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39 - 질투
1
상우는 점심 무렵에 궁으로 들어왔다.
“뭐야? 아예 대놓고 궁 출입을 하시겠다?”
재하는 친구에 대한 반가움을 시비조로 드러냈다. 재하의 말에 상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오셨습니까?”
근위대장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담담하고 낮았다.
“오랜만입니다.”
상우는 예의 있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뭔 일이야? 그냥 왔을 리는 없고, 바쁜 놈이 얼굴 보러 왔을 것도 아니고.
뭐야? 김원표야?”
김원표라는 말에 상우는 잠깐 놀란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김원표는 어제 새 수상 후보로 텔레비전 유세를 했던 인물이었다. 21세기에는 21세기의 정치가 필요하다며, 아예 대놓고 왕실 폐지를 운운하고 있었다.
“정확하진 않아. 그런데 내 촉이 그렇다는 거지.”
상우의 눈이 슬쩍 근위대장을 향한다.
“말씀 나누시죠. 나가 있겠습니다.”
근위대장이 그 시선에 눈치를 채고 나가려 하자, 재하가 말린다.
“있어. 근위대장이 들어야 할 내용인 것 같은데.
상관없지?”
재하는 상우에게 하는 말인지 시경에게 하는 말인지 모호하게 말을 던졌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에게 한 말일지도 몰랐다.
“뭐, 들은 거라도 있는 거야?”
도리어 상우가 물었다. 재하는 이미 무언가를 아는 눈치다. 벌써 궁으로 정보가 들어갔나? 상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당사자가 직접 알 필요도 있다 싶었다.
“두 사람, 잘 만나고 있죠?”
재하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것 같았던 상우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말을 걸자, 순간 시경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를 묻고 있는지, 무엇을 묻고자 함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예.”
시경의 대답은 짧았지만, 단단했다.
재하는 이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뭐냐?”
그냥 왔을 리가 없다는 촉은 이제 정확해졌다.
“저 두 놈, 일이냐?”
역시 재하였다. 순간 멈칫 하던 상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경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두 사람 사이, 공개되어도 되는 거야?”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우의 질문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공개. 그 말이 시경의 심장 저 깊이 내려앉았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는지도 몰랐다.
예전 어떤 배우 커플이 연애를 공개한 적이 있었다. 동하가 둘이 사귀는 줄 몰랐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도대체 누구인가 싶어 동하가 보여주는 동영상을 봤었다.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으로 나왔다는데, 남자 배우가 군에 가기 전에 상대 여배우와의 열애를 공개해 버렸다. 동하는 남자 배우가 이해된다고 했지만, 사실 시경은 그 남자 배우가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상대 여배우 입장에서는 밝히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경 입장에서는 그 남자 배우를 독선적이고, 여성을 배려하지 않는 인물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경도 지금은 그 남자 배우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그는 두려웠던 것이다. 연인을 혼자 두고 멀리 떠나는 것이, 자신이 군에 가 있는 동안 그녀를 향하는 관심과 대시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군에 입대하기 전, 이 사람은 내 여자라고, 임자 있는 사람이라고 온 천하에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욕망도 그럴지 몰랐다. 이 사람은 내 여자라고, 그러니 아무도 넘보지 말라고, 그리 말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자신의 권한 밖이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재하였다.
“그건, 저 둘의 문제만은 아니지.”
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말해 봐. 무엇을, 어디까지, 어떻게.”
“H그룹 쪽으로 브로커가 접근했어.
사진 한 장. 공주님은 확실하다고 하고, 남자 얼굴은 미상.
나도 직접 확인한 건 아니야.”
“요구는?”
재차 묻고 있는 재하의 목소리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의외로 담담했다. 상우는 역시 국왕은 다른 건가 싶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문제가 닥치면 더욱더 냉정해지는 재하가 대단하다 싶기도 했다.
“겉으로는 돈이야.”
“으음......”
“그런데 돈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거지.
우리를 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상우의 말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왜’에 대해서는 알 것 같군.”
“뭐?”
“간 보는 것도 맞는 것 같고.
김원표 쪽과 너네 쪽 중에 고민 중이겠지.
