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이시네요/(미남) 신우 이야기

신우 이야기 52 - 그렇게 또 강은 흘러간다(전체버전)

그랑블루08 2013. 8. 3. 19:57

<신우 이야기> 52. 그렇게 또 강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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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My Lady - 정엽

넌 어디에 있니
어느새 낙엽은 바래졌는데
네가 떠나던 그 날
몸서리치게도 두렵던 그 밤

온통 내 맘에
모질게 남아 미련해진 내맘에
자꾸만 네가 내게로 돌아올 것 같아
바보처럼 기다리기만 해

you are my lady, you are my lady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말
you are my lady, you are my lady
네가 있던 그 자리로 돌아와

네가 좋아하던 말
나와 웃던 네가 울었던 그 날
내겐 하나 둘 모두
또렷하게 기억이나 모든 게

하지만 지금
내 손엔 네손이 아닌데 이렇게
그게 참 가슴이 아파 네가 없는 게
내 품에 네 맘이 없는 게

you are my lady, you are my lady
보고 싶어 그리워 하는 말
you are my lady, you are my lady
보고 싶어 미치도록 이렇게 널
this is my lady you are my lady

가사 출처 : Daum뮤직

 

 

1.

 

 

 

 

 

 

1등을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1등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꼭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무대가 주어져서 다행이라는 것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곡을 들어주시고 있다는 것이 감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저 곡이...지금 이렇게 부르고 있는 이 곡이 우리의 곡이었다면, 우리의 음악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알 수 없는 가사들로,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도 없는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솔직히....아주 솔직히.......

이 노래로는 절대로 1등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뭔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곡들로 적당히 버무려서는, 내용도 뜻도 없어서 감정을 넣을 수도 없는 이런 곡으로는 절대로 1등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조금은 공평한 세상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이 곡으로 우리는 1등 후보에까지 올라갔다.

뭔가 자조감이 생기기도 한다.

삶을 노래하고, 인생을 노래하고, 다친 마음을 위로하는 그러한 노래들은 이제 설 자리가 없는 것인지......

노래의 존재 가치가....그저 의미 없는 가사들과 단순하면서 비슷한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지......

내가 지금 왜 이곳에서 노래하고 싶다고 꿈을 꾸고 싶다고 말해왔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얘기해야 할까.

우리는 1등을 하지 못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신경이 쓰였다.

뭔가 쫓기는 사람처럼 1등을 해야 한다고 강박처럼 여기던 그였으니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형....괜찮아?”

 

발표 후 대기실에 돌아오자마자 종현씨는 미안한 투로 그 사람을 툭 치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래........”

 

그리고 잠시 후 들려온 그의 말에 한동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뻥한 채로 서 있었다.

 

“..........미안.....하다.....”

 

“뭐? 형이 왜 미안해? 이게 무슨 미안할 일이야?”

 

모두들 같은 마음이었다.

아무리 타이틀 곡 때문에 서로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해도 같이 노력해왔는 일인데,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그가 사과를 한다.

뭐가......미안하다는 것인가....

1등을 못해서?

그게 왜?

1등을 못한 것 때문에 왜 그가 우리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건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는다.

 

그러다가 전화를 받던 그가 갑자기 먼저 나가겠다고 한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전화였던 것처럼,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그는 나가려 하고 있었다.

 

“난.....먼저 갈게. 지훈이는 애들 숙소로 데려다 주고...난 알아서 갈게.

각자....숙소 가서 쉬고,, 내일 보자. 오늘 수고했다.”

 

“어? 형? 어디 가는데?”

 

그런 그의 팔을 정신이가 걱정스럽게 잡는다.

 

“임마! 뭐...죽을 데 가는 것도 아닌데, 왜 호들갑이야?

1등 못했다고 죽으러 갈까봐?”

 

이상하다.

농담을 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너무....비장하다.

이상하다.

그의 시선이 나와 부딪쳤다.

그의 눈빛이 진지하다. 아주 살짝 흔들리는 듯하더니 다시 엷게 미소를 짓는다.

이상하다.

자꾸만........가슴이 싸해진다.

 

“형!!!”

 

다들 같은 마음인 건지......나가려던 그를 잡았다.

생각해보면 담담해 보이는 그의 태도가 이상했다.

이번 무대에 서기까지 1등에 대한 그의 집착은 대단했다.

1등을 위해 자신의 음악적 자존심까지 버리며 히트메이커인 작곡가 곡을 받아왔다.

무조건 1등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달려가던 그가, 의외로 초연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그가.....우리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1등을 하고 싶지도, 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우리였는데, 1등을 원했던 건 그 사람뿐인데,

왜 그가 우리에게 미안해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마치......우리에게 큰 죄나 진 것처럼 미안해하는, 아니......가슴 아파하는 그의 태도 때문에 자꾸만 코끝이 시큰해진다.

