 잘 잡고 올 수 있지?”
“녜~”
“우리 현이가 고모 잘 ...거 뭐이더라....아, 에스코트, 에스코트 해줘야 한다? 알겠지?”
“녜. 현이 잘 할 수 있어요.”
어찌나 교육을 잘 시켜놓았는지 3살짜리가 에스코트라는 말도 알아듣는다. 아빠가 엄마 에스코트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크다 보니 어린 나이에도 그 말이 익숙한 듯했다. 그렇게 항아를 따라 온 곳이 재하의 집무실이었다. 지금 이곳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랄까.
현이는 뛰어다니다 못해 날아다녔다. 현이가 다칠까 노심초사하며 그 곁을 엄호하는 듯한 근위대장과 이 난리통에도 편안함을 유지하고 있는 새언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재하를 제3자적 입장에서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라는 듯 바라보고 있는 재신까지. 전쟁통이었다.
“그냥 냅두기요.”
“예?”
항아는 근위대장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보였다.
“다치실까봐......”
“고조 아가 동무들은 이리 박고 저리 박고 하문서 크는 겁네다. 뭘 그리 노심초사 걱정합네까. 사내 자식이 좀 피도 나고 부서져 가문서 크는 법이디요.”
항아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섰던 근위대장을 항아가 손을 쑥 내밀어 이끈다.
“왕비..마마.....”
“한번 안아 보시겠슴네까?”
“예? 제가 말입니까?”
설마 자신에게 말하는 건가 싶어 놀랄 대로 놀란 시경에게 항아는 아이를 그의 품 속으로 안겨준다.
“어...어....어........!”
단발의 비명인지, 아니면 대답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던져대며 시경은 아이를 안은 채 부들부들댄다. 항아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자 이케, 머리를 왼쪽 팔뚝으로 기대게 하고...잘 하시누만요. 오른쪽 손으로 아이 등을 감싸고.”
항아가 가르쳐주는 대로 시경은 아이를 감싸서 품에 안았다. 아이는 낯가림도 하지 않는지 시경을 보고 미소 짓는다.
“어.....!”
감탄인지 놀람인지, 시경이 어, 소리를 내자, 재하는 또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한 소리를 덧붙였다.
“야, 근위대장. 넌 어, 소리밖에 못하냐?
아까부터 어, 어, 어, 어, 소리만 내고 있냐.”
그러나 재하의 비꼬는 소리가 시경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지 시경의 모든 감각은 품 안의 아이에게 쏠려 있었다. 이래서 천사라 하는구나....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걸 지켜보다 재하는 한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재신을 슬쩍 보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해서 좋을 게 없으니, 아니 누군가는 그 말에 다칠 수도 있으니, 빨리 결혼해서 니 자식 낳아서 실컷 안아 보라는 말은 아무리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재하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어코 현이가 책상에 올라가서 슈퍼맨 놀이를 하다 떨어지고 만 것이다.
우와앙~
거의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울음 소리에 전쟁 경보라도 울리는 듯 온 집무실이, 아니 궁 전체가 울려댔다. 부모들이 현이를 달래고 있는 동안, 재신은 시경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시경 씨, 아이 좋아하는 줄 몰랐네요. 새로운 사실인 걸?”
“아.....예. 저도...몰랐습니다.”
“어? 뭐야? 시경 씨도 몰랐어요? 자기가 아이 좋아하는 거?”
“아, 그냥, 이런 느낌인 줄 몰랐습니다.”
“어떤 느낌?”
군인에게 너무 디테일을 요구한 것인지는 몰라도 표현을 찾느라 미간을 모으고 생각에 잠긴 시경을 재신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아이 냄새가, 아이의 품이 좋습니다.”
한참 만에 찾은 시경의 답이었다.
“왜 그게 좋아요?”
그 질문에 시경은 또 답을 찾아야 했다.
역시 한참 만에 시경이 입을 열었다.
“평범한....가족.....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젖먹이 아이에게서 가족 냄새를 맡았나 보다.
평범한 가족 냄새, 그가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 행복의 모습인가 보다.
그 말에 재신의 심장이 이상하게 자글거린다.
“제 꿈은.....그저 평범하게...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평범하게....살아가는 건데....
오늘 그 미래를 살짝 엿본 것 같습니다.”