김원표 쪽도 나쁘진 않지만, 상대가 왕실이니 차라리 돈만 받는 게 리스크가 적으니까.
너네는 예전부터 유명했으니까.
너나 상희나 둘 다 왕실과 스캔들로 얽혀 있으니.......”
재하는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왜 굳이 그 브로커가 H그룹을 상대로 딜을 하고 있는지.
“그 놈 입장에선 남자 얼굴이 확인 안 된다면, 밑져야 본전이지.
찔리는 놈이 돈을 낼 테니까.”
“우리 그룹에서 막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원표 쪽으로 넘어간다면, 아주 효과적인 카드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상우가 막았다고 하더라도, 브로커가 김원표와 접촉한다면, 아니 김원표에게로 표가 몰리는 걸 확인한다면 브로커도 정치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왕실 반대파 김원표일지, 아니면 왕실일지 그 사이에서 여론을 보며 줄타기를 하는 중일게다.
재하는 알고 있었다. H그룹이 전혀 나설 일도, 돈을 지불할 일도, 막을 일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상우가 돈을 내겠다는 건, 바로 사진 속의 남자가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상우는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왕실을 위해, 아니 재신을 위해 해주고 있었다.
“고맙다.”
“Welcome.”
대화도 인사도 짧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그리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 어머니, 목 빠지게 기다리신다. 너 오랜만에 본다고 좋아하셨는데, 어서 가봐.”
상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경을 향해 눈으로 인사하고는 방을 나간다.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었다.
시경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했다. 자신이 등장하는 공주님의 스캔들. 그것도 이렇게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이 때에 자신이 실수한 것이다. 오랜 침묵을 깨고 시경이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전하.”
“뭐가?”
그래 무엇이 죄송하다고 해야 할까. 공주님을 만난 것, 공주님을 사랑한 것, 아니면 공주님을 사랑한 것을 사진으로 찍힌 것.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예상하고 있었잖아? 언제든 이럴 수 있다는 거.”
“.............”
예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자신의 욕망이 더 충격적이기도 했다.
그런 시경을 재하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둘이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제대로 사귄 건 얼마 되지도 않았다. 제대로 만난 건 1달도 안 되었을지 모른다. 재신의 수술에 재활까지 끼어들어버리니 둘은 아직 서로 감정 확인 정도가 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킨십의 진도는 나갔다 해도, 미래의 문제는 또 다른 것이었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
상우는 재하의 집무실을 나와 대비께서 계신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재신이 등장했다.
“어, 재신아!”
“상우 오빠, 완전 오랜만~!”
“와, 너! 진짜! 대단하다!”
상우는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재신이 신기한지 감탄사만 연속으로 뱉어냈다. 사실 재신이 돌아와 나름 쇼를 할 때, 상우는 해외에 있느라 참여하지 못했다. 뉴스에 기사마다 공주님의 기적이라 그렇게 난리를 쳐도 대단하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 어려운 수술과 재활을 잘 견뎌냈구나 대견하기만 했다. 그러나 실물을 보는 건 완전히 달랐다. 멀쩡히 걸어오는, 그것도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이 느껴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고 있노라니, 무언가 저 안에서 울컥하니 올라왔다.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목발을 짚고 걸었던 재신이었다. 그렇게 걷고 나서는 언제나 가쁜 숨을 내쉬던 재신이었다. 지금 재신은 그렇게 성큼성큼 걸으면서도 숨도 헐떡이지 않았다. 어린 날, 사고 이전의 재신을 보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재신이 자신 앞에 서 있었다. 그저 미소 지으며 서 있는데, 상우는 자꾸만 뭉클했다. 눈을 깜빡이며 겨우 감정을 참아내며 재신을 바라보았다.
“고생했다, 재신아.”
재신도 뭉클한지 젖은 눈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근데 무슨 일이야? 작은 오빠 보러 온 거야? 갑자기?”
상우는 순간 솔직히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근위대장에게는 말했으나, 재신이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아직은 막아줄 수 있으니, 아직은 걱정하지 말고 웃게 하고 싶었다.
“응. 그렇지. 그리고 너도 보고.”
“어? 나 보러 왔다구?”