그 사람 혼자 우리의 모든 짐을 지고 가려는 것 같아서, 그래서.......언젠가.....예전......우리의 리더를 보는 것 같아서.....

자꾸만 코끝이 시큰거린다.

 

“걱정 마! 내가.......꼭 지켜줄게!! 간다!!”

 

그 순간 그는........우리를 향해서, 아니 나를 바라보며......지켜주겠다고 한다.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눈은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마치....그곳에 나만 있다는 듯이, 나를 향해서 내게만 하는 말처럼 하고 있었다.

지켜줄게......

 

자꾸 울컥거리는 내 마음을 쓸어내린다.

 

 

 

 

2.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지켜줄게.....

도대체...뭘? 무엇으로부터? 누구를 지키겠다는 것일까?

나는 왜 그 말을 마치 내게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지키고 싶은 것은......도대체 무엇일까.......

물음들이 자꾸만 떠다니며 그의 눈빛을 내게 끌어온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그의 눈빛이 되살아나 심장을 답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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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을 견뎌냈는데.......정작......지금은......1분 1초도........견딜 수가 없어.”

 

그의 말이 내 머리를 정지시켰다.

어떠한 이성적인 판단도 할 수 없도록 그가 내게 주문을 걸고 있었다.

내 볼에 그의 손이 닿는다.

순간 나도 모르게 온몸이 떨린다.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두 주먹을 꼭 쥐어보지만, 그 주먹조차 떨리는 것 같다.

정말.....말도 안 되는 일인데.....정말......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인데........

직접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믿을 수가 없다.

그의 입술이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아닌데.....분명 아닐 텐데.......

감고 있는 그의 눈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인다.

그 순간 내 볼 위에 부드럽고 촉촉한 그의 입술이 느껴진다.

그 촉촉한 느낌은 다시 내게서 멀어진다.

내 눈 앞에 그의 감은 눈이 보인다.

천천히 그가 눈을 뜬다.

그의 눈이 자꾸......나를 울고 싶게 만든다.

다 잊었던......그 어느 날의 기억을 자꾸 꺼내게 만든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울 것만 같다.

 

돌아온 후.........그는 억지만 부렸었다.

내게 화만 내고, 내게 위압적인 행동만 했었다.

내게 키스를 해왔어도 그건 그저 나를 꺾기 위한 그의 정복욕에 불과했다.

그런데....지금 이 순간......그는.......2년 전...그 때처럼........안타깝게 나를 바라본다.

아니....더 이전......아주 오랜 후에 알게 되었던 그 예전 그의 마음처럼 애처롭게, 안타깝게 나를 바라본다.

모르는 척 하고 싶었던......나중에서야 알게 된 후, 몇 날을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저렸던........

그 눈빛을.......

감출 수 없는 그 눈빛을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그의 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그 눈빛이 갈망으로 바뀌는 순간.......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를 챘다.

 

착각하지 마라. 그는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를 밀쳐냈다.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해 소리쳤다.

 

“나가요! 다시는 여기...오지 말아요!”

 

내 흔들리는 마음을 문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두렵다.

이......반복되는 일들이......너무나 두렵다.

난......그 지옥 같았던 2년을......다시 견뎌낼 자신이 없다.

너무.....많이......걸어왔다.

돌아가기에는.......너무 많은 길을 걸어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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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멜로디가 들린다.

한동안 멍한 채로 서 있다가 내 휴대폰 벨소리임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황태경 씨였다.

 

“......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그는 대번에 내가 힘이 없다는 걸 눈치 챈다.

내 목소리에서 내 마음을 알아내는 그가 고마워서........자꾸 나약해진다.

 

“황태경씨.......”

 

“왜 그래? 무슨 일이냐니까?”

 

걱정스러운 그의 목소리......

왜 이렇게 나약한 거야? 고미녀.....

왜 이러니.......

 

“황태경씨.....나.......”

 

“그래.”

 

“나......가슴이......시려요.”

 

“..............................”

 

한참동안 황태경 씨는 아무 말이 없다.

 

“..................내가.............갈까?”

 

한참 후....들려 온 황태경 씨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고미녀! 너 또 실수했구나!

 

“..........아니요.”

 

“고미녀!!”

 

“미안해요. 오지 말아요.”

 

“왜? 나.....때문이 아니라서?”

 

“..............”

 

“미녀야?”

 

“뭔가.........잘못되고 있는 거 같은데........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는데........그런데......”

 

“그런데?”

 

“그 모든 게.......저 때문인 거 같은.......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무슨 소리야?”