아이의 얼굴에서 눈도 떼지 못하고, 시경은 홀린 듯 말을 이었다. 그가 이렇게 눈을 못 떼는 존재는 나 아니면 없었는데.... 재신은 이상하게 섭섭하고, 또 섭섭한 만큼 이상하게 짠해진다.
참 신기하다. 언니는. 이 모든 걸 어떻게 아는 걸까. 시경 씨 자신도 몰랐다는데, 언니는 어떻게 시경 씨가 아이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까.
“위로해줄 동무 한 명, 아이 좋아하는 동무 한 명. 만나러 가야 하지 말입네다.”
군인 출신이 어쩜 저렇게 섬세한지, 자신은 절대 따라가지 못한다고 재신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4
재신은 지금 막대기 하나를 비장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침에 약국이라도 다녀오신 듯 궁중실장님은 박스때기로 무언가를 안기고 가셨다. 엄청난 양의 테스트기와 수많은 피임 제품들...... 궁중실장님도 걱정되시긴 엄청 되셨나 보다. 시국이 이렇게 안 좋으니, 왕실에 대해 이토록 비판 여론이 높았던 적도 잘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유리한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궁중실장님도 걱정에 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궁 내에 있는 약국이 아니라 바깥까지 가서 조용히 사오신 것이리라. 봉투에 적힌 약국이 여기저기인 걸 보면, 의심받을까봐 아마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를 다녀오신 것이리라...
화장실에 들어가서 확인만 하면 되는데, 재신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걱정에 걱정이 밀려왔다. 이재신 이 멍충이, 바보! 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피임을 안 하냐.
처음 그와 관계를 가졌을 때도 궁중실장님의 도움을 빌렸었다. 사후 피임약이며 온갖 피임 제품을 품에 안기셨는데, 존스 홉킨스에서 재활하면서 홀라당 다 까먹은 거다. 아니, 아니다. 그냥 그 남자한테 내가 미친 거다. 너무 좋아서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든 거다, 내가.
그 와중에 시경을 떠올리자, 그것도 그 날 파티장을 떠올리자, 재신의 얼굴은 또 확 하니 달아올랐다.
미쳤어, 미쳤어. 이 호색한! 아니지, 이 호색녀!
나 이렇게 색적이었나.
틈만 나면 생각해대니.....
이건 다 은시경이 너무 섹시해서야. 누가 그렇게 근육 키우랬나. 등 근육은....에효....잔 근육들이 빽빽이 들어차서는 여자 맘을 이렇게 휘저으니.....어휴......
아무리 생각해도 재신은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어쩌면 시경보다 자신이 더 관계에 적극적인 것 같았다. 은시경은 수도승인지, 종교인인지 모르게 그저 무덤덤해 보이는데, 재신은 늘상 그 남자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으니...이건 무언가 밑지는 장사 같았다.
그래, 절대 아닐 거야. 아니야. 일리가 없지.
원래 규칙적이지도 않았는데 뭘.
사실 재신은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 생리주기가 규칙적이지 않았다. 아주 한참 동안 생리도 없었다고 한다. 비록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러다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3달에 1번, 2달에 1번, 이제 1달에 한 번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러니 사실 임신일 리가 없었다. 재신은 그렇게 몇 번이나 말하면서도 화장실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만의 하나, 그래도....그렇다 해도, 오늘 시경의 모습은 의외였다. 아이를 바라보던 눈빛은, 재신을 바라볼 때와는 달랐다고 해도, 그만큼이나 집중력이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그토록 애정하며 보는 것은 재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은근히 그 시선이, 그 따뜻했던 시경의 눈이 용기를 주었다.
그래, 에라 모르겠다!
임신 테스트기에 줄이 생길 때까지 막대기를 들고 있는 재신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려왔다.
뭘까.....된 걸까.....아닐까.....
만약 된 거라면, 시경 씨는 뭐라고 할까. 오빠한테는 뭐라고 하지? 엄마는....?
하아.....
어떻게 되겠지, 그럼, 어떻게 되지, 어쩌겠어. 죽이겠어? 살리겠어? 정 안 되면 다리가 다시 아프다고 몸져 눕지 뭐. 아프다는 데 뭐 어쩌겠어.
상념에 상념이 붙다 못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리고 문득 재신은 생각했다.
족히 5분은 지났겠다고......
그러나 막대기의 줄은 여전히 하나였다.
아니구나......