상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갸웃하던 재신도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확인하러 왔구나? 이재신이 얼마나 잘 걷는지?”
“그래.”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듯 재신이 까불거리자 상우는 귀엽다는 듯, 재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엄마가 식사하러 오라셔. 아까부터 기다리시는 중.”
“아, 그렇지.”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좀 수다는 적게 떨고 밥부터 먹지, 뭐 하러 이재하부터 만나러 가냐?”
재신은 밝았다. 예전보다 훨씬 더, 작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밝았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다.
“이재신!”
“어?”
“행복하냐?”
그 말에 처음에는 멍한 듯하던 재신이 이내 환하게 웃는다.
“응. 엄청.”
그 미소에 상우도 덩달아 웃게 된다.
“그 사람은......잘해 주냐?”
순간 재신의 얼굴이 빨갛게 물이 든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재신은 말하기가 부끄러운지 고개가 끄덕끄덕한다.
“필요한 일 있으면, 나 이용해.”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언제나 이재신 편이니까, 이 오빠 이용하라고.
언제든지 이용 당해줄 테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재신이가 귀여워 상우는 또다시 재신의 머리를 살짝 헝클인다.
3
영선이 준비해둔 점심 식사 자리에는 이미 재하와 근위대장까지 와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니? 재신이 넌 상우 데리러 가서 수다만 떤 거야?
상우 배고프겠다.”
“아닙니다. 대비 마마. 제가 재신이 붙잡고 얘기하느라.....
죄송합니다. 시장하신데 저 때문에 식사도 못하시고.....”
“나야 노는 사람인데 괜찮지. 일하는 사람들이 시장하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영선은 시경을 보며 미안해한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 시경을, 재신이 슬쩍 바라보지만, 시경은 앞만 보고 앉아 있다. 앉다 보니 재신이 상우와 시경 사이에 앉게 되었다. 시경이 자리를 양보하면서 제일 끝자리로 가고 상우는 대비 마마 가까이 앉는 바람에, 결국 그 사이 자리에 재신이 앉게 된 것이다. 맞은편에서는 재하와 항아가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새언니, 애들은요?”
“현이는 진작에 먹였슴네다. 준이는 자고 있고.”
식사를 하는 내내 재신은 시경이 신경 쓰인다. 이상하게 자기 쪽으로는 아예 눈도 돌리지 않고 밥만 먹었다. 상우가 영선과 이야기를 나누며 재하와 항아가 틈틈이 끼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떨어져 앉은 재신과 시경은 사실상 대화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로운 상황이었다.
재신은 예전 생각이 났다. 식사할 때, 그에게 혜원과 선을 보라고 했었다. 아, 이재신 정말 사악하다, 사악해. 그때를 생각하니 또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 때 상우가 멀리 있던 반찬그릇을 재신 앞에 가져다준다.
“어?”
“너 좋아하잖아. 숙주 나물. 너무 멀리 있길래.”
“어...고마워.”
그런 두 사람을 영선이 흐뭇하게 바라본다. 에잇, 엄마 오해하면 안 되는데..... 약간 게름직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재신은 상우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 시경을 보면서 재신은 순간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 시경이 수저를 식탁 위에 올려버린다.
그제야 아까부터 시경의 태도가 이상하다 싶었었다. 처음 들어올 때,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본 것도 같다. 곁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신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지만, 온 신경은 자신과 상우 오빠에게로 쏠려 있는 듯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어쩌다 대화에 끼어들 때마다, 상우 오빠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의 어깨에 움찔하고는 했다.
처음에는 그저 오빠와 심각한 일이 있었나 싶기만 했는데,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아주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 자신과 상우 오빠를......
재신은 아예 확인사살을 해보기로 한다. 엄마 표 물김치를 상우 오빠 앞으로 옮겨다 주었다. 재하가 헐....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오빠, 이거 먹고 싶었지? 울 엄마 물김치, 완전 좋아하잖아?”
“큭. 알고 있네.”
상우가 한 입 떠먹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대비 마마를 흡족하게 해드리는 사이, 재신은 시경의 눈치를 살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주먹을 쥔 손 등으로 핏줄이 파랗게 올라와 있었다.