 

“다........저 때문인 거 같아요.

그냥.....전부 다.......”

 

“고미녀!”

 

“네?”

 

“일단 끊어.”

 

“예?”

 

“일단 끊자구!!!”

 

황태경 씨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제서야 내가 왜 그랬나 싶다.

술도 안 마셨는데......미친 건가......

바쁜 사람에게 그런 헛소리나 해댔으니.......

옛날 황태경 씨였다면 이런 얘기를 꺼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전화를 끊고서야 내가 어떤 미친 짓을 했는지 명확해진다.

 

“정말....미쳤구나! 고미녀!!”

 

가슴이 시리다니.......어떻게 그런 말을 황태경 씨에게 할 수 있는지........

그 말에......열받을 만도 하다.

정말....대책 없는, 구제불능...고미녀다!

 

그래서......사람들이 술이라는 걸 마시는 것 같다.

술이라는 걸......마시고...미친 척이라는 걸 해보는가 보다.

딱...지금의 나처럼......

맨 정신으로 미친 척을 하고 나면, 사회생활이 안 될 테니까......

술마시고 미친 척하고,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는 척하는 거겠지.

그래야.........덜 뻘쭘하니까.......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주섬주섬 옷가지며 수건들을 챙겨서는 욕실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노란 빨래 비누로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다.

야밤에 미친 게 아닌가 싶지만, 이렇게라도 무언가를 문질러야 속이 뚫릴 것 같았다.

그래....이렇게 박박 문질러서 하얗게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고되게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빨래 방망이라도 사놓을 걸.....후회가 된다.

그렇게 팔이 빠지도록 빨래를 문질러댄다.

가져다 놓은 빨래의 반 정도를 문지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오늘 미남 오빠도 못 온다고 했고, 올 사람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11시가 넘어 있었다.

약간 무서운 생각에 인터폰을 보니, 목도리를 둘둘 말고 썬그라스를 낀 한 남자가 내 이름을 불러댄다.

 

“야! 고미녀! 빨리 문 열어!”

 

“네? 누구세요?”

 

“야!!! 빨리 열라니까! 나야 나!!! 니 별!!!”

 

“예?”

 

“별이라고!!!! 별!!!!! 스타~~~!!!”

 

스타? 별?

내 스타라니......황...태경씨?

 

“황태..경 씨?”

 

“야! 이름을 말하면 어떡해? 머리는 폼으로 들고 다니냐?

조용히 하고 빨리 문 열어!!!”

 

문을 여니까 정말로 황태경 씨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어!!!! 여기 웬일이에요?”

 

황태경 씨는 놀라는 나를 안으로 밀치며 황급히 들어왔다.

 

“고미녀! 아직까지도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면 어떡하냐?”

 

“예? 제가...뭘?”

 

“어휴~ 답답해서. 변장까지 해서 왔더니, 동네에 대고 내 이름을 떠들어대냐?”

 

“아....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내게 황태경 씨는 가볍게 꿀밤을 때리더니, 길쭉한 무언가를 내민다.

 

“이게....뭐예요?”

 

“뭐긴 뭐야? 니가.....아까...이거 달라며?”

 

“예?”

 

“뭐가...시리다며? 그 때는.....이게 최고야.”

 

길쭉한 쇼핑백 안에는 와인이 하나 들어 있었다.

 

“어...어? 술...이에요?”

 

“아니.”

 

“이거 술이잖아요.”

 

“아니, 포도주야.”

 

“예? 포도주가 술이죠.”

 

“술 아니야! 너....수녀님 되려고 했다는 애가 그것도 모르냐?

세례 때 쓰는 음료수잖아.”

 

“음료수요?”

 

내 말에는 대꾸도 않고, 황태경 씨는 주방으로 가더니 툴툴 대며 뭔가를 찾는다.

 

“뭐야, 유리잔 하나도 없어? 하여튼.......”

 

그러고는 머그잔 두 개를 가지고 와서 코크마개를 따고 와인을 붓는다.

 

“어? 이거...이렇게 쉽게 열리는 거예요? 신기하다.”

 

“아니거든. 너희 집에 와인오프너 없을 줄 알고, 내가 따서 왔어.”

 

“아...예.......”

 

“자...마셔!”

 

“황태경 씨...전.....술...못 마시는데.....”

 

“알아 아니까 마시라구! 이건 술 아니고.....음료수야.

니가 믿는....그....예수님도 마셨잖아. 그러니까 너도 마셔!!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신부님들도 마실 걸?”

 

“황태경 씨!!”

 

“자~ 그냥 마셔라. 이럴 땐 술과 잔과, 같이 마셔줄 사람만 있으면 돼.”