하아....
다행...이다.....
찰나의 순간 끼어든 이상한 감정, 스스로 인식하기에도 너무나 미묘했던 그 감정. 다행이다 라는 마음이 들기 전, 마치 불청객처럼 끼어든 그 감정.
그것은 분명 자신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실망’이라는 감정이었다.
미쳤구나, 이재신.....
정말, 미쳤구나......
테스트기를 쥔 채로, 재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5
“어, 웬일이냐? 바쁘신 몸이? 어디냐? 한국이냐?”
오랜만에 통화를 하게 된 듯, 재하의 목소리는 너무나 반가웠다.
툭툭 던지는 듯해도 오랜 친구를 향한 애정이 묻어나왔다.
“얀마, 영국 안 가냐? 그러다 작위 다시 회수 당한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 전하의 막역한 친구 이상우 씨였다.
“뭐? 내일? 뭐...난 상관 없고.
뭔 일 있냐? 갑자기 궁에 다 온다니....
그래, 와라, 와~! 엄마도 궁금해 하시더라. 니 소식.”
안 듣고 싶어도 시경의 귀에는 예민하게 다 들렸다. 뭐 집무실 안에서 못 들을 수도 없었다.
“들었지?”
“예?”
“모른 척 하지 말고. 이상우 온단다, 내일.”
“아....예.”
“긴장 좀 해야겠는데, 은시경?”
긴장해야겠다고 말한 건 재하였으나, 정작 실제로 긴장하고 있는 건 재하였다. 놀리는 듯 올라가 있던 재하의 입꼬리가 순간 정색하는 것을 근위대장이 놓칠 리 없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다.
<사족>
너무 오랜만이라 오랜만이라는 말씀을 드리기도 송구합니다.
3년 동안 평안하셨는지요?
37회를 쓴 것이 2015년 7월 10일이더군요.
적어도 2년 안에는 다시 돌아가야지 했는데, 1년하고도 일주일이나 더 넘겨 버렸네요.
제 일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올 봄부터 10년 동안 다녔던 직장을 옮겨 새로운 직장으로 오게 되었다지요.
남편도 봄부터 직장을 옮기면서 둘 다 참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작년 여름부터는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절벽의 끝에 서 있었달까요.
작년 연말까지는 재껴 딛을 틈도 없었는데, 돌아보니 지금 새로운 직장에서 그럭저럭 예전 경력 인정받으며, 훨씬 좋은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할 일이 많았습니다.
생존과 생활의 문제 때문에 글을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써 제 방에도 로그인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피해 다녔다지요.
그러다 이렇게 2년이 지나다 보니, 숨이 턱턱 막혀서요.
글을 쓰고 싶어서 미치겠어서, 결국 이렇게 글병이 지폈나 봅니다.
조금 일찍 출근하고, 조금 늦게 퇴근하면, 일도, 내가 해야 하는 것도, 또 내가 좋아하는 것도 모두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이렇게 38회를 올리게 되니 이상하게 뭉클합니다.
소식을 전하고 싶었으나, 제 일상을 일기처럼 올리고 싶었으나, 너무 오래 쉬고 있어 죄송한 마음에 그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온다면, 당기못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당기못을 올린 이후에야 제 일상도, 제 일기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너무 쉬어 버려서 37회까지의 이야기를 더 망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 써두었던 전체 시놉, 결말까지의 시놉을 보며, 또다시 글신이 근질근질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당기못을 다시 복습했는데, 뭐지, 왜 이렇게 야하지, 욕구 불만인가.... 뭐 그런 생각도 들고요.
시간이 지나서 읽으니 눈에 들어오는 부분들이 좀 달라지기도 합니다.
너무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어쩌면 이제 조용히 저만의 싸움만 남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완결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저만의 싸움.
6년 전, 수많은 분들이 그토록 다니러 와주셨지만, 이젠 주인이 오래 비워 흉가처럼 버려진 집에
열심히 청소하고 정리하고 그렇게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아직 와주시는 분이 계실지 알 수 없으나, 어쩌다 문득 아, 맞다, 하면서 찾아오실까봐 인사말 같은 사족을 남겨 봅니다.
천천히, 그러나 끝까지,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 글을 완성해 나가려 합니다.
혹 이 글을 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도 평안하소서.(__)
'더킹투하츠와 은신상플 > (은신)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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