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삶/시와 풍경

울었다.

그랑블루08 2019. 4. 3. 21:24

 

 

<봄이 왔다. 여전히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정호승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

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창비. 2017)

 

 

 

별 생각 없이 찾아본 한 시인의 시가 나를 울렸다.

 

원래는 딸내미가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를 아느냐고 물어보는데

모른다고 했더니 딸내미가 참...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시가 되게 좋다고, 읽어보라고.

 

예전 이 시인의 시집은 몇 권 사 본 적이 있다.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한데, 한 동안 시를 놓고 살았나보다.

그래서 찾아본 <슬픔이 기쁨에게>.

이 시인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만큼이나 좋았다.

그러다 2017년에 나온 시 제목을 보고 찾아 봤더니 이 시가 나왔다.

 

참, 웃기게도 이 시를 읽는 순간, 아니 첫 행을 읽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희망을 말하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희망의 가장 바닥에 있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분노라는 사실을,

그것도 처절하게 깨지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더 이상 재겨디딜 틈도 없을 만큼, 낭떠러지로 밀려날 만큼 그 끝에 서 있을 때

희망이라는 것을 비로소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시가 너무나 대놓고 표현하고 있어서.....

 

Hope that is seen is not hope.(Romans 8;24)

 

눈에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한다.

마치 곧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진정한 희망이 아니라 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너무나 캄캄해서 절망만이 밀려오는 바닥에서

기쁨보다 분노가, 성취보다 절망이 겹겹이 쌓여가고 있을 때

비로소 희망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시인의 말처럼,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그 때를 기다린다.

기다림과 인내와 오래참음으로......

분노와 절망을 딛고, 캄캄한 새벽의 날선 검 앞에서

시인이 말한 희망을 기다리며 서 있다.

 

그래서.... 이 시를 놓고......울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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