 

“안주가 아니라...잔이에요?”

 

내 말에 농담을 하며 건들대던 황태경 씨의 눈이 잠시 진지해진다.

 

“나한텐......잔이 더 중요해.”

 

“왜요?”

 

“왜냐하면........병나발을 부는 건.......정말.....평생에.....웬만하면.....안 하는 게 나아.”

 

“무슨 소리예요? 황태경 씨가 무슨...병나발을 불었다고.....

황태경 씨는 혼자서 마셔도 우아하게 멋진 잔에 촛불 켜고 분위기 내면서 마실 것 같은데요?”

 

“살다보니까........3가지 조건 중 딱 한 가지만 있는 경우도 있더라.”

 

왠지 그의 눈이 슬퍼보인다.

왠지.....그 날이....언제인지....알 것 같다.

 

“그래서....왔어요? 나 혼자.....병나발...불까봐?”

 

“그래......우울하게 혼자서 소주로 병나발 불까봐....

좀 우아하게 우울해 하라고 와인 가져왔다. 됐냐?”

 

그가 건네주는 대로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쓴 맛이 목을 타고 위로 내려간다.

그 가는 길마다 타들어가는 것 같다.

 

“맛있냐?”

 

“아니요. 써요.”

 

“그러니까........”

 

“예?”

 

“그러니까.......인생이 술이고, 술이 인생이지.

스위트도 있지만, 그건......인생을 느끼기엔.......느끼하지.

드라이로 인생 드라이하게 말려 버려야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황태경 씨를 뚫어지게 보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와인 한 잔을 그대로 비워버린다.

 

“고미녀......너....어떻게 된 게 요즘이 더.....힘들고 위태로워 보여.”

 

“,,,,,,,,,,,,,,”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들도, 지금 이 순간보다는 견딜만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나는 다시 또 한 모금 마신다.

 

그래.....인생도.....이렇게 드라이하게 말려버렸으면 좋겠다.

 

“미녀야.....타이밍이란 거 아니?”

 

“네?”

 

그는 다시 한 잔을 가득 붓더니 말릴 새도 없이 한숨에 다 마셔버린다.

 

“생각해봤어.

어머니와....너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너의 어머니와 너의 아버지......

....거기에...너와 나.......”

 

그래 어쩌면 그와 나는 지독하게 얽혀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인연이라 해야 할지, 지독한 악연이라 해야 할지......

어떻게 이렇게도 꼬일 대로 꼬인 건지.......

 

“내가...그 때.....너를 잡았다면...처음부터 내가 너를 먼저 사랑했다면, 그 때 더 많이 사랑했다면....달라졌을까?”

 

“황태경씨....”

 

그는.......취한 걸까........아니면 술에 빌어.......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또 다시 생각해봤어....

그 동안.....니가.....미치도록 괴로울 때....내게...다시 기회가 온 것이라고도 생각해봤어......

그런데.........이미........시간은 지나갔더라........

그 시간이...내게 다시 돌아와줄까........

그건.....알 수 없는 거겠지.........

순간은.......늘.......지나가고만 있는 것 같아.

잡으려고 보면, 이미 지나가버렸어.

 

그땐 왜 몰랐을까....그 순간이...얼마나 저리도록 소중한 것이었는지.....

왜 그 때는 그렇게 함부로 보냈을까.......

그....시간들을.......

 

어머니는......왜....그 순간에는 몰랐을까......

나도.....똑같은 거지......

그 순간에는 몰랐던 거지........

풋~! 잘난 척하다가.....나도 어머니도 된통 당한 거지.

그것도.....고미녀와 고미녀 아버지에게......큭큭...."

 

“황태경 씨........”

 

“고미녀! 나...딱 한 번만 얘기할게. 다시는 이런 말 안 할 거니까 잘 들어!!

너......지금도 시간은 지나가고 있어.

가까운 미래에 어느 날...넌.....지금 이 순간을 또 후회하게 될 지도 몰라.”

 

“네?”

 

“그 때....이랬으면 어땠을까.......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달라졌을까......

뭐 그런 부질없는 후회를......

그 어느 날엔가 하게 될 거야.

나처럼....그리고.....내 어머니처럼, 그리고 니 아버지처럼........”

 

그의 말처럼.....나도 후회하게 될까........

 

 

“지금밖에 할 수 없는....그런 일을 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은....하고 싶은 일은 다 해 봐.

그래야........잡을 수도......놓을 수도 있어.”

 

흘러가 버린 시간들을.......어떻게 잡을 수 있는 것일까.

너무 많이 흘러왔는데........

 

“어쩌면.....난.....계속 그 자리에 있었지만......이미.....흘러내려와 버렸어요.