재신의 입가로 미소가 번져간다. 나 사디스트인가, 의심까지 든다. 그래도 좋았다. 대놓고 질투하는 이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 남자가 너무 좋았다. 속 끓이고 있을 남자의 마음은 어떨지, 그것보다도 그의 질투가 행복했다.
아, 유치해.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은 지금 참 유치한 짓을 하고 있었다. 중고딩들이 하는 짓을, 남친 질투 유발을 빙자로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이 손이 오그라들 만큼 유치했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이 단단한 군인 남자가, 그것도 이토록 매순간 조국과 왕실을 위해 목숨을 거는 명예롭고 원리 원칙주의자인 이 남자가 한 여자 때문에 질투하고 신경 쓰는 것이 좋았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두면 안 되겠지 싶었다. 내 남자 심장에 무리가 갈 테니......
그녀의 오른손이 테이블보 아래로 들어가 천천히 주먹 진 그의 왼손 위에 부드럽게 포개 놓는다. 그의 어깨가 움찔한다. 재신의 입에서도 미소가 번져간다.
4
처음부터 기분이 썩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 누군들, 아니 남자라면 그 누구나 선포하고 싶을 것이다. 이 여자가 내 여자라고, 아무도 넘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알고 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온 우주의 행운이 내게로 흘러온 것이니,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불만도 없다. 그러나 대비 마마께서 전하와 나까지 점심 식사에 초대하시고 나서, 분명 먼저 나간 사람이 그곳에 없는 것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시장하죠? 얘는 왜 이렇게 안 오니?”
영선은 기다리고만 있는 근위대장이 미안한지 말을 걸어온다.
“누구 말씀이세요?”
근위대장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재하가 묻자 정작 답은 항아가 한다.
“아가씨 아닙네까.”
“그래, 얘는 상우 데리러 간다고 해놓고, 왜 이렇게 안 온다니?”
영선의 그 말에 시경의 가슴이 답답해 왔다.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 남자가 궁에 왔으니, 그토록 오랜 인연이니 지금 아무리 남녀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당연히 만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벌써 머리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전하와 자신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상우는 대비 마마를 뵈러 간다고 했었다. 시계는 이미 40-50분 가까이 흘러 있었다. 시경도 재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궁인이 부르러 왔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이 곳 대비 마마의 응접실에 와서도 한참이 지났으나 두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찾으러 보낼까?”
영선이 참다못해 궁인을 부르려는 찰나, 식탁에 앉아 있던 시경이 일어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근위대장님이요? 그러지 말고 앉아 있어요.
다른 사람 보내면 돼요.”
“아닙니다. 대비 마마. 제가 가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안 그래도 찾으러 갈까 싶었는데, 대비 마마께서 사람을 보낸다고 하시니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그래도......”
근위대장이 그것도 밥 먹으라고 사람을 데리러 간다는 것이 영선은 못내 미안했다. 큰일 하는 사람에게 너무 사소한 일을 시키는 것 같았다. 결국 영선은 시경을 다시 식탁 앞에 앉혔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 응접실 문이 열렸다. 화사하게 미소 짓고 있는 공주님이 활짝 웃고 있는 그 남자와 함께 들어섰다. 공주님의 볼에 꽃물이 든 듯 화사하게 붉었다. 마치 좋아하는 남자라도 만난 듯, 그녀의 볼은 붉었고, 그녀의 눈은 빛이 났다. 두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잘 어울려 보일 것이다. 더 바라볼 수가 없어서 눈을 돌렸다.
그때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불안함이었다면, 그때부터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했다. 분노와도 같은 감정.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져 나가는 느낌.
그래도 참아야 했다. 남아 있는 이성의 끈을 겨우 잡고 있었다. 거의 사투를 벌였다. 벌떡 일어서지 않기 위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미친 듯이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앞으로 반찬 그릇을 옮겨주었을 때, 그녀가 마치 호응을 하듯 다시 그릇을 옮겨주었을 때, 수저를 놓았다. 대비 마마만 아니셨다면, 그녀의 손을 잡고 당장 데리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고 사투를 벌이던 그 때, 부드러운 손이 주먹을 쥔 손 위로 겹쳐졌다. 놀라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질.투.?”
