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보던 49일이 끝이 났다.
여러가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드라마였다.
흥미진진한 면도,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도,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도, 모두 마음에 들었던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 모든 장점을 떠나, 그리고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교훈을 떠나 오로지 결말에 대해서만 말해보고자 한다.
모든 글쟁이들은 굉장히 좋은 글을 쓰고 싶어한다. 다른 글들과는 차별되는 뭔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듯한 글을 쓰고 싶어한다. 그러다보니 마치 자신이 대단한 누군가가 된 것처럼 누군가를 가르치게 된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분명 좋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글 속에서 얼마나 완결성을 지닐 수 있는가이다. 좋은 글을 쓰고 싶으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욕망, 글쟁이에게는 질적 욕구와 양적 욕구가 모두 존재한다.
질적 욕구를 강조하는 측에서는 양적 욕구를 지닌 글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비난하고 싸구려 취급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 글들은 그들만의 리그 속에 갇혀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의 외면을 오로지 대중들의 무식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양적 욕구를 강조하는 측에서는 "읽히지 않는 글이 글인가"라는 글쟁이의 아주 오래된 아킬레스건을 건드린다. 소설도 시나리오도 기본적으로 갈등이라는 것과 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어우러진 사건들로 메워진다. 그러나 대중들이 호응하는 글들은 분명 패턴이 있다. 인류는 아주 오랜 역사를 두고 그 법칙을 고수해 오고 있다. 거창하게 인류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근대의 태동이네 뭐네라는 역사가들의 말이 시작된 이래 이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법칙들이 고수되어 오고 있다. 막장이든, 출생의 비밀이든, 캔디형의 주인공이든, 신데렐라 컴플렉스든, 그 어떤 것이든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나라에서도 말이다.
<49일>은 겉으로는 양적 욕구를 충당하면서 질적 욕구의 측면을 담아내려 애쓴 글이었다. 물론 드라마다. 그러나 그것이 시연되기 전, 연기되기 전, 그것은 분명 글쟁이에 의해 적힌 글이니 그저 글이라 명명하려 한다. 어쨌든 <49일>은 같은 패턴을 가지고도 자신의 색깔을 입히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아주 오랜 물음을 깊이있게 던져보려 했다.
이 <49일>이 의미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양적 욕구라는 것 속에 질적 욕구를 지나치지 않게 넣어보려 한 것. 그 속에서도 무엇인가 삶에 대해서 성찰하게 한 것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49일>의 출발은 바로 이 양적 욕구 속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적 욕구라는 큰 틀을 결말에서 던져보려 한 것이다. 자신의 태생을 거부하고 급회전을 선택한 <49일>이 글쟁이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49일>이라는 드라마는 내게 아주 큰 교훈을 주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나에게 내 글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새드엔딩만이 마치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양 느끼고 있는 이 글쟁이들의 강박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강박이 어떻게 완벽한 드라마의 틀을 훼손하는지에 대해서....결국 <49일>은 탄탄했던 모든 구성을 깨어버리고 작가 자신이 드라마에 출현하고 말았다. 양적 욕구에서 갑작스럽게 질적 욕구로 가면을 쓰고, 작가는 그 사이의 간극을 자신의 생경한 구호들로 채워버렸다. 지금껏 녹여왔던 삶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어 생경한 말들로 채워버렸다. 그 결과는......이가 빠져버린 그릇처럼 군데군데 생채기를 내고, 야채를 잃어버린 샌드위치가 되고, 여러번 내려 이미 자신의 맛을 잃어버리고 식어버리기까지 한 커피가 되고 말았다. 심한 운동 후에 차가운 잔 속에 담긴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랄까? 잔이 차가워서 잔뜩 기대하고 들이켰는데, 그것은 어제 따놓은 미지근한 김이 다 빠져버린 맥주였다는 것이랄까?
하나의 글의 완성도란, 결국 작가적 욕심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글이 흘러가는 길이 있는데, 49일의 결말은 마치 그 흐름을 바꾸고 따로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려버린 기분이다. 그래서 결국 자연 제방은 무너지고, 홍수가 나고, 물고기는 떼로 죽어가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래서 아주 많이 아쉽다. 물론 내용은 마음에 든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 뜻이 어떤 의미이며,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동의한다. 그러나 아마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는 될 것 같지 않다. 새드 엔딩은 기억에 깊이 남아 좋은 글로, 좋은 드라마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것도 그 작품이 요구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강의 흐름이라면, 당연히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작가의 아집이자 자신만의 리그였다면, 결국 그 완성도는 그대로 깨어지고 만다.
<49일>을 보며 또 한 번 느끼게 된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말이다. 어쭙잖게 뭔가 기억에 남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얼마나 알량하고 맹랑한 것인지 배우게 된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은 행복한 결말인 듯하다. 괜히 뭔가 그럴싸하게 그리기 위해, 마치 좋은 글을 쓰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생경한 구호들과 선언들로 글을 채워서는 안 된다는 것. 쓰고 싶은 글의 반의 반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또 한 번 느끼게 된다.
살고 싶은 글,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글, 거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그래서 다시 또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싶은 글........그것이 내가 쓰고 싶은 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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