인생이.....마른 땅 위에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강 위에 있었나 봐요.

흐르는 줄 모르게......흘러와 버렸네요.”

 

잠시 나를 보던 황태경 씨가 내 빈 잔을 채워준다.

 

“그래......그러면......흐르는 대로.....내버려두자.”

 

 

 

 

3.

 

 

 

“오늘.......고마워요.”

 

 

“섭섭하게 무슨 말이야? 또 불러!

얼마든지 와 줄테니....

여튼 고미녀! 넌 복받은 줄 알아!

이 천하의 황태경이 달려와 주는데.....”

 

“쉿!!! 황태경 씨!!! 누가 들어요. 어서 가요!!!”

 

“알았어!! 잘 자......”

 

그 때 갑자기 황태경 씨가 나를 안았다.

난 놀라서 그의 품에서 얼른 벗어났다.

 

“지금....뭐해요? 빨리 가요!!!!”

 

그렇게 깜짝 놀라는 내게 그가 낮게 속삭인다.

 

“힘내라 고미녀! 니 말대로......강은 흐르고, 바다로 나아가게 마련이야.

그리고 이건.....황태경의 마지막 보너스~ 프리 허그~~~”

 

그는 내게 손을 크게 흔들며 다시 위장을 한 채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서서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은 다시 싸해진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내 이별의 끝, 내 사랑의 끝에서 다 알면서도 위로해 주는 그의 벗으로서의 마음이 고마웠다.

적어도 오늘 그는 내게 남자가 아니라 벗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고맙고, 또 미안했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날 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 역시 그에게 벗으로서 있고 싶었다.

적어도 그의 등을 지켜봐주고 있다고.....

비록 그의 여자로 있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벗으로서는 그의 외로운 등을 나도 지켜봐주고 있다고.....

그의 등을 향해서 배웅을 한다.

 

이제 들어갈까 싶은 그 순간, 엄청난 힘이 문을 열어젖혔다.

 

“헉!!! 누구세요!!!!”

 

문을 닫아보려고 해도 상대의 완력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순간 생각했다.

 

밖으로 뛰어나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어떻게든 뛰어나가야 한다!

 

도둑이라 여겨서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긴장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그 사람이었다.

그가.......지금 내 눈 앞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가 올 리가 없는데.......

이건 뭔지........

착시 현상인 건지.......

 

“강......신우 씨? 여긴.....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지만, 내 목소리는 마치 남의 것인 양 낯설게 떨리고 있다.

 

 

쾅!

 

 

그는 내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화가 난 것처럼 나를 현관 벽쪽으로 밀어붙인다.

전자도어가 닫기는 소리에 순간 겁이 덜컥 난다.

그의 눈빛이....예사롭지 않다.

 

“강신우씨!!! 지금 뭐하는 거예요!!!!”

 

뭔가가 위험하다고 내게 경고를 해댄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대지만,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는 그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두 팔 사이에 나를 꼼짝 못하도록 가두어버린다.

그의 눈이 너무 가까이에 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에게 닿을 것만 같아서 숨쉬기도 어려워진다.

 

“왜......이래요?”

 

강하게 다부지게 말하려 해도 내 목소리는 떨린다.

그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숨이 멎는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마치 불에라도 데인 것처럼 뜨거워진다.

그는 지금 화가 나 있다.

도대체...왜...그가 화를 내는 건지 알지도 못한 채 나는 겁에 질려 있을 뿐이다.

 

“너에게........난........뭐야.........”

 

그러다가 나온 그의 말은 도저히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그의 목소리가 지금 상처입은 것처럼 들리는 건지 알 수 없다.

그가...내게 왜 이러는 건지.......고통스럽다.

 

“무슨....소리예요?”

 

“과거에...한 때 스쳐지나간....남자.....

실수였던 거니.......?

너의 별에게서 너를 잠시 빼앗아간......그런.....장애물이었던 거야?”

 

“강신우씨!!!!”

 

“늘...같은 자리야.

열심히 걸어간 줄 알았는데......

열심히....니 마음 한 자락을...잡은 줄 알았는데.....

난....늘....같은 자리야.......”

 

같은 자리?

도대체 뭐가?

뭐가 열심 걸어가?

지금.....이 사람은....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 차갑게 돌아섰던 이 사람이...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니 눈엔.........내가 보이긴 하니?”

 

속에서 정말로 뭔가가 울컥 하고 올라와 내 식도를 잠식해 버렸다.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거린다.

 

보이냐고?

당신이 보이냐고?

 

그는....절대로 내게 이래서는 안 된다.

이제 와서....이런 말들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내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이런 말들을 쉽게 내뱉는 거지?

 

“이러지....말아요........왜..이래요...진짜!!!!”