그리고는 또 빛처럼 부서지는 미소를 환하게 뿌린다.
5
재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왼손으로 밥을 떠먹고 있었다. 재신은 생각했다. 자신이 왼손잡이인 게 참 다행이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밥을 먹으며 오른손으로는 그의 주먹 쥔 손 위에 장난을 쳐댄다.
예전 그가 자신의 손을 쓰다듬었던 것처럼, 자신도 이 남자를 안달 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마치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쓰다듬었었다. 그래서 가슴 저 안까지 뜨겁게 만들었었다.
나라고 못하겠어?
장난을 치고 싶었을까. 아니면 질투인지, 화가 난 이 남자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을까.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르겠다. 낮에는 전하밖에 모르는 이 남자에게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그렇게 드러났는지도 모른다. 궁 안에서는 사적인 만남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일하는 남자, 근위대장과 공적인 관계의 공주뿐이었다. 아니, 그런 관계로조차도 만나기가 어려웠다. 뭔 놈의 일은 그렇게 많은지, 이재하 때문인지, 아니면 천상 군인인 근위대장의 충성심 때문인지, 정말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웠다.
재신의 손이 주먹 쥔 그의 손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쓸어본다. 손등 위로 불룩 솟아올라 온 파란 핏줄을 따라 그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토록 단단하기만 하던 그의 주먹이 천천히 풀려간다.
재신은 조금 더 용기를 내본다. 용기인지, 장난인지. 시작은 뭐였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무언가 승부욕 같은 것도 있는 것 같다. 일밖에 모르는, 전하밖에 모르는 이 군인 남자를 뜨겁게 만들고 싶다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승부욕. 재신의 손가락이 풀어진 그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들어간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듯이 미끄러지며 얽혀들고, 그의 손가락이 마치 그녀의 손가락을 놓치기 싫다는 듯 다시 주먹을 쥐듯 오므린다. 아까까지는 재신의 손이 자유로웠으나, 이젠 재신의 손은 아래에 있는 그의 손에 묶여 버렸다.
그래도 아직은 재신이 유리했다. 그는 어차피 손등이니, 손바닥으로 그의 손등을 감싸고 있는 재신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묶이지 않은 엄지손가락으로 또다시 그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그의 손목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하아......
아주 작게 그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성공한 건가.....싶은 그 순간이었다.
어!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는 듯하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을 깍지 끼듯이 꽉 잡아 버린다. 너무 강해서, 재신은 그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왜 더 안 들어요? 입에 안 맞아요?”
시경이 수저를 놓은 것을 이제야 본 듯 영선이 시경을 향해 물어온다.
그 틈을 노리고 재신은 그의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아닙니다. 그게......”
시경은 곤란한 듯 대답을 얼버무리고 있는 와중에도, 재신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바로 앞자리에서 두 사람을 살피던 항아가 갑자기 빙긋이 웃는다.
“어머님, 아무래도 근위대장님이 소화가 또 안 되시나 봅네다.”
“어? 그게 무슨 소리니?”
“현이 애비가 하도 일을 시켜서 근위대장님이 소화 불량이람네다.”
이 무슨 소린가 싶어 재신도 시경도 항아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항아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한 쪽 눈을 찡긋한다.
“아, 왜 저번에 근위대장님이 부탁한 거 있잖습네까?”
“예?”
“제가 다니는 한의원 선생님이 지어주신 환약 말임네다.
내, 안 그래도 지어놓았는데, 바로 드시디요.”
시경은 금시초문이었다. 항아의 말을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희 방에 가시면 있는데......빨리 밥 먹고 준이 모유 먹여야 되니 제가 갈 수도 없고......
근위대장님 혼자 들어가시면 애매하실 터인데....
아! 아가씨가 같이 가셔서 찾아주시디요.
궁인들도 현이, 준이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서 방에 아.무.도. 없습네다.
처음 들어가시면 찾기가 어렵습네다.”
“예에?”
재신과 시경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응접실 협탁 제일 윗 서랍에 있을 겁네다.
어서 가서 드시디요. 아가씨도 같이 가서 좀 도와줍네다.