 

고통 속에서, 분노 속에서 절규해 보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미녀야!!! 나...안 보여?

니 눈엔.....내가 안 보여?

나 좀.....봐 주면 안 되니?”

 

정말....기가 찰 일이다.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양......상처입은 모습을 하고 있다.

누가......도대체 누가 상처입었는데........

누가 누구를 상처입혔는지.....

그는.......순식간에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꿔버렸다.

 

“강신우!!!!!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한테 왜 이래? 정말 왜 이래?!!!”

 

그 순간 울컥해버렸다.

분노인지.....눈물인지...억울함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내게서 흘러내린다.

마치......피눈물처럼 흘러내린다.

 

그래....지금 난 울고 있다.

너무 화가 나서.....

너무 억울해서.....

당신은......내게 이래서는 안 되는 거다.

 

“난....난....미녀야......

내 시간은......2년 전에 멈춰 있어.

내 시간은......그 때 이후로 흐르질 않았어.

넌 내게.......늘......지금이야.

아니? 내게...너라는 존재는 말이야.

늘....이렇게 살아 숨쉬는 현재야.

타협도 할 수 없고, 적당히라는 것도 없고,

오로지 이렇게 올인하게 하는....나의 현재.....나의 지금.......

그게.....고미녀야.”

 

“신우 형!!!! 나한테.......왜 이래 정말!!!!”

 

내 머리가 정지하고, 내 이성이 정지한 그 순간,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삼켜버렸다.

화가 난 듯한 그의 입술과 내 입술이 얽혀들었다.

그는 마치 야수처럼 내게 덤벼들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그의 혀는 내 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을 밀어보지만, 그는 완강하게 내 몸을 끌어안고, 내 안으로 깊게 들어왔다.

숨도 쉴 수 없고, 피할 수도 없이, 그의 입술은 내 입술을 가져버렸다.

도망치려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강하게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정신을 잃을 것처럼 그의 입술은 집요하게 내 입술과 혀를 삼켜버린다.

반항하던 모든 힘들이 빠지고 만다.

그리고.......그저......열에 들뜬.......두 남녀의 비명 같은 숨소리만 들린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필름이 끊긴 것처럼....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왕가위 감독의 영화처럼.....장면들이 떠다닐 뿐이다.

내가 아닌 한 여자와, 그가 아닌 한 남자가........서로를 품어보려, 서로의 숨결을 느껴보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서로 부대끼고 있을 뿐이다.

 

끊긴 듯이 흐르는 장면 속에서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안겨 침실로 들어간다.

순간 순간 열에 들뜬 그의 입술과 슬픈 그의 눈빛이 엇갈린 듯 묘하게 어울린다.

다시금 다가오는 남자의 입술 앞에 여자의 입술은 다시 빼앗기고 만다.

숨결이 얽히는 가운데 그의 손길은 깊어진다.

 

또 다른 장면은 여자의 심장 가까이 다가가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심장에 입술을 대고 줄기차게 입을 맞춘다.

여자는 맨살을 드러낸 채로 남자의 입술에 흐느끼듯이 소리를 낼 뿐이다.

 

자극적이고 야한 영화는 점점 깊어진다.

장면들은 더 이상 연결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떠다닌다.

한번은 그의 뜨거운 입술이 드러나고, 또 한번은 그가 훑고 지나간 여자의 심장과 가슴을 붉게 드러내기도 한다.

또 다시.......필름은 끊어진다.

 

“하아............”

 

뜨거운 한숨소리가.........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 순간......바로 그 순간........

영화는 끝이 나고, 여자는......현실로 돌아온다.

 

나...........지금........뭘 하는 거지?

 

그의 손길이......

내 몸을 훑고 있는 그의 뜨거운 입술이......

순식간에 낯설게 느껴진다.

 

나..........지금.......뭐 하는 거야..........

 

식어가는 여자의 입술 위로 남자의 입술이 다가와 다시 깊이 깊이 들어오려 한다.

여자는........더 이상......그 입술에 반응할 수 없다.

눈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뜨거운 것이........흘러내렸다.

 

마치........자신의 것인 양 품고 있던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놓아준다.

서서히........그가 멀어진다.

그의 눈빛도...........슬프다.

그의 슬픔이...........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의 손이 옷을 여며준다.

미소를 짓는 듯한 그의 입술은..........눈과 묘하게 대조적이다.

 

그의 눈이 슬프다.

그래서 또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내 볼을 닦아준다.

 

“이렇게....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

 

“내가...말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한다고........

뺨이라도 때려버려야지.......

너한테........이런 짓을 하는 놈을 그냥....놔두면 어떡해?”

 

“...........”

 

“나....오늘....진짜...나쁜 놈이다?

아주.....나쁜 놈으로 왔어.

니 마음에 다른 별이 있다는 거 알면서......

그놈한테 안 뺏길려구.......내가.....너 억지로 뺏으려고 왔다고......

근데.....너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그의 손이.....내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자신이 나쁜 놈이라면서......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내 볼을 만진다.

 

“여전히.......예쁘구나.......

너무 이뻐서.......자꾸.......나쁜 놈이 되고 싶은데.....어쩌지?”

 

그는 내 눈 위에 입을 맞춘다.

아니....어느 틈엔가 맺혀 버린 눈물을 먹어버린다.

이마에, 코에, 볼에......그리고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그렇게 가벼운 입맞춤을 한다.

 

어쩌면 황태경 씨는 지금 이 순간을 예언했었나 보다.

 

“그 때....이랬으면 어땠을까.......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달라졌을까......

뭐 그런 부질없는 후회를......

그 어느 날엔가 하게 될 거야.

나처럼....그리고.....내 어머니처럼, 그리고 니 아버지처럼........

 

지금밖에 할 수 없는....그런 일을 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은....하고 싶은 일은 다 해 봐.

그래야........잡을 수도......놓을 수도 있어.”

 

황태경 씨의 말이 자꾸만 심장을 움직인다.

그 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그 먼 미래의 내가.....타임머신을 타고 간 것처럼 뚜렷이 보인다.

후회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현실 속에서......그가 다시 한참동안 내 눈을 바라본다.

아주 엷게......그의 입술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그 미소가.......더 슬프게 보인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언젠가.....미래에 그 어느 날.....

이 날 왜 그랬을까.....왜 그런 말을 했을까.....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저......오늘 밤만.....이 밤만은 착각하고 싶은......그런 순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상처받았던 내 심장에 마지막 위로의 선물을 주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언젠가.....후회할지도 모르는......그 말을.....하고야 말았다.

 

“가지고 싶으면......가져요.”

 

“뭐?”

 

“나.....가지고 싶으면.....가지라구요.”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는 당황했는지 갑자기 뒤로 물러나서 앉는다.

나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언젠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을 해본다.

마치....그 어느 날로 돌아간 것처럼......

 

“나...........오늘만......당신을......2년 전.....신우 형으로....아니 신우 오빠로 생각할게.”

 

“미녀야........”

 

“나.......아직......작별인사도 못했거든요.

내가 사랑했던........내가.....정말......살아있는 게 감사하게 해줬던.......

그 사람한테........잘 가라는 말을 못했어.

그러니까......오늘만.......지금 이 순간만........내가 사랑했던......그 사람이 돼줘요.”

 

그의 눈빛이 아주 많이 흔들린다.

그래......난....아직 그에게 안녕이라고....잘 가라고..... 정말 사랑했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신께서는 내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계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난....이 말을 하고 싶어서 아직까지 그에 대한 줄을 놓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그런데.......그 사람이 되어달라고......내가 사랑했던...나의 그 사람이 잠시만 되어달라고 한 순간.......

내 모든 방어벽들이 다 깨어지고 말았다.

아니다.

내 방어벽이 부서진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로.....내가 사랑했던........너무나 그리워서 가슴을 쳤던.....나의 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나의 신우 형이....나의 그 사람이.....내 앞에 있다.

내 손으로......그의 눈을, 그의 볼을 만져본다.

그 사람이다.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하코네의 어느 여관에.......그 곳에 있는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바로 그 밤으로 돌아간 것 같다.

 

“ 그냥.......당신을 생각하면 고통 없었던......그 어느 날로.......단 한 번이라도 돌아가 보고 싶었어요.

아무 고통 없이.....당신을 생각하고, 아무 고통 없이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던........그 때로......”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볼에 입술을 대고, 그의 까칠한 턱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늘........갖고 싶었던........그의 입술에.......내 입술을 놓았다.

까칠해진 입술은.....마치 그때처럼......여전히 따뜻했다.

자꾸 가슴이 울컥한다.

눈에 자꾸 뿌옇게 끼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을.....갖고 싶어요........”

 

“고미녀!!!! 너...지금.......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하는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가......하꼬네에 있었던....그 날인 것처럼.......생각해요.

우리가......서로를......가질 뻔 했던......그 날인 것처럼......

그 날이.....선물처럼 다시 주어진 거라고........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나는 다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2년 전....그 날........하고 싶었던.......말이 있어요.

그러니까........그 때처럼.........받아줘요.”

 

“미녀야..........”

 

그는.....이미...그 날로 돌아가 있었다.

그날처럼 따뜻했고, 그날처럼 이 순간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처럼 가슴 설레 하며, 또 그날처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아니 그래서 말하고 싶었다.