저도 날래 먹고 30분 내로 들어가겠슴네다.”
항아에 떠밀려 재신과 시경이 일어섰다. 시경도 어쩔 수 없는 듯 그제야 재신의 손을 놓았다.
“어서 가서 약 먹고 와요.
그렇게 일이 많았구나. 재하 너도, 근위대장님 너무 괴롭히지 말어!”
이제는 영선까지 재촉하며 아들을 타박한다.
“헐~!”
재하는 입을 벌린 채, 헐 소리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항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을 먹기 시작했다.
6
이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은 정말 뭔가 싶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를 놀리다가 일이 커져버린 것 같다.
방문 앞에 그가 서자, 재신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로 들어가자마자 새언니가 말한 협탁으로 가서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어, 어딨지?”
“뭐, 하십니까?”
“첫 번째 서랍이라고 했는데, 없는데요.
새언니가 착각했나?”
재신은 협탁 두 번째와 세 번째 서랍도 열어서 내용물을 살폈다. 그러나 항아가 말했던 한의원에서 받았다는 환약은 보이지 않았다. 약 봉지 비슷한 것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달칵.
문 옆에 서 있던 시경이 문을 닫았다. 아니 닫은 정도가 아니라 문을 잠갔다.
“뭐 해요? 지금?”
시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시경 씨?”
“...........”
대답 없는 시경이 이상한지 재신이 시경을 부른다.
“시경 씨, 아무래도 언니가 착각했나 봐요.
언니한테 전화해 봐야...어!”
항아에게 전화하려 재신이 휴대폰을 꺼내들자, 시경이 성큼성큼 걸어와 재신의 손을 잡는다.
“왜요?”
“저, 괜찮습니다.”
시경의 목소리가 단단하다. 그의 눈은 더 단단했다.
“네? 그래도 약은 가져가야죠.”
“약,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왕비님께 약 부탁드린 적 없습니다, 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재신은 한참 시경을 바라본다. 약 부탁한 적이 없다고? 그럼 그 환약은 뭐야? 아니, 그럼 시경 씨가 약 부탁도 안 했는데, 언니는 왜 환약 얘기를 했지? 부탁도 안 했다는 환약 찾으러 왜 나까지 보낸 거지? 시경 씨랑 나랑 왜 세트로 보낸 거야?
궁인들도 현이, 준이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서 방에 아.무.도. 없습네다.
언니의 말이 갑자기 확 떠오른다. 궁인이 없다는, 방에 아무도 없다는 언니의 말이 갑자기 머리를 웅웅 하며 떠다닌다. 그리고 그 말을 이해하는 순간 재신의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그의 눈은 여전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시경 씨......”
이상하게 떨린다. 그의 시선 앞에서 재신은 자꾸만 여자가 된다. 아까 그렇게 당차게 그를 안달 나게 만들던 전투적인 재신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한없이 부끄러운, 그래서 그의 눈을 피해 눈을 내려 깔고야 마는 수줍은 여인만 그곳에 남아 있다.
시경의 손은 여전히 재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시경의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는다. 그의 손길에 따라 자꾸 심장이 저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그의 손이 순간 멈춘다. 재신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순간, 그의 손이 재신의 손을 잡아 이끈다. 그는 그녀를 응접실 소파로 이끌었다. 그를 따라 재신도 소파에 앉았다.
“아까, 왜 그러셨습니까?”
“어? 뭐가요?”
그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재신은 애써 피하며 대답한다.
“왜, 제 손, 잡으셨습니까?”
재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잡은 게 아닌데...... 야하게 만진 건데......
“대답, 안 해주십니까?”
“화 났었잖아요, 시경 씨.”
“예?”
“질투한 건가? 왜지?”
약간은 전세가 역전된 듯했다. 마른 침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울렁댄다.
“상우 오빠, 우리 사이 알아요.”
시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 있는데, 왜 그랬어요?”
“남자니까요.”
“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당연히 남자지. 그러나 그 말은 중의적이었다. 누가 남자라는 건지, 시경 씨 자신인지, 상우 오빠인지.
“누가 남자라는 거예요? 시경 씨, 아니면 상우 오빠?”