 

“사랑.....해요......신우 오빠.......

나 당신을........아주 많이........사랑......했어요.......”

 

그때였다.

그는 내 입술 안으로 아주 깊이 들어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의 혀는 내 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입을 맞추는 채로 그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혀는 내 안으로 더 깊이 깊이 들어왔다.

스물한 살.......그 어렸던 나이에.......그의 손길을 처음 느꼈던 그 순간으로 돌아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은 점점 더 깊어지고 거칠어졌다.

그의 손은 자신이 여미어 놓았던 내 블라우스의 단추를 다시 풀고 있었다.

그 사이로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 몸을 떨렸다.

이제 그의 손길은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현실의 그로, 고통 없었던 순간의 아름다웠던 그 사람과 나로 돌아와 있었다.

현실감으로 가득찬 순간........

야한 영화가 아니라, 이어지지 않는 장면의 흐름이 아니라,

살아 숨쉬고, 느끼고 만져지는 그와 내가 되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며 애무하기 시작했다.

입술 사이로......낯 뜨거운.....소리들이 새어나온다.

이를 악물어 보지만, 낯선, 그러면서도 저 아래까지 떨리게 하는....자극적인 느낌에 또 다시 한숨이 새어나왔다.

(중략)

그의 혀에 온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다.

그가 깊게 들어올 때마다 내 몸은 노래하고 춤을 춘다.

 

(중략)

 

그가 멈칫하며 내 눈을 본다.

 

“.....싫어?”

 

“...............”

 

가지고 싶다고 말해놓고서도.....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내가 싫다.

 

“후회하니?”

 

“아니요!”

 

(중략)

 

그러자 그의 손이 다시 내 손을 막는다.

 

“내가.......하게......해 줘.”

 

 

그렇게 우리는 신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으로 돌아갔다.

어떤 이물질도 없이, 어떤 욕심도 없이

그저 신이 주신 선물인 상대를 벅차게 감사함으로 맞이했다.

 

(중략)

 

그날...그 밤으로......

그가 나를 탐내었던...아니 내가 그를 탐내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그는 내 온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날카로운 정점에 이르렀다.

(중략)

머리를 얼게 만드는 고통 속에서 숨조차 쉬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를 놓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는 나의 비명은 그의 입술 속에서 애무 받고 있었다.

 

부끄러움은 아픔이 되고, 아픔은 칼날이 되어 고통으로 되돌아왔지만, 또 다시 그 고통은 ‘그’라는 선물로 돌아왔다.

상처는 묘하게 절절하게 내 심장을 쓸어내리고, 내 모든 오감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악기처럼.....나는....그에게 연주되고 있었다.

그 역시......나를 위해 연주되고 있었다.

끊임없이.....내 귀를 간질이며 그는 자신의 사랑을 터뜨렸다.

 

“하아.....미녀야..........사랑해.........”

 

그의 사랑은.......육체로 표현되었다.

나 역시.......칼날처럼 그 사랑을 받았다.

(중략)

내 사랑이.......그를 안았다.

그렇게......나는.....하코네의 작은 다락방에서.......그를 가졌다.

입술을 악물게 하는.......저릿한 고통이........증거처럼 상흔으로 남았다.

 

나는........그 훈장과 같은 상흔을 안고 그의 품을 헤매었다.

그의 입술을 느끼며, 그의 애무를 받으며, 선물처럼 온 과거의 한 자락 끝에서 작은 쉼을 누린다.

 

그렇게 나는.........드디어.......여자가 되었다.

그리고......그는.......나의 남자가 되었다.

 

그래서........알게 된다.

신이 태초에 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지......

왜....하나가 된다고 하셨는지.......알게 된다.

 

모든 것은 고통이 있고...... 고통은......그 대가가 있다.

그렇게 또 강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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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거의 한달 만에 올리게 되네요.

그래도 이번은 31장이니....조금은 용서해주시길.....

 

이번 52회도 계속 끙끙대었습니다.

제주도의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고.......

끊을까 싶은 충동도 일었지만,

한번에 가기로 했습니다.

뒷감당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수위 조절은...여전히 실패이고.....

이를 어찌해야 하나....또 고민고민했으나 결국은 포기하고 올리고야 맙니다.

 

아마 52회는....님들께서 충격을 받으시지 않으셨을지......

혼자 헤아려 보며 조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허를 찔리셨지 않았을까...싶기도 합니다.

그러셨기를 바라며....

오늘 밤도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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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올렸던 글이지만, 어쩔 수 없이 친구 공개로 해놓는 바람에,

이제서야 전체 공개 버전으로 올려둡니다.

전체 공개 버전이라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시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