상우 오빠라는 말에 시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이건 또 왜?
“둘 다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시경의 표정은 아까보다는 평화롭다.
“질투, 맞습니다.”
그 말에 이번에는 재신의 입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거봐.”
“남자는,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것만 봐도, 말만 섞어도, 싫습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요? 성급한 일반화 아니에요?”
시경은 아까부터 잡고 있던 재신의 손을 좀 더 힘주어 잡는다.
“그래서, 싫으셨습니까? 제가 질투해서?”
뭐야, 왜 이렇게 훅 들어와.
“내가...뭐...흠흠....싫댔나?”
시경의 입 끝에도 조금씩 미소가 번져간다.
“그래서, 아까 그러신 겁니까?”
조용하고, 단단하고, 낮고, 그래서 자꾸 재신의 심장을 살랑이게 하는 그의 목소리.
“아니....그냥....시경 씨 화난 거 같기도 하고, 풀어주고 싶기도 하고......
그랬다고요. 그리고......”
재신이 잡혀 있던 손을 빼내서 그의 손등을, 꾹꾹 누른다.
“여기, 여기.....이렇게 불뚝 솟아나와 있는 핏줄도 신기하고......
이봐, 엄청 올라왔어요. 신기해.”
재신은 정말 신기한 듯, 엄지손가락으로 시경의 손등 위에 올라와 있는 핏줄을 자꾸만 눌러본다. 그러나 이내 재신의 심장은 쿵 하니 떨어져 내린다. 그의 손이 재신의 볼을 감싸 왔다.
우리 할 거 다해 본 사인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돌아오자마자 할 거 다했는데......
재신은 자신이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게, 쑥스러워서 그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게 스스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건 다 이 남자 탓이다. 저렇게 깊은 눈으로, 저 깊고 검은 눈에 재신만 가득 담고서 바라보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만지는 그의 손길에 재신은 자꾸만 심장이 뛴다.
극한의 긴장감. 이게 뭐라고...... 우리 할 거 다한 사이야. 긴장하지 마.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세뇌시켜봐도 그녀의 볼을 쓰다듬는 그의 손은, 깊고 뜨거운 그의 눈은 여전히 심장을 떨리게 한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다가와 한숨 같은 숨결을 내뱉는 그의 입술은, 그 부드러움을 알기에, 아니 그 부드러움 뒤에 다가올 강한 남자를 알기에 재신의 심장은 설레기만 한다.
그녀의 손을 여전히 잡은 채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시경을 보며, 재신은 저도 모르게 살짝 소파 등받이 쪽으로 피했나 보다. 그가 다가오면, 설레기도 하지만, 겁도 난다. 감당하지 못할 감각이 벌써부터 저 안에서 올라온다. 밀려나는 그녀 때문에 애가 타는지, 시경의 오른손이 그녀의 목 뒤로 돌아가 감싼다. 밀려나지 못하도록, 도망가지 못하도록, 아니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그녀의 목을 끌어당긴다. 조금은 강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마주쳐 왔다.
하아.....
설레는 숨결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자, 시경은 그녀의 입술 안으로 깊게 침범해와 얽혀든다. 그녀의 혀를 쓸며, 쓰다듬으며, 자꾸만 얽히며, 그녀의 저 속에 감추어 두었던 감각까지 끌어낸다.
미치겠다, 이 남자.
너무 야하다.
그래서 너무 좋다.
재신은 시경의 목을 두 팔로 감싸며 그의 입술로, 얽혀드는 그의 혀로 자꾸만 깊게 다가갔다.
“궁인들도 현이, 준이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서 방에 아.무.도. 없습네다.”
그제야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새언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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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편 이렇게 가져와 봅니다.
끝맺는 연습,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써보고는 있는데, 써질 때도 있고, 안 써질 때도 있어 생각보다 좀 늦었습니다.
뭐 할 거 다한 사인데, 열애 초반처럼 둘이서는 설렘설렘하고 있네요.
더운 여름, 건강 유의하시길......
* 참 본문 내용 중 (현재는 헤어진) 배우 커플 이야기는 숙종의 와이프 관련 드라마(타임워프)로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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